[창간 1주년 기획] 세계 영화 100년을 분석해보다

오손 웰즈에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까지④

[트루스토리] 송은정 기자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시작된 1967년을 두고 영화사가들은 ‘혁명적인 해’라고 부른다. 이 해에 영화는 국민의 중심적인 관심사로 올라서고, 이전의 고전적 헐리우드 영화와 구별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1950년대의 냉전 이데올로기와 보수적 가치는 무너지고 1960년대의 민권운동(흑인, 빈민, 페미니즘, 좌파 학생운동, 제3세계 혁명운동)의 진보적 흐름이 영화 내부의 테마로 단련될 수 있었다.

선택된 전략은 다양한 편차를 가지고 있지만,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표되는 미국적 이데올로기와 맞선다는 점에서 테마는 공통되었다. 요컨대 영화는 텔레비전과 더불어 사회 비판의 도구이자 대안적인 가치와 제도를 재현하는 도구로 올라선 것이다.

공격의 대상은 제도에서부터 이념까지 다양했다. 미국의 전통적인 신화는 비판받았으며, 모든 위기와 갈등을 화해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식의 테마는 지양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비단 몇몇의 영화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었다.

비판적 입지를 지니는 영화는 이른바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는 흐름을 형성할 정도로 대량 제작되었다. 미국의 가치와 제도에 대해 비판을 수행하는 이러한 영화는 분명 헐리우드 영화의 연속된 흐름을 깨버리는 하나의 단절이었다.

그러나 영화사의 단절은 비판적 내용을 수용하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선명한 주제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그에 맞서는 생생한 긴장감과 표현 방법이다. 누벨 바그를 비롯한 유럽 영화의 새로운 흐름이 미국 영화의 내부로 도입된 것은 이러한 열망과 무관하지 않았다.

전복의 과정은 자신의 사고를 얽매었던 관습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말하자면 영화적 전복은 전통적인 재현 양식과 내러티브에 맞섬으로써, 기존의 헐리우드 패러다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관습에 정당성을 묻는 질문은 곧 파괴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형식으로 전복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관객들이 수동적으로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던 과거의 영화들과는 달리, 이러한 수동성을 침해하는 불연속적인 편집을 수용하고(졸업), 테마와의 상관관계를 갖는 실험적인 카메라 테크닉을 쓰기도 하며(미드나이트 카우보이), 희극과 비극이 서로 혼합하기도 한다(보니와 클라이드).

▲ 영화 '졸업'의 포스터
의미를 뒤틀고 비판하기 위해 컬러가 사용되는 영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를 지배하던 고전적인 내러티브 패턴을 붕괴시키는 영화 ‘작은거인’가 존재했다. 또한 TV에서 사용되는 카메라와 편집 기술이 영화의 포맷을 변형시키는 도구로 차용되기도 한다(매쉬). 다양한 형식 실험은 프랑스 누벨 바그의 영화들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러한 움직임은 자기 의식적으로 영화라는 매체를 마주하고 아이러닉하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 정형화된 틀을 깨기 위해 자기 부정을 감행하고 실험적인 방법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영화의 모더니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뉴 아메리칸 시네마는 철저한 운동이 되지는 못했다. 자기 부정을 향한 열망이 영화의 곳곳에 침투해 있지만, 또 한편에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른바 노스텔지어를 향한 충동이 역연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전통적인 장르가 지니는 보수적인 신화를 폭로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의 공터를 채울 수 있는 대안적인 관점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보수주의를 대신할 긍정적인 대안을 발견하는 문제가 미결된 채로 있다보니,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과거의 신화에 기대는 결과를 낳기도 했던 것이다.

외관상으로는 전복적이지만 내적으로는 보수적인 이러한 영화는 어쩌면 당대의 진보적 흐름을 바라보는 미국인 자신의 복합적인 심리를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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