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170년부터 100년 동안 계속된 무신정권과, 몽골(원나라)의 잦은 침입 및 간섭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많은 혼란과 시련을 겪었다. 원나라에 대항 하여 40년 동안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굴복하고 화친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려왕실과 귀족계급은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 소수서원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11호 안향 초상. [사진=영주시청, 소수박물관]

고려의 부흥을 꾀하는 학문

1289년(충렬왕 15년), 원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위치인 유학제거 사의 책임자로 있던 안향은 충렬왕의 원나라 방문을 수행하여 5개월 동 안 연경(원나라의 수도, 지금의 베이징)에 머물렀다. 일찍부터 유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안향(安珦)은 이때 주자학(성리학)을 처음 접하고 이것이야말로 유교의 정통임을 깨달았다.

이듬해 봄 귀국할 때 많은 주자서와 함께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온 안향은 국학교육의 부흥과 민족사상의 정립을 위해 성리학을 널리 보급시켰다. 원나라를 통해 고려에 들어온 성리학의 근본 사상인 민족주의는 결국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명나라와 친교를 맺으면서 고려가 국권을 회복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번성한 유학의 한 계통으로, 성명(性命)과 이 기(理氣)의 관계를 논한 유교철학이다. 성리학이라는 용어는 ‘성명과 의리 의 학문(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송나라 때 들어와 공자와 맹자의 유교 사상을 ‘성리(性理), 의리(義理), 이기(理氣)’ 등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면서 성리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리학은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신유학 (新儒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같은 유학이지만 주희의 성리학은 이(理) 들 강조했기 때문에 이학이라고 하고, 육구연(陸九淵)과 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은 마음(心)을 강조했기 때문에 심학이라고 한다.

공자와 맹자를 도통(道統)으로 삼는 성리학은 도교와 불교는 실체가 없고 공허한 교리만 주장한다고 여기고 이단으로 배척했다. 불교가 지배 이념이었던 당나라는 안녹산(安祿山)의 난과 황소(黃巢)의 난을 계기로 멸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를 겪었다. 이후 송나라가 등장하면 서 성리학은 국가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했다. 유학자들은 불교의 출세간 성, 반사회성, 비윤리성 등을 비판하면서 성리학만이 참된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유학자들의 눈에 은둔 성향의 도교와 세속을 떠나 출가하는 불교는 가정과 사회의 윤리 기강을 해치는 존재였던 것이다.

성리학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공동체의 윤리규범을 제시하면서 국가사상으로 발전했다. 특히 『대학』에 나오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등 팔조목(八條目)을 개인 수양과 국가통치에 필요한 행위규범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사회적 인간관계와 개인의 수양이라는 측면에서 사상을 심화 시켰다.『주례(周禮)』를 중시함으로써 사회윤리인 예(禮)를 강조하는 한편, 우주 본체와 인간 심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탐구를 심화함으로써 도교와 불교를 형이상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추었다.

송나라 학자 주자(주희)는 주렴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등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유교의 텍스트 중에서『대학』,『논어』,『맹자』,『중용』등 사서(四書)를 경전화하면서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주자는 사서에 주(註)를 달았는데 이는 나중에 성 이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처럼 성리학의 중심 텍스트를 선정하고 거기에 새로운 해석학적 틀을 제공한 책들을 주자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안향은 이를 깊이 연구하여 무신 정권과 원나라의 침입으로 황폐화된 국학교육을 부흥시키고 민족의 정신 의 바로 세우는 바탕으로 삼았다. 안향의 노력으로 성리학은 고려사회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경서(經書: 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적어놓은 책)를 탐구하는 학문적 전통이 뿌리 내렸다. 안향의 뒤를 이어 여러 학자들의 연구가 거듭되면서 신진사류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은 성리학은 조선이 개국하자 새로운 왕조의 국가사상으로 정착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고 애를 쓴 안향은 7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안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영정과 위패를 문묘에 봉안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는 백운동서원과 소수서원이 창건되는 등 많은 추모 사업이 이루어졌다.

▲ 소수서원. [사진제공=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

고려 혼란기와 안향의 행적

안향은 1243년(고종 30년) 경상북도 헌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은(順興)이며 자는 사온(士蘊), 호 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원래 이름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가, 조선시대 문 종(文宗)의 이름과 글자가 같아서 다시 유로 고쳐 불렀다. 회헌이라는 호는 송나라의 주자를 흠모한 나머지 그의 호 회합(晦庵)을 모방해서 지었다.

안향의 증조부 안자 미는 순은 안 씨의 시조로 고려 중앙군의 하나였던 흥위위에서 보승별장(정7품)을 지냈다. 할아버지 안 영유는 추밀원 부사에 추봉되었으며 아버지 안부는 태사공의 작호를 받는 등 당대의 명문집안이었다.

아버지 안부는 안향이 태어난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정의대부(정4품), 밀직부사(정3품), 판도판서(정3품) 등을 역임했다. 어머니 강주 우 씨는 예빈성 동정을 지낸 우성윤의 딸이었다.

안향이 태어난 무렵, 고려는 안으로는 무신정권이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몽골의 침입에 시달리는 등 나라가 몹시 어지러운 시기 이었다. 1170년, 보현원에서 난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집권한 무신정권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난을 일으킨 이의방(李義方)과 정중부(鄭仲夫)로부터 시작해서 이의민(李義旼)이 집권하던 시기까지를 성립기, 최충헌 (崔忠獻) 등 최 씨 가문 4대가 집권하던 시기를 확립이, 그 이후부터 무신정권이 사라지기까지를 붕괴기라고 한다.

무신정권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면이 많다. 최 씨 가문 집권기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지만 나라의 인사권을 함부로 좌우하거나, 몽골이 침입 해왔을 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일 등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난 뒤 육지의 백성 들은 돌보지 않고 향락을 일삼은 것은 무신정권의 몰락을 가져오는 단초 가 되었다.

이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태어난 안향은 한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조정 의 관리로 등용되어 개경으로 가는 바람에 본가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안영유는 추밀원 부사에 추봉된 분으로 집안에 많은 서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안향은 할아버지의 지도 아래 가학을 익히는 한편, 가까운 곳에 있는 사찰을 드나들면서 공부를 했다.

안향은 일찍부터 성리학을 공부했으며 성품이 무척 단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향의 사적을 수록한『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에는 열 살 무렵 그의 행실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성리학을 좋아했으며 성품이 단정하고 중후해 여 불필요한 말이나 웃음이 없었다.”

1258년(고종 45년), 최 씨 가문의 4대 집권자였던 최의(崔竩)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무신정권은 서서히 기울어져 갔다. 이듬해 4월에는 몽골과 강화를 체결함으로써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전란도 마침내 끝이 났다. 몽골과 강화를 체결한 지 2개월 만에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몽골에 억류되어 있던 태자가 귀국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원종(元宗)이었다.

1260년(원종 원년), 안향은 열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해서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동지공거(同知貢擧: 과거를 관장한 부고시관)로 있던 류 경은 안향의 시험지를 보고 뛰어난 문장에 감탄하며 “나중에 큰 선비가 되겠구나.” 라고 칭찬했다.

안향은 축문과 경서를 담당하는 비서성 교서랑(종9품)으로 관직을 시작했으나,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서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겨갔다. 한림원은 임금의 말씀이나 명령을 작성하는 한편 과거를 관장하고 시종관으로서 임금의 행차를 호종하고 임금에게 시강하는 서연관(書筵官) 기능도 담당하는 등 매우 중요한 기관이었다.

1265년(원종 6년), 아들 안우기가 태어나자 안향은 헌주에서 개경으로 본가를 옮겨왔다. 안우기는 1282년(충렬왕 8년) 문과에 급제해서 관직을 시작했으며, 이후 광정대부 검교 첨의찬성사 등을 거쳐 순평군으로 봉해졌다.

1270년(원종 11년), 안향이 한림원에서 일한 지 10년 째 되던 해에 ‘삼별 초(三別抄)의 난’이 일어났다. 삼별초는 최씨 가문의 최우가 집권하던 시기 에 도성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勇士)들을 모아서 매일 밤 순찰을 하고 단속하던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되었다. 도둑이 전국적으로 들끓자 야별초의 규모를 키워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여기에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주한 이들로 편성한 신의군을 포함해서 삼별초라고 불렀다.

날쌔고 용감한 군대였지만 사병(私兵)의 성격이 강했던 삼별초는 전국적으로 경찰권을 행사했다. 죄인을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죄를 심문하기도 했으며, 도둑뿐만 아니라 반역죄인 까지도 관할했다. 군사 활동에 있어 는 수도경비대, 친위대, 특공대 등의 임무를 맡아서 수행했다.

1253년(고종 40년), 고종이 몽골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강화에서 승천부(昇天府)로 행차할 때 야별초 80명이 평복 속에 갑옷을 입고 뒤를 따랐다. 1260년(원종 1년)에는 원종이 몽골에서 돌아올 때 태손(太孫: 훗날의 충렬왕) 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포(梯浦)에 나가서 맞이하고 호위했다. 1254년 몽골의 차라대(車羅大)가 침범하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야별초 80명씩을 선발해서 도성을 지키도록 했다.

삼별초는 전투에 결사적으로 임했다. 야간공격으로 적을 습격하고 복병으로 적을 쳐부수는 등 늘 선두에 서서 적을 공격했다. 이처럼 용맹하고 기동성이 강했던 삼별초는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들의 총애를 받았다. 무신들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삼별초를 휘하에 두고 지휘했다.

1270년(원종 11년), 고려와 몽골이 화친을 맺고 강화도를 떠나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이에 반발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 정부를 세우고 고려와 몽골과 대항하던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서 3년 동안 싸움을 계속했으나, 1273년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서 섬멸되고 말았다.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한 뒤에도 강화도에는 많은 관리와 백성들이 남아 있었다. 삼별초는 이들의 이탈을 막으면서 세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때 안향도 강화도에 억류되어 있었으나 무사히 탈출하여 개경으로 복귀했다. 원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안향의 충성심을 치하한 다음 봉사(종8품)에 임명하여 서도(지금의 평양)로 파견했다. 서도는 몽골 항쟁에 피해가 심했던 지역으로 빠른 복구가 절실한 곳이었다.

서도에 부임해서 청렴하고 근면하게 직무를 수행한 안향은 내시원으로 옮겨왔다. 내시원은 왕실의 경비와 경호를 맡아보는 내시를 비롯해서 많은 관리들이 소속되어 있는 궁중의 주요 관청이었다.

당시 고려는 몽골과의 오랜 전란에서 벗어나서 개경으로 환도하는 등 국가를 새롭게 정비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왕실 보좌기관이었던 내시원과, 수도 개경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던 서도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아 안향에 대한 조정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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