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를 시작하며

[뉴스퀘스트=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많은 사람들은 운명(運命)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렇게도 우리의 마음을 애태우며 파도치듯이 밀려왔던 사랑, 처절하게 힘들어서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기적처럼 극복이 되곤 했던 행운의 순간들, 그리고 눈물 나게 그리운 친구와의 그 때 그 추억 등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만은 않다.

운명은 명(命)의 운동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운(運)이라는 글자에는 돈다(轉), 움직이다(動), 옮기다(移)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우주는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기반에서 존재하고 있는 상호작용의 체계이다. 개념적으로는 그 시종을 알 수 없으니, 그 존재의 근간을 확정 시킬 수 없다.

최신과학의 견해를 빌어보자면, 우주는 상호작용에 의하여 각 존재와의 인연을 통해서 에너지를 발생시키며 그 어떤 것도 미정인 채로 상호간의 루프(loop)로 연결되어 있으며 양자나 중력의 힘을 통해 연결된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명(命)이라는 글자에는 목숨, 생명 같은 생명체의 수명이라는 물리적 의미 외에도 표적이나 목표, 자연의 섭리와 같은 운(運) 보다는 더 큰 형이상학적인 뜻이 함께 들어있다.

정리해 보자면 명(命)에는 생멸(生滅)이라고 하는 생명 본능적 차원과 지성과 자연의 표상으로서의 마음이라고 하는 우주적 본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명(命)의 함의가 태어나서 죽는다는 주제로 내려올 때 우리는 명(命)을 수명(壽命)이라고 하며, 생물과 무생물이 태어나는 생성을 생명(生命)이라고 말한다.

숙명(宿命)이라는 말은 운명(運命)의 운동적 측면이 과거사건이나 제한된 상태를 만나서 고정됨을 뜻한다. 따라서 본 지면의 제목을 ‘운명(運命)을 말하다’로 하지않고 ‘명(命)을 말하다’로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같은 깊은 의미를 잘 생각하지 못한 채, 운명(運命)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곤 한다.

사실 운명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주 손 쉽고도 편한 길이다. 왜냐하면 운(運)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는 헛된 망상을 품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 가서 명(命)을 운전(運轉) 할 수 있다는 오만한 마음을 품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어디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기만 할까?

특히, 사주나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운에 올라타려는 희망이, 사주나 점을 봐주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운명을 운전하고 싶은 욕망이 일게 마련이다.

이 같은 이들은 개선과 변화 보다는 체념과 안주라고 하는 불일치를 통해서 자성(自性)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를 저 멀리의 과거와 수동적인 미래로 밀어놓게 된다.

어디 그 뿐일까? 잘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약효과’나 잘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얽매여서 자신의 허물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운명을 책망하거나 타인을 원망하게 되는 ‘불쾌감'에 휩싸이게 된다.

필자는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과 주역(周易)이론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주명리학은 자연의 기운과 생명체의 기운이 호환되면서 만나는 시점인 생년월일시를 통해서 기운의 교감을 측정하여 그 사람의 본성을 알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고, 주역은 음(陰)과 양(陽)이라고 하는 상대적 에너지의 상호작용이라고 하는 자연 일체를 담아서 매달아 놓은 도구이다.

도구는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하다. 수학의 수리는 자연 그자체가 아니고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數)를 통해서 자연의 패턴을 이해하고 그 확률을 계산한다. 자연은 수(數)의 패턴으로 조화를 이룰 뿐 수(數) 그 자체가 자연은 아니지 않은가? 과학 또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이지 세상 그 자체가 과학은 아니지 않은가?

이야기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종종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이 확정하지 못한 것을 확정시키기도 한다. 또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을 확인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기도 한다.

앞으로 필자는 이 코너를 통해서 ‘명(命)’과 관련하여 필자가 경험해 오고, 만나오고, 공부해온 바를 토대로 이론, 담론, 인터뷰 등 다양한 표현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와 맞닿아 있는 명(命)에 대한 풍부한 소재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이 소재들은 어디까지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평을 넓히기 위한 것일 뿐이며 결코 세상을 단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필자의 인식 경계는 어리숙하고도 미숙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해하는 만큼 설명하고 논쟁하는 것도 서로의 의식의 성장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평을 열어 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비록 부족하더라도 독자 여러분의 많은 지도와 가르침 그리고 큰 격려를 부탁드린다.

필자 : 노해정(盧海靜)

인문학과 경제학,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사람의 선천적인 성향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의 분석은 단순히 사주를 봐주거나 점을 쳐주는 형태가 아니다.

그는 사주 명리학은 본성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이며, 주역은 세상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체계라고 설명한다. 과거와 미래는 동일 성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분석은 대수(大數)적이고 메타(Meta)적이며, 결과 보다는 원인에 접근한다. 그는 월드컵 4강, 금융위기 예측 등 많은 미래 예측을 자신의 이론에 입각하여 내놓은 바 있다.

그는 동양학, 교육학, 과학 그리고 인본적 철학체계를 연구하여 세상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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