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량사거리를 부르는 장면. [사진=하응백 문화에디터]
놀량사거리를 부르는 장면. [사진=하응백 문화에디터]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여러 연주자가 서서 소고를 두드리며 합창을 노래를 부르는 <놀량사거리>를 처음 보고 들었을 때, 참 특이한 노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판소리나 다른 국악의 소리를 연희하는 방식보다 우선 물량적으로 많은 사람이 동원되는 것이니 만큼, 원래 노래하는 주체가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일반적인 서도소리나 경기소리와는 상당히 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가 하는 생각으로 <놀량사거리>와 이와 흡사한 방식으로 연희되는 <경기산타령>의 노랫말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놀량사거리>에 대한 의문은 점점 호기심과 흥미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놀량사거리>의 노랫말을 보면 참으로 이채롭다. <놀량사거리>에는 여러 원본 시가(詩歌)가 다채롭게 들어있는 것이 발견된다. <놀량사거리>는 네 곡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연곡 형식인데, 이 네 곡은 각각 <놀량>, <사거리>, <중거리>, <경발림(경사거리)>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중 <놀량>을 보면, “어린 낭자 고운 태도(態度) 눈에 암암(暗暗)하고 귀에 쟁쟁(錚錚)”이라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은 18세기의 작자미상의 가사인  「상사별곡(想思別曲)」에서 따 온 것이다. 12가사 중의 하나이기도 한 「상사별곡」의 “어린 양자(樣姿) 고운 소래 눈에 암암(暗暗)하고 귀에 쟁쟁(錚錚)”에서 차용한 구절인 것이다. 그런데 ‘어린 양자’에서 양자는 ‘모습과 태도’를 말한다.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상사별곡」에서 ‘어린 양자’ 대목은 “눈에 어리는 모습과 태도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듯하다”의 뜻이다. 하지만 <놀량>에서는 이 ‘양자’를 낭자로 바꿔치기해 놓았다. ‘어린 양자’에서 ‘어린’은 눈에 어리다는 뜻이고, ‘어린 낭자’에서의 ‘어린’은 어리다(幼)의 뜻이다. 아마도 구전되면서 후대에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게 되면 뜻도 “어린 아가씨의 고운 태도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듯하다”로 바뀐다. 이런 뒤바뀜은 상당히 민중적이다.  

<사거리>에도 “백구(白鷗)는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하고 장송(長松)은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장성일면(長城一面) 용용수(溶溶水)요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은 고려 예종 때의 시인 김황원이 지은 시 “大野東頭點點山 長城一面溶溶水”를 시조가 차용하고 이 시조를 다시 <사거리>가 차용한 것이다. 1728년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에 다음과 같은 시조가 있기에 그런 사정을 알 수 있다. 

 또 <사거리>에는 12가사의 「황계사」에 나오는 “저 달아 보느냐 임 계신 곳을 명기(明氣)를 빌려라 나도 잠깐이나 보자”라는 구절도 차용하고 있다. 또 <경발림>에는 삼산반락(三山半落)에 청천외(靑天外)요 이수중분(二水中分)의 백로주(白鷺洲)란다 이백의 시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에 나오는 구절도 차용을 하고 이 외에도 여러 노래에서 빌린 듯한 노랫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왜 이런 노래가 탄생했을까?
 
여러 문헌자료에서도 확인되듯이 <놀량사거리>는 사당패가 불렀던 노래다. 사당패는 조선조 세조 이후 절을 근거지로 삼아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을 했던 집단이었다. 거사(居士)와 사당(舍堂)으로 이루어진 이 집단은 조선 중기까지는 사찰의 홍보와 재정을 담당하다가,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점 속화되어 유랑 연예집단으로 변모해갔다. 이 집단은 겨울에는 사찰 혹은 사찰 아래 사하촌(寺下村)을 형성하면서 거주하다가 봄이 되면 전국으로 기예를 팔러 다녔다.

줄타기 등의 기예와 <놀량사거리> 등의 음악이 이들의 주된 공연 레퍼토리였다. 이들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상업이 발달한 도시지역에서 공연을 펼쳤고, 판소리의 노랫말에서도 나오듯이 잔칫집에도 기웃거렸다. 또한 과거에 급제한 양반 계층의 퍼레이드와 잔치에 길잡이 구실을 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이들의 기예는 분화되어 노래는 각 지역, 특히 서울과 평양의 소리패에게 이어지면서 분화와 토착화가 이루어진다. 

<놀량사거리>와 여기서 분화되어 서울 지방에서 토착화된 <경기산타령> 노랫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기층 민중의 역사와 그들의 생활과 애환이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대목에서 ‘에라디야’를 외치며 이들은 봄을 맞아 사찰에서 나와 전국 유람을 시작한다. 이 유람은 말이 유람이지 생계를 위한 밥벌이 공연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이 어디로 갈까? <사거리>에 보면 “일 원산 이 강계 삼 포주 사 법성”이다. 이곳들은 모두 상업이 발달한 장시(場市) 지역이다. 이 지역에 가야 사람이 있고 돈이 있다. 그들이 또 주목하는 곳은 평양이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 주변의 시장이나 포구 주변이다. <놀량사거리> 전체에서 동소문이나 수락산, 과천 등 서울 주변의 지명이 많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뒷산타령>에 보면 “수락산 가는 길에 개운사(開運寺) 중을 만나 중더러 묻는 말이 네 절 인품이 어떻느냐”는 대목이 나온다. 왜 느닷없이 개운사 절 인품을 물었을까? 이 구절은 동소문을 벗어나 수락산 가는 길에 개운사(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절) 중을 만나 개운사의 절 인심이 어떠하냐고 묻는 말이다. 이 노랫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묻는 사람은 전국을 떠돌다 마침 서울로 와서 수락산으로 가는 사당패였기 때문이다.

사당패는 혹시 개운사에서 밥은 먹을 수 있는지 잠은 잘 수 있는지 이런 것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개운사 절 인심이 좋다면 굳이 수락산까지 가서 하룻밤을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놀량사거리>에 절 이름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이들 사당패가 숙식을 주로 해결하던 곳이 전국의 사찰이었기 때문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경발림>에 보면 “연산(連山)의 김덕선(金德善)이 수원(水原)의 북문(北門) 지어 나라의 공신(功臣)되어 수성옥이 와류감투 꽉 눌러 쓰고 어주(御酒) 삼배(三盃) 마신 후에 앞에는 모흥갑(牟興甲)이 뒤에는 권삼득(權三得)이 송흥록(宋興祿)에 신만엽(申萬葉)에 쌍화동(雙花童) 세우고 어전(御前) 풍악을 꽝꽝 치면서 장안 대로상으로 가진 신래(新來)만 청(請)한다 에”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은 충남 논산군 연산 사람으로 대목(大木)이었던 김덕선(金德善)이 정조가 수원 화성을 완성한 후 큰 포상을 내려 고향까지 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대목이다. 모흥갑(牟興甲), 권삼득(權三得), 송흥록(宋興祿), 신만엽(申萬葉)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김덕선이가 임금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마치 과거에 급제한 것처럼 퍼레이드를 한 것에서 유래한 노랫말이다.

이런 행차에 참여한 사당패들, 혹은 그들과 같이 예술적·인적 교류를 가졌던 예인들은 한 몫 챙길 수 있는 기회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놀량사거리>의 노랫말은 그들이 사찰에서 나와 전국을 유람하면서, 먹고 자고, 돈을 벌고, 다른 노래를 배우고, 자기들의 노래를 하고 춤을 춘, 연예활동의 종합 기록이었다. 사랑타령도 나오고 사랑의 배신에 대한 호쾌한 포기도 나오며, 풍자도 등장한다. 그러다보니 다른 노래의 노랫말도 섞여 들어갔다. <놀량사거리>의 노랫말은 종합선물세트와 같이 여러 노랫말과 자신들의 이야기를 함께 버무린, 희로애락의 버라이어티 노랫말 뭉치였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사당패는 사라지고, 그들의 노래는 지역 노래패에 전승되었다. 그 지역패들 중 그들의 고유성을 잃지 않고 유지·변모하면서 21세기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서도의 <놀량사거리>와 서울의 <경기산타령>이다.

시대가 변하였으므로 그 노래는 유랑성을 잃고 박제화 되어가고 있지만, <놀량사거리>는 우리 민속 음악의 전개와 변모 양상을 살펴보는 데, 또 기층 민중 국악의 전개양상을 살펴보는 데 시금석(試金石) 같은 존재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무형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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