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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①] 안향 : 성리학의 아버지 (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①] 안향 : 성리학의 아버지 (3)
  • 디지털뉴스팀
  • 승인 2019.01.28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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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인 소수서원. [사진 제공=영주시청, 소수박물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인 소수서원. [사진 제공=영주시청, 소수박물관]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297년(충렬왕 23년) 첨의부 첨의참리가 된 안향은 세자이보를 맡았다. 세자이보는 왕위 계승 1순위인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자리였다. 아버지 충렬왕과 원나라 공주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세자는 세 살 때 세 자로 책봉된 이후 줄곧 원나라에서 성장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으로 반식민지 상태였다. 고려 조정에서도 아버지 충렬왕보다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권력이 더 강했다.

세자의 스승이 되다

세자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국대장공주와 원 나라에 눌려 있던 충렬왕은 정사를 멀리 하고 자주 사냥을 나가거나 연회를 즐겼다. 1290년 만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합단적(哈丹賊)이 원나라에 패하자 고려로 침범해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충렬왕은 자신은 늙었다면서 적과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원나라에 있던 세자는 외할아버지(원나라 세조)에게 요청해서 1만 명의 구원부대를 이끌고 합단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1292년, 세자는 고려로 귀국할 때 아버지 충렬왕에게 몸을 숙이고 마중 나오라고 할 정도로 권세를 부렸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1297년 5월, 세자의 어머니이자 충렬왕의 왕후였던 제국대장공주가 서른아홉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무덤덤한 아버지의 모습에 분개한 세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충렬왕이 총애하던 궁녀와 신하들 탓으로 돌리고 그들을 처형했다.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권력이 약해진 충렬왕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원나라에게 알렸다. 1298년 1월, 세자가 왕위에 올라 충선왕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인사제도부터 뜯어고쳤다. 새 인물을 등용하여 아버지 충렬왕 때의 측근 정치를 개혁하려고 했다. 새로운 권력기구로 사림원(詞林院: 왕명의 출납과 문서를 작성하고 인사행정을 관장하던 관청)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권세가들의 토지 소유와 양민 착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고려의 옛 제도를 복원하는 정책도 시도했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생겨났다. 기득권 세력 중 상당수는 원나라 조정에 끈이 닿아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기득권 세력은 충선왕을 몰아내기로 계획하고 그의 약점을 원나라에 고했다.

충선왕은 원나라 황족 출신의 계국대장공주를 왕후로 맞아들였으나 둘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 충선왕은 어머니를 멀리한 충렬왕처럼 여러 후궁을 거느렸다. 그중 조비를 가장 총애했는데 조비가 충선왕이 왕후를 멀리 하도록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비의 어머니가 무당을 시켜서 왕후를 저주하는 글을 대궐 문에 붙이는 일도 벌어졌다. 이 사실에 크게 분노한 계국대장공주를 조인규와 그의 가족을 잡아 가두고 원나라에 사건의 전말을 알렸다.

1298년 5월, 원나라에서 온 사신은 조비를 원나라로 압송하고 조인규 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 와중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던 충선왕 은 그해 8월 계국대장공주와 함께 원나라로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왕위에 오른 지 7개월 만에 충선왕은 폐위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안향은 충선왕이 원나라로 불려가는 길을 시종하여 함께 연경으로 갔다. 

연경에 도착하자 원나라 황실에서 사건의 전모를 따지기 위해 충선왕을 황궁으로 불렀다. 원나라 황제 앞에서 충선왕이 추궁당하는 것을 막 기 위해 안향이 대신 가겠다고 했다. 아무리 부마국 신세라지만 엄연히 한 나라의 왕인데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하면 체통이 서지 않는다고 안향은 생각했던 것이다.

“너희 왕은 어찌 하여 계국대장공주를 멀리하는 것이냐. 우리 원나라를 무시해서 그런 것 아니냐?”

안향을 접견한 원나라 황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제이시여, 예로부터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었습니다. 대대로 원을 받들고 따랐습니다. 감히 고려가 원을 무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또한 성현의 말씀에 이르기를 베갯밑송사는 모른 척하는 게 옳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왕실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신하된 도리로서 이를 함부로 따질 수 있겠나이까.”

안향은 황제에게 고려는 원을 배신한 적이 없다, 그리고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문제는 부부 간의 갈등이므로 남이 함부로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다, 라고 아뢴 것이었다. 참으로 대담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고려를 닦달하려고 했던 황제는 안향이 논리적인 답변을 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신들이 나서서 안향에게 물었다.

“그대가 성현의 말씀을 논했는데 그대의 나라에도 예법이 있는가?” 

안향이 성현을 들먹이자 원나라 대신들은 안향의 학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질문을 한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원의 문무과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원에 예법이 있다면 고려에도 예법이 있을 것입니다.”

안향의 조리 있는 답변에 원나라 대신들은 감탄을 했다. 다시 안향에게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졌다. 주로 성리학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 또한 막힘없이 대답을 하자 대신들은 경탄하면서 “이분이 동방의 주자이다”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원나라는 개국한 지 27년밖에 되지 않은 나라여서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그리 깊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안향이 성리학의 본고장인 중국 사람보다 성리학에 대해 더 잘 알자 대신들이 깜 짝 놀란 것이었다. 10여 년 전 연경을 방문했을 때 많은 주자서는 가지고 귀국했던 안향은 그동안 꾸준히 공부를 해서 성리학에 관해서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안향의 학식에 감탄한 원나라 대신들은 그를 ‘동방의 성자’,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했다.

나라의 교육, 국학을 바로 세우다

고려로 돌아온 안향은 수국사로 임명되었다가 1300년에 광정대부찬성사를 거쳐 벽상삼한삼중대광에 올랐다. 1303년(충렬왕 29년), 안향은 미국 학학정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지금의 난징)으로 보내서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및 문묘(文廟)에서 사용할 제기(祭器), 악기(樂器),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史書), 주자서 등을 구해오도록 했다.

안향은 일찍부터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에 관심이 많았다. 1278년(충렬왕 4년), 국학을 관장하는 국자사업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오랜 전란으로 인해 국가교육이 피폐해진 탓에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이 소홀한 것을 통탄했다. 그리하여 틈만 나면 국학을 부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원나라에서 주자서는 가져와서 보급한 것도 국학교육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1303년에는 문무백관들을 설득해서 6품 이상에게는 은(銀) 1근, 7품 이하에게는 포(布)를 내게 했다.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킨 다음 그 이자를 나라의 교육재정에 사용하도록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충렬왕도 왕실의 금전과 곡물을 보조했다. 이때 백관 하나가 자신은 무인이라면서 기금 내는 걸 거부하자 안향이 이렇게 말했다.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돈을 내서 학생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한다면 그는 공자의 도를 아직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다.”

그 말에 무인은 부끄러워하며 즉시 기금을 냈다. 이후 양현고는 교육 재정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304년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섬학전은 육영재단과 비슷한 성격으로, 국학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재정이 원활해지도록 도움을 주었다.

같은 해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었다. 대성전은 국학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시설이었다. 오래전부터 건립을 추진해왔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인 사건으로 나라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안향이 사재를 헌납하고 노비를 제공하여 대성전 건립에 앞장 선 끝에 마침내 완공을 한 것이었다. 당시의 정황을『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학교가 황폐하고 교육은 추락하여 사대부마저도 학문을 제대로 알 지 못한 채 이단을 숭상하여 부처에게 기도하고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등 풍속이 오염되어 있었다. 선생은 홀로 이를 근심하여 이단을 배척하고 성인의 도를 밝히고 국학을 부흥시켜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순은에 있는 밭 30이랑과 노비 100명을 국학 에 바쳐서 편의를 제공했다.”

대성전이 완공되자 김문정(金文鼎)이 중국 강남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화상을 모시고 제기와 악기도 갖추고 학생들에게 강론하기 위해서 수집한 경서와 사서도 구비해놓았다. 비로소 교육기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원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일부 대신들이 충선왕의 귀국을 막고 있는 오기, 왕유소, 송린 등의 죄를 사신에게 고하려고 하자 안향이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오기 등의 죄는 막중하지만 이는 고려의 문제이므로 고려가 해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원나라 사신에게 호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충선왕의 스승이었던 안향은 정치적으로 충선왕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정적들을 변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자별 등이 군대를 동원해서 오기 등을 체포하려고 하자 다시 안향이 나섰다.

“병사를 함부로 동원하는 것은 왕권을 위협하는 행동이다. 이는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므로 옳지 못하다.”

대의명분을 중시한 안향은 비록 적을 이롭게 하고 자신에게는 불리한 일일지라도 정도에서 벗어난 행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1305년(충렬왕 31년), 안향이 예순세 살이 되었을 때 아들 안 우기가 일직부사에 임명되었다. 15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관직을 맡게 되자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며 축하했다. 이에 앞서 안 우기는 1301년에는 국자제주로 있으면서 150명의 인재를 선발했고 1305년에는 우부승지로 있으면서 73명의 인재를 선발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왕 조에서 과거 시험관과 밀직부사라는 중요한 관직을 함께 거치는 영광을 누린 것이었다.

1306년(충렬왕 32년) 9월 12일, 안향은 예순네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충렬왕은 특별히 장지를 하사하여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대덕산(大德山)에 묻히도록 했다. 안향이 이룬 학문적 업적을 ‘문(文)’,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덕을 ‘성(成)’이라 하여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318년에는 충숙왕(忠肅王)이 안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원나라 화공에게 화상을 그리게 했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안향의 화상은 조선 명종 때 고쳐 그린 것이다.

안향은 학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성인의 도는 일상적인 윤리이다. 아들은 마땅히 효도하고 신하는 마땅히 충성하고 가정은 예로써 유지하고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 몸은 반드시 경으로 닦고 일은 반드시 성으로 해야 한다.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가서 인륜을 무시하니 의리에 역행하는 무리이다. 근래 전쟁으로 학교가 퇴폐하여 선비는 학문을 할 줄 모르고 배우는 사람 은 불서를 즐겨 읽고 어둡고 텅 빈 교리를 따르니 매우 슬프도다. 내 일찍이 중국에서 주회임(주자)이 쓴 책을 보았더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선불을 배척하므로 그 업적이 공자에 비교할 만하다. 공자의 도를 배우려면 회합(주자)을 먼저 배우는 것이 좋다.”

안향은 효(孝), 충(忠), 신(信), 경(敬), 성(誠) 등 유학의 덕목을 강조했다. 아울러 선불(禪佛)을 이론적으로 배척한 성리학에 심취하여 주자를 공자 와 함께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공자를 공부하려면 먼저 주자를 배우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하면서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보급시켰다.

성리학이 성행하던 무렵의 남송(南宋)은 이민족 금나라의 침입으로 국가적, 민족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무렵 고려의 상황 역시 금나라와 비슷해서 무신들의 집권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골의 침탈 등으로 나라가 안과 밖으로 어지럽고 혼란한 상태였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안향은 고려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불교의 관념적이고 현실부정적인 세계관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서 중세 봉건사회의 보편적 세계관을 표방하는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널리 보급하는 한편 국학교육을 새롭게 정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안향의 학문은 문하 6군자라고 불리는 권부, 우탁, 이진, 이조년, 백이정, 신천 등의 제자에게 이어졌다. 권부의 문하에서 이곡, 이 인복, 백문보, 이제현 등이 배출되었으며, 이곡의 문하에서는 이색, 정몽주, 박상춘, 권근 등의 제자가 배출되었다. 조선이 개국하자 정몽주와 권근에게서 배운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장영창, 조광조 등으로 안향의 학문은 계승되었다. 고려 말기 들어서 성리학에 심취한 신진사류들이 대거 득세하여 새로 운 왕조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하자 성리학 사상은 국가사상으로 성장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나라의 중심사상으로 성장한 성리학을 이 땅에 도입하고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안향은 오늘날에도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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