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항쟁 다시 읽기] 분단을 위해 자행된 양민학살

 
양민 학살로 시작된 슬픈 대한민국 역사 속으로…

[트루스토리] 해방 후 새로운 조국,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민족의 요구가 짓밟히고 이승만 정권과 미국이 주도하는 UN의 결정으로 남쪽만의 단독선거를 통해 분단이 구체화되고 있던 1948년, 외로운 남도 제주에서는 분단을 반대하는 민중들의 4.3항쟁이 있었습니다. 수 만명의 양민이 학살되었음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50년간 이를 감추고, 억눌러왔습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도 차원의 공식 유령제가 처음 열렸을 때 제주도민의 대분이 그 자리에 유족으로 섰습니다. 50년 전 학살당한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 석자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부른 첫 자리였습니다.
 
이름 석자를 마음 놓고 부르는데 50년이 걸린 대한민국의 역사, 양민학살로 시작된 대한민국의 역사는 4.3의 진실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진실 외면, 청산해야 할 역사를 묻어두고는 단 한발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역대 정권이 국가권력을 휘둘러 고문하고, 생명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러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4.3민중항쟁이 현재도 진행되는 역사임을 증명합니다.

제주 4.3 항쟁의 전개과정과 성격

미군정기 제주에서 발생한 4·3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50년이 지나도록 대한민국 정부는 이 문제 해결을 외면하다 김대중 정부시절 2000년 1월 12일 제주 4·3특별법 제정과 공포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되었습니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 이듬해  4·3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제주에서는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을 벌였습니다.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한 뒤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도지사 및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전개했습니다. 한달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2500명이 구금,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습니다.           

극심한 탄압과 투쟁과정에서 조직 노출 위기가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당국에 등 돌린 민심에 기초해 조직 수호와 방어, 그리고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결정했습니다.
 
1948년 4월3일 새벽,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습니다.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요구한 무장대에 대한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지만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의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협상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등으로 깨졌고, 미군정은 제20연대장과 24군단 작전참모를 제주에 파견하고,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10선거 추진을 강행했습니다. 그러나 5월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 되었습니다.
 
이에 미군정은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을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제주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는 무장세력의 투쟁이 약화된 1년 뒤에나 가능했습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에 또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일어나 대한민국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산간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고,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습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사면정책으로 한라산에 피신해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습니다. 1949년 5월10일 재선거가 다시 치러졌고, 그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습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고,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제주 4·3 항쟁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시작으로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무장봉기후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단독정부를 수립으로 나라의 분단을 강행한 이승만 정권, 미군정이 4.3 학살의 주범입니다.

4.3 민중항쟁의 현재적 과제

4.3항쟁으로 인한 피해는 인명피해는 물론 가옥손실 등 물적 피해와 공동체의 파괴, 연좌제 등 유형ㆍ무형의 피해는 실로 막대해서 피해실태를 계량화하여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족이 학살되었음에도 신고조차 꺼리는 50년 넘게 강요된 피해의식, 신고할 유족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가족도 있습니다.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희생당한 어린아이가 많은 점 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피해 숫자를 정확하게 확인하기조차 힘든 실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건이 종결된 이후에도 연좌제라는 족쇄로 형언키 어려운 피해를 주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정신적ㆍ신체적 후유증도 그에 못지않게 지속되었습니다. 또 간과하지 못할 피해로는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살던 삶의 공동체가 뿌리 채 파괴되는 등 무형의 피해도 유형을 달리하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돌이켜볼 때 4.3 항쟁의 더 큰 문제는 빨갱이로 몰아 국가권력이 양민을 학살하고도 이에 대한 정부차원의 사과와 진실 규명, 그리고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제대로 된 노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청산되어야 할 역사가 숨겨지고, 왜곡된 것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역대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폭력으로 수 많은 민중을 희생시키고도 반성하지 않고, 군림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용산철거민 살인만행이 그러하고, 중앙정보부원조차 간첩으로 조작하던 악마의 시대, 박정희 정권의 사법살인이 그러합니다.   

전두환 정권시절 자백만으로도 간첩을 만들던 국가폭압기구에서 자백하면 간첩이 되고, 죽으면 의문사가 되었습니다. 고문을 하면서도 “너 같은 빨갱이는 죽여도 아무 일도 없다”는 자신감은 국가권력이 4.3 양민학살부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비호해온 덕분입니다.

청산되어야 할 과거가 청산되지 못한 대한민국, 역사마저 왜곡하는 현실은 오늘, 우리가 4.3항쟁을 다시 돌아보고, 우리가 세워야 할 미래와 자신의 삶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박영식 시사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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