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담을 비롯, 정운경, 황유정 등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세 판서가 연이어 살았던 삼판서 고택.  [사진=영주시청, 봉화군청]
김담을 비롯, 정운경, 황유정 등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세 판서가 연이어 살았던 삼판서 고택. [사진=영주시청, 봉화군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이순지(李純之)를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순지의 본관은 양성(陽城)이며 자는 성보(誠甫)로, 1427년(세종 9년) 문과에 급제했다. 문관 출신이었지만 서울의 위도를 정확하게 계산해 낼 정도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순지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세종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과학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하게 된 것이었다.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 내외편』을 완

1435년(세종 1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서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세종으로부터 후임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은 승정원은 집현전 정자로 있던 김담을 ‘나이가 젊고 총민(聰敏)하고 영오(潁悟)하므로 맡길 만한 사람’이라면서 추천했다.

그러나 세종은 관직을 시작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은 새파란 나이의 김담만으로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삼년상을 치르고 있던 이순지를 정4품으로 승진시키면서 1년 만에 다시 불러들였다. 당시로서는 아무리 국가의 일이지만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지 않는 것은 매우 획기적 인 일이었다. 그만큼 세종이 천문학 프로젝트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순 지를 그 정도로 아꼈던 것이다. 훗날 김담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세종은 삼년상 도중에 돌아오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다.

이후 이순지와 김담은 함께 세종의 천문학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운명적인 관계를 맺었다. 정확하게 열 살 차이였던 이순지와 김담은 세종 재위기간 동안 천문학에 관련된 거의 모든 업적을 함께 이루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천문학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했다.

이순지와 김담이 함께 이룬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한 것이다. 1439년, 어명에 의하여 역법 교정에 착수한 이순지와 김담은 3년 만인 1442년에 『칠정산 내외편』을 완성했다. ‘칠정’은 일곱 개의 운동하는 천체인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칠정산’은 이들의 움직임을 계산한다는 뜻이다. 이들의 움직임을 미리 계산하면 해와 달과 지구가 겹쳐서 발생하는 일식이나 월식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고려 말부터 중국 원나라에서는 천문학과 역산학이 발달해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천문학자들은 아직 그 내용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세종은 즉위하면서부터 원나라를 기준으로 한 수시력(授時曆)과 명나라를 기준으로 한 대통력(大統曆)은 우리나라 실정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고 우리에게 맞는 역법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천문과 역법은 문과 출신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분야여서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데 이순지와 김담이 수년 동안 노력을 기울인 끝에 『칠정산 내외편』을 완성함으로써 서울을 기준으로 삼아서 완벽하게 관측하고 계산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칠정산 내외편』이 완성된 1442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일식과 월식을 제대로 예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서 중국과 아랍, 그리고 우리나라뿐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 역법서인 『칠정산 내외편』에 대해서 세종이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는지는 내편 서문에 “이리하여 역법이 아쉬움이 없다 할 만큼 되었다”고 적은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순지와 김담은 15세기 조선의 천문학을 독자적인 역법을 가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었다.

 『칠정산내외편』 이외에도 이순지와 김담은 당시 천문학에 관한 대부분의 저서를 함께 연구하여 펴냈다. 1445년에 간행된 『제가역상집(諸家易象 集)』은 중국의 여러 천문학자들의 이론을 천문, 역산, 천문기구, 시계 등으로 나누어서 정리한 책이다.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천문유초(天文類抄)』 는 천문학개론서이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 두 책은 당시 천문학 연구서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1459년에 세조의 명으로 완성한 『기정도 보속편(寄正圖譜續編)』은 풍수지리에 관한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과학을 좋아했던 인문학자

김담은 1416년(태종 16년) 경상북도 영천군 성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 시호는 문절(文節) 이다. 아버지는 현감(종5품)을 지낸 김효랑이고 어머니는 고려시대 때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의 딸 평해 한씨였다.

김담은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뛰어나서 한번 듣거나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영특함을 보였다. 손자의 총명함에 탄복한 외할아버지 황유정은 시를 지어 칭찬하기도했다.

우연히 청려장을 이끌고 사립문을 나서니(偶携黎出柴扉) 
사월 화창한 날씨에 제비들이 나는구나(四月淸和燕燕飛) 
흥에 취해 사위 김씨 집을 들렸더니(乘興往尋金氏子)
장미 한 송이가 성긴 울타리에 빼어나네(薔薇一朶秀踈籬)

1434년(세종 16년), 고향 영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김담은 이듬해 과거에 급제했다. 앞서 본 대로 이때 형제가 나란히 집현전 정자로 임명되어 그 일을 선산에 가서 조상에게 고했는데, 형제가 정자 신분이 되어 고한다고 해서 그때 이후로 선산이 있는 마을을 정자동이라고 불렀다.

김담은 1437년 집현전 저작랑을 거쳐 1439년 집현전 박사가 되었다. 이후 집현전에서만 17년 동안 근무하면서 이순지와 함께 조선의 과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데 큰 기여를했다.

1440년에 김담은 국어를 연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집현전 학사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하던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것으로 여겨진다. 1443년 에는 봉상시주부가 되었으며 1444년(세종 26년) 이순지, 정인지 등과 함께 경기도 안산에 가서 양전(量田) 사업에 관한 실태를 조사했다.

양전은 당시 국가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논과 밭에 대한 세금을 거두는 일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때의 조사를 바탕으로 김담은 논밭에 대한 세금을 9등급으로 나누는 제도를 확립한 「양전사목(量田事目)」을 남겼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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