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어진' 1872년, 비단에 채색, 220cm×151cm, 국보 제317호, 어진박물관 소장, 조중묵, 박기준 등
'태조 어진' 1872년, 비단에 채색, 220cm×151cm, 국보 제317호, 어진박물관 소장, 조중묵, 박기준 등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이다.

태조는 조선을 개국한 시조로서의 상징성이 있었으므로 조선 왕실에서는 특별히 국초부터 태조 어진을 제작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봉안해왔다. 공식적으로 서울의 문소전을 비롯하여 경주·개성·평양·전주·영흥의 여섯 곳에 건물을 지어 태조 어진을 봉안했고, 이후에도 많은 태조 어진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고 있는 태조 어진은 전주의 경기전에 봉안된 한 점뿐이다. 과거에는 어진이 낡고 오래되면 다시 그려 보관했는데, 이 어진 역시 고종 9년(1872)에 새로 이모한 어진이다.

익선관을 쓰고 푸른색 곤룡포를 입은 태조는 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곤룡포 속에 입은 포의 깃이 목 위로 바짝 올라와 있어 경건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어진 이모 당시 흰색 비단에 써서 붙인 ‘태조대왕어용 소자사복지구년 임신 이모(太祖大王御容 小子嗣服之九年壬申 移摸)’(여기서 사복은 왕위를 물려받은 일이란 뜻이며, 따라서 이 표제는 고종 9년인 임신년에 이모한 태조 어진이라는 뜻이다)라는 표제가 있고, 그 옆에 대한제국 성립 이후 붉은 색 비단에 써서 붙인 ‘태조고황제어진(太祖高皇帝御眞)’이라는 표제가 있다.

이 태조 어진은 19세기에 다시 그린 것이지만, 조선 초기의 초상화 기법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다. 각이 진 옷 주름이나 옆트임 사이로 삐져나와 보이는 하늘색과 붉은색 포 자락의 형태, 의자 아래에 깔려 있는 채전(카페트) 등은 조선 초기에 제작되었던 초상화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익선관 상부와 이목구비의 묘사에 사용된 음영법은 19세기에 사용되었던 화법이다.

곤룡포는 뒤에서 짙은 잿빛으로 먼저 칠하고 앞에서 주름을 선묘로 묘사하였는데, 선 둘레로 미세한 선염 효과가 보인다. 어깨와 가슴의 보 부분은 금박으로 처리하고, 앞면은 금분에 아교를 섞는 니금기법을 사용하여 정교하지만 표면 광택이 과도하게 번쩍거리지 않게 처리한 후 채색하였다.

곤룡포는 조선 시대 국왕의 시무복으로 붉은색 포에 오조룡보(五爪龍補)를 양어깨와 가슴과 등에 달았다. 보에 수놓은 용의 발톱이 다섯 개라서 오조룡보라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금실을 써서 흉배를 직접 직조하였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금실로 천에 수를 놓아 만들었다.

조선 시대에 왕은 붉은 색 곤룡포를 입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 성립 후에 고종 황제는 명나라의 황제와 같은 황색의 곤룡포를 입었다. 그런데 어진 속의 태조는 푸른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의문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이 태조의 영정에 배례한 뒤, 태조가 입은 곤의가 푸른색으로 예복이 아닌듯하다고, 그 까닭이 무엇인지 의문을 표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숙종의 이 의문에 영부사였던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답하는데, 고려 시대에는 청색을 숭상했고, 태조 연간은 고려와 시대가 멀지 않기 때문에 더러는 청색 곤의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의견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숙종실록』 숙종 14년(1688)).

이에 대해 박성실 교수는 그 논지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태조 어진의 청포 익선관 차림은 단종이 즉위한 해 아직 고명을 받기 전에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때의 의장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조의 청포 익선관 차림도 태조가 명나라로부터 고명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입은 의식용 의장이라는 것이 박성실 교수의 주장이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화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 어진은 초상화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진은 국왕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특히 태조의 어진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국왕들은 정치적 위기에 처하거나 나라의 기강을 다시 세워야 할 때, 태조의 어진을 새로 제작하고 봉안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 초기부터 많은 어진을 제작하였지만, 조선 전기의 어진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망실되고, 태조 어진 일부와 세조 어진만 보전되었다. 전란이 끝나자 조선의 국왕들은 다시 어진 제작에 힘을 썼다. 광해군은 태조 어진의 모사와 봉안에 힘을 기울였고, 숙종은 한동안 중단되었던 어진 제작의 전통을 되살렸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제작된 어진들은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어진을 그리는 방법은 국왕이 생존해 있을 때, 화가가 왕을 직접 보고 그리는 도사(圖寫), 왕이 돌아가신 후에 왕의 어진이 없을 때, 선왕의 모습을 기억에 의존해서 그리는 추사(追寫), 기존의 어진을 본떠 그리는 모사(模寫)로 구분된다.

【참고문헌】

어진에 옷을 입히다(박성실 외, 민속원, 2016)

어진의궤와 미술사(이성미, 소와당, 2012)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국립고궁박물관, 2015)

조선왕조실록(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