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서 해법 찾는다

핵확산 부추긴 ‘비핵화’ 정책
애초부터 잘못 설계된 비핵개방 3000 정책

[트루스토리] 송유찬 기자 =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대표하는 정책은 ‘비핵개방 3000’이었다. 그러나 ‘비핵개방 3000’은 결과적으로 사실상 추진조차 되지 못하고 5년 임기가 완료되게 되었다. 애초부터 잘못 설계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비핵개방 3000은 한반도 핵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했다. 비핵개방 3000의 출발은 북한의 비핵화이다. 그러나 비핵화를 어떠한 접근법도 제시되지 않았다. 이는 북한의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비핵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한 측에서의 동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내, 그리고 국제사회에서도 동의를 구하기 힘들었다. 비근한 예로 비핵개방 3000의 연장선에서 나온 ‘그랜드바겐’ 구상에 대해 미 국무부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조차 “솔직히 내용을 잘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무시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둘째 ‘북한의 선 비핵화’를 주창했던 부시 행정부조차도 2기에서는 북미 대화에 돌입했다는 점에서 비핵개방 3000은 현실성이 없는 정책이었다. 북한의 핵포기는 북미 협상과 6자회담을 통해 이루어지는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런 복잡한 과정에 대한 계획 없이 ‘북한이 비핵화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접근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 북한의 비핵화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어떤 구체적인 접근법도 비핵개방 3000에는 담기지 않았다.

사실상 이명박 정부는 ‘비핵화’를 명분삼아 북미 대화에 딴지 걸기로 일관했다. 이명박 정부의 북미대화 딴지걸기는 크게 네 차례 진행되었다.

○ 첫 번째 딴지 걸기 = 2009년 8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 이후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모색한다. 보즈워스 한반도 특별대표의 방북 계획이 9월에 논의되었다. 이때 이명박 정부는 노골적으로 북미 비핵화 회담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9월15일 이명박 대통령은 연합뉴스·일본 교도(共同)통신과 공동 인터뷰에서 “6자회담 회원국들이 합심해서 같은 전략으로 북한 핵을 포기시키려는 노력을 더 가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진정성이나 징조를 보이지 않고 있다”까지 언급했다.

북미 대화에 대한 노골적인 견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북한이 아직도 경제 협력을 받으면서 핵문제는 그냥 시간을 끌어서 기정사실화시키려는 목표가 있다고 보인다”며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의 협상 전략에 끌려 다니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그랜드바겐 구상에 대한 한미 엇박자도 이 과정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나서 “미국의 아무개가 모르겠다고 하면 어떤가.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서 딴지 걸기 기조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과 애초 9월에 보즈워스를 평양에 보내고자 했던 오바마 행정부는 그 계획을 보류해야만 했다.

그러나 10월 북한 외무성의 리근 미국국장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성김과 비공식 회동을 하는 등 북미 양자회담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 갔다. 마침내 보즈워스는 그 해 12월 평양을 방문하여 오바마 정부 등장 이후 첫 번째 북미 양자회담을 가지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딴지 걸기로 3개월의 시간을 허비한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 두 번째 딴지 걸기 = 보즈워스 방북 이후 6자회담 재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2010년 2월에는 중국을 매개로 하여 북미 양국의 간접 대화가 베이징에서 진행되었고, 그 결과 ‘2차 북미대화-6자예비회담-6자본회담’이라는 3단계 해법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이명박 정부의 2차 딴지 걸기가 시작되었다. 2월22일 김태효 청와대 외교전략비서관은 “평화협정 논의 주체는 남북 지도자이며,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서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며 6자회담 재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2월25일 통일부는 “북한이 핵포기 결심을 해야 남북 경협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의 ‘남북관계발전 기본계획’ 변경안을 공개했다. 기존의 ‘한반도 비핵화’란 표현은 ‘북한 비핵화’로 대체했다. 3월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 정부의 딴지 걸기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4월2일 방한한 캠벨 차관보에게 북미 접촉을 미뤄달라고 요청하고, 4월 중순에는 김태효 비서관이 미국을 방문하여 다시 한번 요청했다. 그 이후 미국 정부에서 ‘선 천안함 후 6자회담 발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 크롤리 공보담당 차관보는 “반드시 천안함 사고가 종결되어야 6자회담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안함 합동조사단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조사 결론을 내린 5월 20일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천안함 침몰은 대한민국을 공격한 북한의 군사도발”이라며 “(북한이) 앞으로 우리의 영해.영공.영토를 무력 침범한다면 즉각 자위권을 발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심야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의 추가 공격을 차단하고 대북 대비 태세를 확립하기 위해 한국 당국과 긴밀하게 협력하라고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2010년 상반기 내 추진하려던 6자회담은 좌초되기에 이르렀다.

○ 세 번째 딴지 걸기 = 북미 양국은 천안함 출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 첫 테이프는 북한에서 먼저 끊었다. 천안함 사건이 유엔안보리에서 논의되고 있던 5월 북한은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의 방북을 요청했다. 7월 천안함 사건 관련 유엔 의장성명이 채택된 후 미국은 북한의 요청을 받아들여 리처드슨 방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태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고위 인사들의 방북은 시기 등을 포함해서 신중하게 검토돼야 한다”는 외교통상부 논평을 내면서 리처드슨 방북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북한이 먼저 국제사회에 보다 책임있는 태도와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까지 덧붙였다. 천안함을 모든 사태 진전의 전제로 삼고, 6자회담도, 남북관계도, 북미양자대화도 천안함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노골적인 반대 표명에 미국은 리처드슨 방북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11월26일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미국은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리처드슨 방북을 추진했으며 12월 중순 리처드슨은 방북하여 북한과 핵관련 해 ‘IAEA 사찰단의 복귀, 사용 후 연료봉의 해외 판매, 서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공동위의 개최’를 북측과 합의했다.

○ 네 번째 딴지 걸기 = 앞서 언급했듯이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미중 양국이 대한반도 협조를 강화했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다음날 북측은 남측에 고위급 군사회담을 제의했다.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명의로 김관진 국방장관 앞으로 보낸 전통문이어서 사실상 남북국방장관 회담을 제의한 것이다.

북측은 전통문에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조선반도의 긴장해소를 할 데 대하여 회담을 열자”고 함으로서 남측이 의제로 주장했던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을 받아들일 것임을 시사했다. 남측 역시 이를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통일부 대변인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책임있는 조치 및 추가 도발 방지에 대한 확약을 의제로 하는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에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2월 초 열린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고위급 군사회담 의제에 대한 합의도출로 고위급 군사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북측은 첫날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해소할 데 대하여'를 회담 의제로 제안했고, 남측은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와 재발 방지 확약'을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맞선 결과였다. 상황이 개선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우려스러운 사태가 발생했다.

북측 김영춘 무력부장은 남측에 고위급 군사회담 제의와는 별도로 1월 하순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에게 북미 직접대화를 제의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이 한국 언론에 의해 공개되었다. 2월 19일자 중앙일보가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것이다. 한미 공조 차원에서 미국이 북측의 회담 제의 사실을 한국 정부 측에 제공했는데, 비밀에 부쳐야 할 이 같은 사실은 ‘정부 관계자’가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현인택 통일부장관은 한 술 더 떠 2월 22일 북한이 미국 측에 대화를 제의하면서 보낸 서신에서 “이대로 놔두면 한반도에 핵참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북측의 경고가 있었다고 공개했다.

현인택 장관의 ‘핵 참화 언급’ 공개에 미국 정부가 ‘비밀누설’이라며 외교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항의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보즈워스는 3월 1일 미국의 대북정책 목표가 “정부교체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북미 대화를 재개 의사를 피력했다. 북 외무성 역시 3월15일 “조선 측은 전제조건 없이 6자회담에 나갈 수 있고, 6자회담에서 우라늄농축문제가 논의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피력함으로써 화답했다.

4월7일 미국의 캠벨 차관보와 북측의 김계관 부상이 같은 날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 측은 ‘남북 수석대표 회담 - 북미 수석대표 회담 - 6자 수석대표 회담’이라는 단계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6자회담 재개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4월 26일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북미 대화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같은 이명박 정부의 오락가락 대북 정책은 북미대화와 6자회담 재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고, 남북정상회담을 비밀 접촉 과정에서 쌓인 불신의 결과 북측은 5월30일 국방위원회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이명박 정부와는 더 이상 상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로써 ‘남북 수석대표 회담 - 북미 수석대표 회담 - 6자 수석대표 회담’이라는 3단계 6자회담 재개프로세스도 좌초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북미 양국의 대화 재개 노력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2012년 2.29 합의가 탄생하기도 했다. 북측의 인공위성 발사와 미국의 반발로 2.29 협의 역시 지켜지지 못하고 이명박 정부의 임기는 완료 직전까지 왔다. 이명박 정부의 오락가락 대북행보로 2011년 북미 대화가 지장을 받지만 않았어도 2.29 합의가 더 일찍 채택될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가능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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