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해정 기고가
노해정 기고가

“시간과 공간 속에 내던져진 의미

[뉴스퀘스트=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채 이 세상에 생겨났다. 우리가 세상에 생기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우선 엄마의 뱃속에 내던져졌다. 또한, 약 10개월여 기간의 기다림을 끝으로 출산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내던져졌다. 하지만 비단 세상에만 내던져진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 내던져졌다는 것은 곧 시간과 공간 속에 내던져진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간적 시간적 존재이기도 하다.

필자는 어린 시절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참으로 인상 깊게 읽은 바 있다. “모모”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도로 청소부 ‘배포’가 ‘모모’에게 말한다.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러고는 한참 동안 묵묵히 앞만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러고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일을 하는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거야." 그러고는 다시 한번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게 중요한 거야"

”모모“에서 도로 청소부 배포는 주인공 ‘모모’를 정신병원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회색 신사들에게 10만 시간을 저축하기로 한다. ‘배포’에게 시간의 개념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배포가 시간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상하게 매일 매일 깔끔하게 청소해왔던 도로 청소를 다 끝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시간은 곧 기다림이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쏜살같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쏜살이라는 말은 시위를 당겨서 화살을 쏘면 그 화살은 다시 시위를 당기기 이전의 시점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비유적으로 생겨난 말이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어떤 때에는 천천히 흐르고, 또 어떤 때에는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이를 주관적 시간이라고 한다.

식물의 종자는 기본적으로 약 5년에서 수백 년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밀폐된 환경을 만난다면 수천 년이 지나도 발아가 가능하다. 종자는 자연 그 자체를 자신의 보관처로 활용하면서 마치 도로 청소부 ‘배포’가 시간을 인식하기 이전에 그저 즐겁게 도로를 쓸면서 청소하는 것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여기에는 어떠한 특별한 목적이 있을 수 없다. 단지, 발아해서 꽃을 피우고 다시 종자를 남기고자 하는 자연의 본성만이 훈습 되어 있을 뿐이다. 종자가 발아하기까지는, 또한 꽃을 피우기까지에는 수많은 우연과 확률에 의한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종자가 생기기까지 우주의 탄생, 까닭 모를 사건들이 연속되어 있어야만 한다. 종자가 생겨난 이후에도 역시 우연한 인연들이 연속되지 않는다면 다시 종자를 맺기 위하여 꽃을 피울 수 없다. 종자가 날아올라서 운이 좋게도 싹틀만한 환경조건의 땅에 도달하여야 하며, 땅에서 식물이 자라나기까지 서로의 기운을 기억하고 맞춰가야 한다.

종자는 영문도 모른 채 세상에 던져졌고,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받아줄 땅과 환경을 그저 마냥 기다린다. 언제 꽃을 피우게 될지 종자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본분에 충실할 뿐이다. 존재하고 일어나고 나타나는 모든 것에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일어나고 나타나는 연관 관계 사이에서 존재함이 준거한다는 것이다.

종자의 싹틈을 위하여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찬란한 햇살과 비바람, 그리고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세상은 결국 ‘나’라고 하는 자신과 이어져 있다. 종자의 싹이 터서 꽃이 피면 꽃이 피는 대로, 종자가 기다리면 기다리는 채로 ‘우리’와 이어진다.

우리는 새로운 목적성과 의미를 담고 싶고, 또 다른 존재의 이유를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기다렸다고 해서 꽃을 피울 권리를 세상에 요구할 수 있을까? 오롯이 세상은 내가 보는 만큼 나에게 열리고, 내가 느끼는 만큼 내게로 들어온다. ‘종자’와 ‘나’ 그리고 작품 속에서 만난 ‘모모’와 ‘배포’는 그저 당신의 마음을 통해서 느껴지며 세상과의 물리적인 그물망 속에서 함께 존재한다. 결국, 나의 마음과 세상의 경계는 다르지 않다. 따라서 생겨남과 죽음에 대한 경계 또한 없다. 우리가 영문도 모른 채 세상에 던져진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바람과 인연,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 세상과의 전체를 느끼면서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것일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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