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검무 공연장면
평양검무 공연장면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국악에서 민요로 분류되는 노래 중에 작사가와 작곡자가 알려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조나 가곡의 경우, 시조시(時調詩)를 노랫말로 하고 있기에 작사가가 알려져 있는 경우는 상당히 많지만, 일반 민요의 경우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구전되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작곡자는 거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서도 시창(詩唱)으로 분류되는 <관산융마>의 경우 예외적으로 신광수 작사, 평양 기생 모란 작곡으로 추정된다.

<관산융마>는 조선 영조 때의 문인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1713-1775)가 과거 때 시험 답안으로 제출한 시이다. 모두 44구의 칠언(七言)으로 상당히 긴 시이다. 원제목은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악양루에 올라 관산의 전쟁을 탄식함)>이었고 1746년(영조 22년) 가을에 시행된 한성시(漢城試)에서 2등에 오른 작품이다. 이 시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杜甫)가 만년에 천하를 유랑하다가 악주(岳州)의 악양루에 올라 안녹산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세상을 한탄하며 지은 오언율시인 <등악양루(登岳陽樓)>와 시인 두보의 유랑을 소재로 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이 시의 원문과 해석을 소개한다.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

추강(秋江)이 적막어룡냉(寂寞魚龍冷)허니 인재서풍중선루(人在西風仲宣樓)를

매화만국청모적(梅花萬國聽募笛)이요 도죽잔년수백구(桃竹殘年隨白鷗)를

오만낙조의함한(烏蠻落照倚檻恨)은 직북병진하일휴(直北兵塵何日休)오

춘화고국천루후(春花故國濺淚後)에 하처강산(何處江山)이 비아수(非我愁)오

신포세류곡강안(新蒲細柳曲江岸)이요 옥로청풍기자주(玉露淸風虁子洲)를

청포(靑袍)로 일상만리선(一上萬里船)하니 동정여천파시추(洞庭如天波始秋)라

무변초색칠백리(無邊楚色七百里)에 자고고루(自古高樓)가 호상부(湖上浮)를

추성사의낙목천(秋聲徙倚落木天)이요 안력초궁청초주(眼力初窮靑草洲)를

풍연(風烟)이 비불만안래(非不滿眼來)로되 불행동남표박류(不幸東南漂泊類)를

중원기처전다고(中原幾處戰多鼓)러냐 신보선위천하우(臣甫先爲天下憂)를

청산백수과부곡(靑山白水寡婦哭)이요 목숙포도호마추(苜蓿葡萄胡馬啾)를

개원화조쇄수령(開元花鳥鏁繡嶺)하니 읍청강남홍두구(泣聽江南紅荳謳)를

서원오죽구습유(西垣梧竹舊拾遺)는 초호상침여백두(楚戶霜砧餘白頭)를

소소고도범백만(蕭蕭孤棹泛百蠻)하니 모년생애삼협주(暮年生涯三峽舟)를

풍진자매누욕고(風塵姉妹淚欲枯)요 호해친붕서불투(胡海親朋書不投)를

여평천지차루고(如萍天地此樓高)하니 난대등림비초수(亂代登臨悲楚囚)를

서경만사혁기장(西京萬事奕棊場)에 북망황옥평안부(北望黃屋平安否)아

파릉춘주불성취(巴陵春酒不成醉)하니 금랑무심풍물수(錦囊無心風物收)를

조종강한(朝宗江漢)이 차하지(此下地)러냐 등한소상루하류(等閑瀟湘樓下流)를

교룡재수호재산(蛟龍在水虎在山)하니 청쇄조반년기주(靑瑣朝班年幾周)를

군산원기망창변(君山元氣莽蒼邊)이요 일렴사양불만구(一簾斜陽不滿鉤)를

삼성초원환수생(三聲楚猿喚愁生)하니 안천경화의두우( 眼穿京華倚斗牛)라

가을 바람이 적막하니 물고기도 찬데

쓸쓸한 가을 바람에 한 나그네 중선루에 오르는구나

황혼에 옛소리 담은 피리 소리 들려오고

지팡이 짚은 늙은 나그네 갈매기 따라 흐르네

서쪽으로 지는 해 바라보며 난간에 기대어 생각하네

북녘 땅 전쟁은 언제나 그칠런고

고향 봄꽃에 눈물 뿌리고 떠난 뒤에

어느 곳 강산이 근심 아니었나

곡강(曲江)에는 가는 버들 강가에 늘어졌고

기주(虁洲)에서는 이슬비에 시원한 바람도 맞았느니

이제 청포(靑袍) 입고 만리선(萬里船)에 올라

동정호에 이르니 물빛 하늘과 같아 물결이 가을을 알리는구나

끝없는 초나라 풍경이 칠백리나 흐르고

높은 누각은 호수 위에 둥실 떠있네

가을 바람 소리에 떨어지는 낙엽

저 멀리 강가의 기슭은 아득하기만 하네

지난 날,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가득 다가와

슬퍼라 동남으로 떠돌기만 한 것을

중원에는 여기저리 전란의 북소리 요란하니

시인 두보 먼저 천하의 근심을 읊노라

청산백수(靑山白水)에는 과부가 슬피 울고

말먹이는 풀 우거진 곳에는 호마가 우는구나

좋은 시절에는 궁중에 꽃향기 새소리 가득했거늘

이제는 슬픈 강남노래를 듣는구나

서울에서 벼슬하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제는 초나라 땅에서 백발이 되어 슬픈 다듬이 소릴 듣네

소소히 외로운 돛배 남쪽으로 떠가노니

늙은 인생은 험한 물길 속의 쪽배로다

세파에 시달린 인생 눈물 마르려 하나

넓은 세상에 흩어져 소식 한 자 못 전하네

하늘에 뜬 구름 같은 높은 누각에

난세에 올라 인생을 슬퍼하노라

옛 서울 모든 일들이 어지럽기만 한데

북쪽 바라보며 임금의 평안하심을 궁금해 하노라

강남 좋은 술로도 취하지 못하니

좋은 시 한 편 취할 마음이 없구나

강남 땅이 어떤 땅이길래

다락 아래 강물만 유유히 흐르는가

용은 물에 있고 범은 산에 있는데

궁중에서 임 본 날은 몇 해나 지났는고

동정호안 섬에는 이내가 가득한데

지는 해는 뉘엿뉘엿하여라

세 마디 잔나비 우는 소리 슬피도 들리누나

눈은 북쪽 하늘 별빛 넘어 서울만 뚫어지게 바라보누나

이 시는 한성시라는 과거에서 2등을 한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신광수가 이 시를 통해 관직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당시 신광수가 응시한 한성시란 요즘 말로 하면 서울에서 주최한 예비시험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에서 2등을 했다는 것은 경력을 하나 쌓았다는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신광수는 1712년(숙종 38년) 서울 가회방(嘉會坊) 재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헌법재판소 부근이다. 원래 본가(本家)의 고향은 충남 서천이었다. 35세 때인 1746년(영조 22년) 한성시에 2등으로 합격했다. 이후 39세 때 진사가 되며, 거듭 과거 본과에 응시했지만 급제하지 못했다. 타고난 시인으로 과거 공부보다는 시작(詩作)을 즐기고 당대의 풍류랑들과 교류하기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생활이 어려웠지만 생계를 돌보지 않고 떠돌아다니기를 즐겼다. 45세가 되던 해에는 부인 윤씨가 사망하여 부인의 상을 치른다. 윤씨 부인의 아버지는 귀가 없는 자화상 초상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윤두서(尹斗緖: 1668-1715)다. 즉 신광수는 윤두서의 사위였던 것이다.

석북은 아내를 잃고 방황하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49세가 되던 1760년, 평양을 비롯한 서북지역을 11개월 정도 여행을 하고 이듬해 정월 서울로 돌아온다. 이 여행에서 석북은 서북 지방의 기생과 놀기도 하고 평양 검무를 구경하기도 한다. 평양 기생 중에서 소리로 유명했던 모란과 석북의 운명적인 만남도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석북이 <관산융마>를 지은 지 15년의 시간이 흘렀던 시점이었다. 모란은 석북을 만난 자리에서 <관산융마>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석북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석북은 모란에게 깊이 빠져들었다.(2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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