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벌이 세운 거연현 자리에 그 손자인 권래가 세운 정자 한수정. [사진=(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권벌이 세운 거연현 자리에 그 손자인 권래가 세운 정자 한수정. [사진=봉화군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78년(성종 9년) 11월 6일, 권벌은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도촌에서 아버지 권사빈과 어머니 파평 윤씨의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훤정(萱亭), 송정(松亭)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열아홉 살에 과거에 합격한 수재

권벌 집안이 도촌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권사빈 때부터였다. 권사빈의 외가인 서원 정씨들이 도촌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권벌의 어머니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형인 윤당의 딸 파평 윤씨였다. 윤호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아버지였으므로 권벌의 어머니와 정현왕후는 사촌자매 사이였다.

권벌은 안동 권씨 판서공파에 속했다. 판서공파의 시조는 권벌의 5대조 권인이다. 판서공파는 권인 때부터 중앙권력이 바뀔 때마다 권력을 좇기보다는 의리를 좇아서 은거하는 전통이 있었다. 권인은 고려가 망하자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은거했다. 태조와 이방원(훗날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주면서 권인을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그는 호를 ‘송파(松坡)’라고 지었는데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를 잊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권인은 나중에 자신이 살던 마을 이름도 송파로 고쳤다. 권인의 증손이자 권벌의 할아버지인 권곤은 현감을 지내고 선략장군에 올랐는데,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두문불출했다.

도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권벌은 열 살 때인 1487년(성종 18년) 숙부 권사수를 따라서 봉화로 이주했다. 자식이 없던 숙부가 권벌을 데리고 간 것이었다. 안동에서 봉화로 가는 길에 숙부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가리키며 권벌에게 시를 지어보라고 했다. 그러자 권벌은 ‘사람은 북쪽으로 가는데 기러기는 남쪽으로 가는구나(人北去雁南飛)’라고 대구를 맞추는 시를 지어서 숙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권벌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행장(行狀: 고인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 쓴 퇴계 이황은 “문장의 뜻을 일찍부터 알아서 문장을 짓거나 대구를 맞추어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했다. 조금 자라서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적어놓았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권벌의 학문적 스승이 누구였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집안 어른들을 통해서 가학을 전수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권벌은 스무 살도 되기 전인 1496년(연산군 2년)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이후 계속 학문에 매진하여 스물일곱 살이 되던 1504년(연산군 10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취소되고 말았다. 권벌이 제출한 과거시험 답안지에 ‘처(處)’자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산군 시절, 여러 대에 걸쳐서 임금을 모신 김처선(金處善)이라는 환관이 있었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 방탕한 행실을 하자 김처선은 충언을 했다. 그러자 연산군은 그의 다리와 혀를 자른 다음 죽이고 앞으로는 그 누구도 ‘처(處)’와 ‘선(善)’이라는 글자를 쓰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던 것이다.

1499년, 권벌은 직장(直長, 종7품) 최세연의 딸 화순 최씨와 결혼했다. 최씨 부인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의 외5세손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를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무리에 맞서서 고려왕조를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스러졌다. 새 왕조가 들어서자 반역자로 낙인찍혔던 정몽주는, 그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태종이 영의정 벼슬과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림 으로써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주자학을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했던 뛰어난 학자였다. 정몽주는 고려 말의 혼란스러운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중국에서 들여온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바탕으로 사회윤리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했다. 조선왕조를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태종은 정몽주의 사상이 이에 부합하자 그를 재평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는 여전히 반역과 충절이라는 이중적 이미지 로 평가되고 있었다. 권벌은 정몽주의 이중적 이미지를 극복해서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1518년(중종 13년), 권벌은 중종 앞에 나아가 정몽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요즘 예조에서 정몽주의 제문 짓기를 청했는데 이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당시 형세가 정몽주와 양립할 수 없으므로 태조께서 정몽주를 제거했습니다. 이것만으로 보면 정몽주는 우리나라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칭찬하고 장려하고 존중해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크게 밝아집니다.”

비록 조선에는 원수였으나 충절을 지킨 정몽주의 정신을 장려해야 나라의 규범이 선다는 권벌의 의견에 중종도 동의했다. 그리하여 정몽주는 전국의 문묘(文廟)에 모셔지게 되었다. 100여 년의 세월 흐른 뒤에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했던 정몽주와 권벌은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한편,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과거 합격이 취소되었지만 권벌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다시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여 서른 살이 되던 1507년(중종 2 년) 별시 문과에 병과 2등으로 합격했다. 승문원(承文院: 외교문서를 담당하 는 관청)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문서의 교정을 담당하는 벼슬)로 벼슬을 시작한 권벌은 이듬해 예문관(藝文館: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 작성하는 기관) 검열로 옮겼다.

그 뒤 승정원(承政院: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 주서를 거쳐서 1509년 (중종 4년)에는 연산군 대의 실록인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다. 이후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부교리, 사간원 정언 등을 거쳐 1513년(중종 8년)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1514년(중종 9년)에는 이조정 랑, 호조정랑, 영천군수를 지냈으며, 이후 장령을 거쳐 승정원 부승지, 좌승지, 도승지, 예문관 직제학을 역임하는 등 언관(言官)과 낭관(郎官)의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권벌은 관직에 있으면서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매우 엄격하게 따졌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의 일을 다시 따져서 이극돈의 죄를 추가하고 김종직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청했다. 또한 신윤무와 박영문이 역모를 꾀한다는 것을 알고도 제때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원하는 등 강직함을 떨쳤다.

닭실마을 추원재 내부 전경. [사진=(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닭실마을 추원재 내부 전경. [사진=봉화군청]

유교적 정치제도를 확립한 기묘사화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이 강력한 개혁을 주장하자 예조참판으로 있던 권벌은 사림파와 훈구파를 중재하면서 정국의 안정을 이루려고 애를 썼다. 그러던 중 연로한 아버지가 병환에 들자 권벌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서 외직을 청했다. 강원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그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권벌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몸이 되었다.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거치면서 삼사(三司: 조선시 대 언론을 담당했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가리키는 말)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중종과 일부 대신이 삼사의 주요 인물을 숙청한 사건이 기묘사화이다.

삼사를 장악한 조광조와 기묘사림(기묘사화 때 희생된 사림세력)은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중종은 조광조를 각별하게 아꼈다. 등용된 지 2년 반 만에 당상관에 오른 조광조는 짧게는 사흘 만에, 평균 서너 달 만에 요직으로 옮길 정도로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중종실록(中宗實錄)』은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조광조가 말하자 중종은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들었다. 서로 진정으로 간절하게 논설해서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환관이 촛불을 들고 가자 그제야 그만두었다.(『중종실록』, 1519년 7월 21일).”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넉 달 전까지만 해도 중종과 조광조는 이처럼 친밀한 사이였다. 그랬던 조광조와 기묘사림이 숙청을 당한 것은 당파성과 급진성 때문이었다. 조광조와 기묘사림은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를 감안해야 하는 현실정치 속에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원칙과 이상에 입각하여 엄격하게 비판하고 간쟁했다.

조광조와 기묘사림이 추진했던 개혁과제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누적된 것으로 그 규모와 중대성이 엄중했다.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들은 젊고 관직 경험이 많지 않았다. 때문에 국정을 운영하는 대신들과 친밀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젊고 열의에 찬 관원들이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민감한 문제들을 경륜 있는 대신들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한 채 임금의 전폭적인 지원에만 의존해서 단시간에 해결하려던 상황은 결국 그들을 실각에 이르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기묘사림의 핵심적 개혁과제였던 현량과(賢良科) 실시와 정국공신 삭훈(削勳: 공적을 깎음)이었다. 현량과는 시문(詩文)을 중요시하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극복한다는 취지 아래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선발하는 제도였다. 1519년 4월 13일에 시행 된 현량과를 통해 28명이 선발되었다. 문제는 합격자가 모두 기묘사림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선발된 인물들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기묘사림의 공정성과 도덕성에 타격을 주었다. 조선 최초의 천거과로 선발된 인재들이 모두 자파 소속이라는 사실은 기묘사림을 매우 당파적 집단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현량과가 자파 세력을 보강하는 조처였다면, 정국공신 삭훈은 기존 세력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1519년 10월 25일, 대사헌 조광조와 대사간 이성동을 중심으로 한 삼사는 중종반정 때의 공신들을 다시 심사해서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한 인물들은 삭훈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중종과 여러 대신은 삭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삼사는 3고 (三敲: 23시~1시)까지 반복해서 논의했다. 조광조는 귀양을 가거나 죽음의 형벌도 달게 받을 테니 조속히 윤허해달라고 주청했다. 결국 보름 만인 11월 11일, 기묘사림은 중종의 윤허를 얻어냄으로써 중종반정을 일으킨 공신 117명 중 76명의 삭훈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나흘 뒤 전격적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남으로써 이는 기묘사림의 승리가 아니라 결정적인 패착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기묘사화는 1519년 11월 15일 밤 2고(20시~22시)에 전격적으로 일어났다. 정국공신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은 현량과에 의해 기묘사림이 대거 진출하고, 삭훈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불안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대신들의 이러한 동향은 반란으로 연결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신들의 반정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된 중종에게 이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국정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불안과 분노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중종은 사화를 일으킨 것이었다.

중종은 밀지를 내려서 홍경주, 남곤, 심정, 정광필 등 주요 대신들을 은밀하게 소집했다. 그리고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박세희, 박훈, 기준 등 기묘사림의 주요 인물들을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기묘사림의 죄목은 당파를 만들어서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천거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척했으며, 서로 연합하여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11월 16일, 기묘사림은 유배되었으며 11월 21일, 삭훈된 공신들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일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묘사림에 대한 처벌은 한 달 만인 12월 16일에 확정되었다. 조광조는 사사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외딴 섬이나 변방에 안치되었다. 12월 17일, 조광조에 동정적이던 정광필과 김전은 영중추부사와 판중추부사로 좌천되었고 남곤과 이유청이 좌의정과 우의정에 발탁됨으로써 사화는 일단락되었다.

기묘사화는 과도하게 커진 삼사의 기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삼사의 기능이 그만큼 확고하다는 걸 확인시켜준 사화였다. 기묘사화 이후 삼사는 권세를 쥔 개인이나 당파에 좌우되면서 정쟁을 격화시키는 부작용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이어지는 동안 국정의 필수관청으로서 기능을 다했다. 기묘사화를 거치면서 임금과 대신과 삼사가 서로 협의와 견제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유교적 정치제도가 확립된 것이었다. 1538년(중종 33년), 유생들의 상소를 계기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대부분의 기묘사림은 사면되고 복권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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