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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③] 경북-명분과 의리를 중요시했던 충신 권벌 (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③] 경북-명분과 의리를 중요시했던 충신 권벌 (3)
  • 디지털뉴스팀
  • 승인 2019.04.22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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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벌에게 답지한 임금의 교서와 권벌의 종손가에 소장 되어온 고문서. [사진=봉화군청]
권벌에게 답지한 임금의 교서와 권벌의 종손가에 소장 되어온 고문서. [사진=봉화군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휩쓸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지내던 권별은 1533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되어 14년 만에 조정으로 복귀했다. 이후 밀양부사, 한성부좌윤, 경상도관찰사, 형조 참판, 병조참판,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다. 1539년 7월에는 종계변무(宗系 辨誣: 조선 건국 때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 동안 명나라에 잘못 기록되어 있는 이성계의 가계를 고쳐달라고 사신을 보내 주청하던 일)를 위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했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율곡 이이, 권벌의 절개를 칭찬하다

1540년에는 병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1541년에는 예조판서, 의정부좌참찬, 1542년에는 장령을 거쳐 1544년에 다시 의정부좌참찬, 1545 년에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그해 7월 명종이 열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권벌은 어린 임금을 보필하는 원상으로 임명되었다. 1545년 8월, 소윤 일파가 대윤 일파를 탄핵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모든 대신들이 침묵하거나 소윤의 편에 섰다. 이때 권벌만이 홀로 이에 반대하면서 ‘명분과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하늘이 노한다’는 내용의 계사를 올렸다.

그러나 소윤 일파의 기세는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선비의 의리나 명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대윤 일파는 대부분 숙청되었으며 그해 10월, 권벌도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1547년(명종 2년) 9월,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 “여주(女主: 당시 문종을 수렴청정하던 문정대비를 칭함)가 위에서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밑에서 농권(弄權)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서서 기다릴 수 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8월 그믐”이라고 쓴 글이 나붙는 사건이 일어났다.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라고도 부르는 이 일로 말미암아 소윤 일파에게 눈에 가시와도 같던 사림세력 20여 명이 귀양을 갔다. 이때 권벌도 전라도 구례(求禮)로 유배를 갔다가 평안도 태천(泰川)으로 이배되었으며 다시 평안도 삭주(朔州)로 옮겨졌다.

을사사화 때 권벌이 쓴 계사에서 위험한 대목을 지우며 보호해주었던 친구 이언적도 이때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가는 몸이 되었다. 귀양을 떠나는 길에 두 사람은 비슷한 시각에 벽제역에 도착했으나 서로 만나지는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우정과 인물됨에 대하여 조선 중기의 대학자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임금에게 경서와 역사를 강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기록이 『경연일기(經筵日記)』에 남아 있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먼저 그 사람의 큰 절도를 판단하고 나서 그 다음에 세세한 행위를 논하는 게 좋다. 권벌과 이언적 두 분은 평소 행실을 반듯하게 하는 데는 권벌이 이언적을 따르지 못했으나, 재앙을 당했을 때 꿋꿋한 절개를 지키는 데는 이언적이 권벌에게 양보를 해야 할 것이다.”

1565년, 소윤 일파가 몰락하고 선조가 즉위한 이후 사림세력이 다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자 양재역벽서사건은 무고로 공인되는 한편, 이에 연루 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이 이루어졌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했던 권벌은 개혁에도 적극적인 성리학자였다. 처음 관직에 나갔을 때부터 삼척부사로 부임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개혁정치를 지지하고 동참했다. 경연관으로 있을 때는 임금에게 직언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금이 덕을 쌓고 외환에 대비하고 인재등용 등 왕도 정치를 실현할 것을 꾸준하게 건의했다.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생모였던 현덕왕후 권씨의 능인 소릉을 복위해야 하며, 정몽주를 칭찬하고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 직언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1512년(중종 7년) 11월, 권벌은 단종 복위운동에 현덕왕후의 동생인 권자신이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소릉의 지위를 박탈한 것은 잘못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현덕왕후는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나기 16년 전, 단종이 태어날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논리를 폈다. 권벌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져서 1513년(중종 8년) 3월, 소릉의 지위는 회복되었다.

이처럼 의리와 명분에 대한 권벌의 강한 신념과 실천은 폭넓은 독서를 통해 형성되었다. 권벌은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해서 늘 책을 가까이 했다. 퇴계 이황은 「충재행장」에 책을 대하는 권벌의 자세를 이렇게 적어놓았다.

“평소 글 읽기를 좋아해서 숙직하는 자리에서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성현의 언행이 절실하고 요긴한 대목을 만나면 반드시 아들과 조카를 불러서 반복해서 가르쳤다. 늘 ‘학문은 자기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과거시험은 부수적인 일이다’라고 말했다.”

권벌은 유교 경전인 『소학』, 『대학』, 『논어』는 물론이고 중국 송나라 때 현인들 말씀 중에서 귀감이 될 내용을 모은 『자경편(自警篇)』과 유학의 생활 및 학문지침서인 『근사록(近思錄)』을 특히 좋아했다. 숙직이나 공무 중에도 작게 만든 책을 도포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을 정도 였다.

1540년(중종 35년) 4월, 중종이 대신들을 경회루로 불러서 연회를 베푼 적이 있었다. 연회가 끝날 무렵 권벌은 술에 취해 부축을 받고 나갔다. 뒷 정리를 하던 내관이 작은 『근사록』을 주워들고 왔다. 이를 본 중종이 “권벌이 떨어뜨린 것이다. 나중에 돌려주거라”라고 했다. 임금도 알고 있을 정도로 권벌은 책을 좋아했던 것이다. 훗날 이 일화를 전해들은 영조는 1746년(영조 22년) 정랑으로 근무하던 권벌의 6대손 권만에게 『근사록』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친히 살펴본 뒤에 새롭게 간행한 『근사록』 한 질을 하사했다.

북송시대의 유학자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저작 중에서 ‘학문의 요점과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내용’을 발췌해서 편찬한『근사록』은 『소학』과 더불어 조선의 선비들이 가장 애독했던 수신 지침서이다. ‘근사(近思)’는 ‘가깝고 쉬운 것부터 생각한다’는 뜻으로, ‘배움을 넓히고 뜻 을 독실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데서부터 생각해보면 그 안에 인 (仁)이 있다’는 『논어』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즉 유학의 기본 정신을 잘 이해한 다음, 그것을 머리로만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책이다.

권벌의 유적지 중 하나인 석천정사, 사당과 갱장각. [사진=봉화군청]
권벌의 유적지 중 하나인 석천정사, 사당과 갱장각. [사진=봉화군청]

닭실마을에 깃든 올곧은 선비 정신

1519년 11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권벌은 고향 안동 도촌으로 돌아와 있다가 이듬해 닭실마을로 들어갔다. 혼란의 시기에 세상을 떠나 은거하는 것은 안동 권씨 판서공파의 전통이기도 했다.

닭실마을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1리로, ‘닭실’은 ‘유곡(酉谷)’ 의 우리말이다. 닭실마을이 있는 봉화는 우리나라에서 오지에 속하는 지역이다. 구룡산(九龍山: 1,346m), 삼동산(三洞山: 1,178m), 선달산(先達山: 1,236m), 면산(綿山: 1,245m), 옥석산(玉石山: 1,242m) 등 1,000m가 넘는 높은 산들이 여럿 우뚝 서 있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첩첩으로 둘러싸고 있는 경상북도 최북단 산악지대이다.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이 현지답사를 해서 쓴 지리서 『택리지(擇里志)』 에는 ‘깊은 두메로 병란과 세상을 피해서 살만한 곳이다’라고 닭실마을을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6·25전쟁 때 닭실마을은 전란의 피해가 가장 적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지리학자는 한반도의 풍수를 연구한 『조선의 풍수』라는 책에서 닭실마을을 경주 양동마을, 풍산 하회마을, 임하 내앞마을과 함께 삼남(三南: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통칭)의 4대 길지로 선정했다.

1995년 안동 권씨 유곡종친회에서 펴낸 『유곡오백년문화』에 의하면, “마을 서쪽 깎아지른 산 위에서 바라보면 바로 ‘금계포란(金鷄抱卵: 알을 품 은 닭의 형상)’의 형국이어서 닭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동북으로 문수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줄기가 서남으로 뻗어 내려 백운령이 되어 암탉이 알을 품은 듯 간좌곤향(艮坐坤向: 북동쪽을 등지고 남서쪽을 바라봄)으로 자리잡고, 동남으로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 치는 듯한 모습이다.”

1520년에 닭실마을에 들어와 정착한 권벌은 1533년 다시 관직에 나아 갈 때까지 줄곧 이곳에 머물면서 학문에 매진했다. 권벌이 기거하던 충재 종가와 책을 읽다가 바람을 쏘이는 휴식공간으로 지은 청암정 등 닭실마을에는 권벌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1963년, 닭실마을은 마을 단위로는 최초로 국가문화재가 되었다. 닭실마을에 있는 권벌의 유적들은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었다.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를 간 권벌은 병이 나서 누워 있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유배된 지 1년 만인 1548년(명종 3년) 3월 26일,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면서 지내던 권벌은 일흔한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해 5월, 권벌의 유해는 닭실마을로 옮겨졌으며 11월에 장례가 치러졌다.

1568년(선조 1년) 2월, 의정부 좌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그해 6월 퇴계 이황이 행장을 지었다. 1571년(선조 4월) 9월에 이언적, 조광조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으며, 1590년(선조 23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권벌은 『충재일기』, 『한원일기』, 『당후일기』, 『승선일기』, 『춘양일기』 등 많은 일기를 남겼다. 『충재일기』는 1514년 9월 14일부터 1515년 10월 16일까지, 권벌이 영천군수로 있으면서 보고 행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겉장에 ‘마음을 다해 백성을 사랑한다’를 비롯해서 수령이 해야 할 도리를 적어놓았다. 당시의 생활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자료인 『충재일기』는 보물 제 261호 및 896-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원일기』는 예문관 검열로 근무할 때 작성한 것이고, 『당후일기』는 당후관(堂後官: 왕명 출납의 실무를 맡아보던 관직)으로 있을 때 작성한 사초이다. 『승선일기』는 승정원 승지로 활동하면서 1518년 5월 15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일을 기록한 사초이다. 『춘양일기』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었다가 밀양부사로 복직하여 1533년 5월 18일부터 1534년 3월 31일 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 일기들은 권벌이라는 꼿꼿한 선비가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자, 임진왜란 이전 시기 조선 지방관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기록물이다.

* 참고자료

『국조인물고』,『봉화 충재 권벌 종가』,「한국민족대백과」,「네이버캐스트」

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

권벌004-1, 2. 권벌에게 답지한 임금의 교서와 권벌의 종손가에 소장 되어온 고문서.

권벌005-1, 2. 권벌의 유적지 중 하나인 석천정사, 사당과 갱장각.

·사진 제공_ 봉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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