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의 섬 흑산도를 지나 홍도로

홍도분교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 [사진=김재준 시인]
홍도분교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 [사진=김재준 시인]

[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홍도로 가기 위해 몇 번을 벼르다 작정하고 밤 2시 30분에 일어났다. 3시경 출발해서 광주까지 달려 6시 20분 목포연안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한다. 비릿한 새벽 냄새가 항구 도시임을 실감나게 했다. 2층 매표소에서 신분증과 예약 표를 확인하는데 일행 한 사람이 당황해 한다. 걱정 말라고 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받아 해결하니 오늘은 편리한 통신기기 덕을 봤다. 터미널에 앉아서 김밥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7시 50분 출항이다. 나직한 파도 위로 물안개 피지만 9월의 막바지 바다 날씨는 좋은 편이다. 선창(船窓)으로 유달산이 언뜻언뜻 보이다 지워진다. 오른쪽 비금도를 지나고 외해로 나간다. 비금도·도초도를 차츰 벗어나면 파도가 출렁거리는데 오늘은 다행이다.

일행들은 배 안에서 부족한 잠을 자고 나는 배 뒤편에 서서 기댔다. 검은 들판에 하얀 레이스를 펼치듯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크고 작은 섬들은 모두 뒤로 물러선다. 망망대해. 뒤로 바라보니 오른쪽 바다 위로 햇살이 물 위에 내려앉아 눈이 부신다. 선창(船窓) 너머 잔잔한 바다.

물결은 0.5미터쯤, 물때가 좋다. 파도에 잔물결이 흩어지면 대략 파고1.5미터인데 뱃멀미를 하게 된다. 내해를 빠져 나가자 뒤로 달아나는 무인도, 드문드문 부표들이 떠 있다. 인생은 어차피 떠돌다 가는 부평초(浮萍草) 아닌가? 세상살이 물 위에 뜬 개구리밥처럼 보잘 것 없으니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구름같이 정처 없는 인생, 안개가 희미해져 다도해는 숨을 듯 말 듯. 드넓은 바다는 헤아릴 수 없으니 배에 의지한 나그네, 창해(滄海)의 일속(一粟)이라. 흘러가는 바다는 가슴 벅차다. 9시 45분쯤 둥그런 원 안에 들어왔다. 흑산도 항구에 “흑산도 아가씨” 노래가 바다로 흩어졌다.

바위섬과 어우러진 예덕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바위섬과 어우러진 예덕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배에서 내리자 갯내음이 코끝에 물씬 풍겼다.

흑산도까지 2시간 정도 걸렸다. 멀리서 바라보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黑山)이라 불렸다.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 16년 만에 일생을 마쳤다. 실학의 대가 동생 정약용도 강진으로 유배되고 자형 이승훈, 형 정약종을 잃었음에도 그는 슬픔을 딛고 유배지에서 학문에 열정을 쏟았다. 서당을 열어 실학을 알리며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지었다. 1814년(순조) 흑산도 물고기들의 생태를 손수 관찰한 자산어보는 실학기의 유명한 저서로 연안의 어류분포·습성·형태를 기록한 우리나라 해양수산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전체 3권, 인류(鱗類 비늘 있는 것), 무인류(無鱗類 비늘 없는 것)·개류(介類 껍질류), 잡류(雜類)로 되어 있다. 날아가던 까마귀가 물 위에 뜬 오징어를 죽은 줄 알고 쪼면 도리어 물속으로 끌려들어가 먹혔으므로 까마귀 도적, 오적어(烏賊魚)라 기록했다. 오적어가 오징어로 변한 것이다. “자(玆)는 검다(黑)의 뜻이니 자산은 흑산(黑山)과 같다. 흑산은 음침하고 어두워 두려운 데가 있다며 편지를 보낼 때마다 자산이라고 썼다.” 자산어보에 기록한 어류·패류·조류 등 수산동식물은 155종이었다.

10시 20분 홍도에 닿는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나이든 여자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여관, 식당에 오라고 잡아끌 듯 하는데 난감할 지경이다. 우리는 오후 3시 40분 유람선 예약부터 했다. 산으로 오르려니 깃대봉 표지는 없고 여관 이름들만 확연히 드러난다.

“어느 쪽으로 가지?”

“시장경제는 사회경제를 압도한다.”

“모텔은 여관을 압도한다.”

“……”

청어미륵. [사진=김재준 시인]
청어미륵. [사진=김재준 시인]

바위섬과 어우러진 예덕나무 그리고 청어미륵

숙박업소 좁은 골목길 죽 들어가서 흑산초등학교홍도분교, 오른쪽 이정표가 반갑다. 20분쯤 걸어 계단으로 오르니 해국(海菊)은 바람에 살랑거린다. 동백·참식·후박·소사·칡·붉·작살나무, 예덕나무는 확실히 섬과 잘 어울리는 세련된 나무다.

예덕나무는 대극과의 낙엽 큰나무로 10미터 정도까지 자란다. 붉은빛을 띤 긴 잎자루에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으로 헛개나무, 오동나무 잎을 합쳐 놓은 것 같다. 암수딴그루로 6월경에 녹황색 꽃이 달린다. 열매는 10월에 검게 익고 가시가 있다. 전남·경남·충남 등지에 자란다. 일본, 중국에서는 예덕나무 잎, 줄기, 껍질을 갈아 알약으로 만들어 암치료제로 판다고 알려져 있다. 오동나무와 비슷해서 야오동(野梧桐), 야동(野桐), 봄철 새순이 붉은 빛깔을 띤다고 적아백(赤芽柏), 밥이나 떡을 싸먹는다 해서 채성엽(採盛葉)으로 부른다. 뜨거운 밥을 잎에 싸 먹으면 향이 좋다. 빨간 순을 따 소금물로 데쳐 떫은맛을 없애 무쳐 먹기도 한다. 건위·소화를 잘되게 하고 신장·방광의 결석을 녹이며 통증을 없애준다. 십이지장·위궤양·위암에 잎·줄기·껍질을 달여 먹고, 치질·종기·유선염 등에 달인 물로 씻거나 찜질을 하면 효과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건너편 양산봉(231미터), 방구여(남문바위), 바위섬과 학교와 어우러진 풍경은 절경이다. 푸른 하늘에 구름이 둥실 떴고 바다 색깔도 에메랄드 빛, 티끌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자연이 만든 수채화다. 며느리밥풀꽃은 훨씬 붉고 숲 내음도 아닌 듯 갯 내음이다. 두 가지, 세 가지, 여럿이 섞여 더욱 향기롭다. 싸르륵 싸르륵 모래와 조약돌을 끌어오는 파도소리도 화음을 맞추듯 맑고 정겹다. 해조곡(海潮曲)이 따로 없다.

구실잣밤나무 숲길, 말오줌대는 지리산에 자라는 것보다 두껍고 붉은 색을 띈다. 동백나무 숲 터널로 들어서자 어두울 정도로 빽빽하다. 청어미륵, 남녀 미륵으로 불리는 두 개의 돌이다. 고기잡이배에 청어는 들지 않고 돌만 그물에 걸렸는데 어느 어부의 꿈에 돌을 모셔 놓으면 풍어가 든다는 계시를 받아 그대로 하였더니 고기잡이가 잘됐다고 한다. 어촌의 민간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상징물이다.

청어미륵을 지나 그늘인데도 땀은 비오듯 흐른다. 고마운 김 선생님 배려에 배낭은 젖지 않았다. 하도 땀을 많이 흘리니 비닐 천으로 맵시 나게 만들어 준 등받이 덕택이다.

11시경 동백 숲 쉼터(깃대봉1.1·홍도1구0.9킬로미터), 땀 닦으며 물 한 잔. 가파른 나무계단 길 올라서니 고로쇠·팔손이 잎을 섞어놓은 듯 잎은 두껍고 3~5갈래로 깊게 갈라져서(缺刻) 광택이 난다. 황칠나무다. 15미터까지 자라며 회색껍질로 10월에 열매는 검은색으로 익는다. 줄기에 상처를 내면 노란 액이 나오는데 황칠이다. 남서 해안·섬에서 잘 자라는 상록활엽 큰키나무, 우리나라 원산지다. 옻나무와 함께 천연 칠감으로 옛날부터 귀하게 여겼다. 나무·금속 공예품 등에 칠을 하면 황금색 찬란한 빛과 상쾌한 향이 나온다. 원나라에서도 고려 황칠을 최고로 쳤다. 화학 도료(塗料)의 등장으로 한때 맥이 끊겼지만 최근에는 황칠의 우수성을 계승하기 위해 황칠나무 보급이 활발한 편이다.

수평선 위로 아스라이 보이는 흑산도. [사진=김재준 시인]
수평선 위로 아스라이 보이는 흑산도. [사진=김재준 시인]

배 시간을 맞춰야 하니 마음은 바쁜데 따라오는 일행은 처진 모양이다. 동백·후박나무 컴컴한 숲속의 숨골재에 닿는다. 옛날 어떤 어부가 절구 공이로 쓸 나무를 베다 구멍에 빠뜨렸다. 다음 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데 물에 떠 있는 나무를 보니 어제 빠뜨린 것이었다. 바다 밑으로 뚫려있는 굴이라 하여 숨골재굴이라 불리다 지금은 숨골재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이 나왔는데 메워 버렸다 한다.

가파른 동백숲길 오르니 콩짜개란은 동백나무 줄기에 붙어산다. 그늘에 습기가 많아 춘란·풍란도 해풍에 살기 좋은지 기세가 등등하다. 팥배·고로쇠나무를 보면서 수상한 사람들을 만난다. 난초 캐는 사람들이 아닐 것으로 믿는다.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이라 풀·나무·돌 등 어느 것 하나도 가져갈 수 없으니 불법으로 채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11시 20분, 앞바다에 보이는 섬이 검으니 흑산도(黑山島), 이름값을 한다. 참식나무, 콩짜개란은 일엽초와 같이 산다. 숯가마터를 지나 능선길 햇살이 잘 드는 길옆으로 분홍빛 꽃을 피운 꿩의비름은 크고 잎도 두텁다. 좀굴거리나무도 씻은 듯 깨끗한데 바위에 앉아 서해를 바라보니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마음이 편안하다. 이 봉우리를 오르면 한 해의 건강과 행운이 온다는 이야기가 속설이 아니길 믿는다. 너무 고요해서 우스갯소리지만 상하이의 닭 우는 소리 들릴 것 같다. 저 바다 서쪽 끝까지 가면 산둥 반도에 닿을 것이다. 옛날 당나라로 갈 때 바닷길 하루가면 흑산도·홍도에, 다시 하루를 더해 가거도에 이르고 사흘 가면 도착했다고 전한다. 순풍을 만나면 하루 만에 갈 수 있다고 했다.

11시 30분, 홍도 깃대봉 365미터 표지석이다(홍도2구2.1·홍도1구2킬로미터). 이곳에서 바라보는 산과 섬, 바다는 아늑하고 정겹다. 다도해(多島海). 잔잔한 바다 위 왼쪽부터 독립문바위, 흑산도, 상태·중태·하태도, 오른쪽이 가거도(可居島)다. 우리나라 서남단 끝 섬으로 가히 살 만한 섬,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섬이라 가거도라는 것이다. 한때 소흑산도라고 했다. 꿩의비름, 예덕·소사·돈나무들이 정상을 지키고 섰다. 깃대봉 주변에는 동백·후박·구실잣밤·소사·식나무, 덩굴사철, 참기름을 바른 듯한 도깨비쇠고비 등 희귀식물 수백 종이 있다. 깃대봉(旗峰)은 흑산도와 깃대로 연락을 한 데서 불린 듯, 그러나 여기서 보니 거리가 너무 멀다.

(다음 회에 계속)

글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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