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모임 속 차

김홍도 '서원아집도', 선면, 18세기후반, 지본담채, 27.6X80.3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서원아집도', 선면, 18세기후반, 지본담채, 27.6X80.3cm, 국립중앙박물관

[뉴스퀘스트=함은혜(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조선시대의 문인들 모임에 우아한 모임을 뜻하는 ‘아회’라는 특별한 이름이 있다. 이 아회의 장면을 포착하여 그린 그림 속에서 차는 어떤 의미일까.

‘아회(雅會)’란 3인 이상이 모여 다양한 풍류 행위를 즐긴 우아하고 고상한 문인모임이다. 문인들은 복잡한 세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면서 우아하고 고상한 삶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하고자 이 아회를 즐겼다. 이러한 아회를 ‘아집(雅集)’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벗들과 모여 청담(淸談), 전다(煎茶, 차 달이기), 탄금(彈琴, 거문고 연주), 위기(圍棋, 바둑), 고동기(古銅器) 완상, 시·서·화(詩·書·畵) 창작 및 감상 등의 풍류를 함께 즐겼다. 이 행위들은 아회 문화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임과 동시에 아회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이 중에서도 전다 행위로 대표되는 차는 청담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써 등장하게 된다. 아회에서 술과 더불어 빠지지 않는 것이 차와 이에 대한 품평이다. 문인은 청담 실현을 위해 차를 즐겨 마셨고, 이 차와 전다를 통해서 은일의 추구가 심화되었고 이것이 현실 속의 모임에서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음다 문화는 아회 장면에서 차를 끓이는 다동의 모습으로 대부분 표현되었다. 아회도의 다동은 정원이나 야외에서 손님을 맞이하여 대화를 나누는 고사의 근처에서 풍로 앞에 앉아 부채질을 하거나 불쏘시개를 사용하여 불을 조절하는 모습이 주를 이룬다.

중국은 10세기경부터 문인들의 아회가 본격화되었고, 그 중에서도 북송대의 중요한 모임이 바로 ‘서원아집(西園雅集)’이다. 서원아집은 1087년 북송(北宋)의 수도 개봉(開封)에 위치한 왕선(王詵, 1036~1104)의 정원인 서원(西園)에서 소식(蘇軾, 1036~1101), 소철(蘇轍, 1039~1112), 유경(劉涇, 1043~1100), 황정견(黃庭堅, 1045~1105), 장래(張來, 1046~1106), 이공린(李公麟, 1049~1106), 진관(秦觀, 1049~1101), 미불(米芾, 1051~1107), 조보지(晁補之, 1053~1110), 채조(蔡肇), 이지의(李之義), 정정로(鄭靖老), 진사도(陳師道, 1052~1102), 왕공(王鞏), 진경원(陳景元), 왕흠신(王欽臣), 원통대사(圓通大師) 등이 모인 아회이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이공린은 모임의 장면을 그렸고, 미불은 그 그림에 대한 「서원아집도기(西園雅集圖記)」를 지었다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서원아집이 북송대 실제로 열린 모임이 아니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면서 현존하는 이공린의 그림과 미불의 기록이 후대에 이 모임의 구성원들을 칭송하려는 의도에서 재구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논의와는 관계없이, <서원아집도>는 이 문인들의 모임을 그린 대표적인 아회도로써 송대부터 인기 있는 주제로 그려지기 시작하였고, 원대를 거쳐 명·청대에 활발히 제작되었다. ‘서원아집’은 조선의 문인들에게도 이상적인 문인 모임으로 인식되어 칭송되었다. 17세기경에 조선에 전래되어 특히 18세기 이후에 활발히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서원아집도>는 속세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은거지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는 문인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다. 서원아집은 정원에서 열린 아회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아함과 고상함을 추구하는 아취(雅趣)있는 문인 모임의 전형이 된 것이다.

현존하는 서원아집도 중에 차를 달이는 다동이 그려진 작품으로는 김홍도의 선면 <서원아집도>가 있다. 김홍도의 이 그림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서원아집도기」에 차를 달이는 내용이나 차를 마시는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차를 달이는 다동의 장면을 선택하여 그려 넣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점을 주목하여 그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선면의 오른쪽 하단에 차를 달이는 다동의 모습이 보인다. ㄷ자형 입구인 풍로와 단정한 후파형 탕관은 전형적인 김홍도 양식으로 그려졌다. 다동은 풍로 앞에 앉아서 불쏘시개로 보이는 막대기를 오른손에 들고서 불을 붙이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다동의 등장만으로도 아회가 이루어지는 정원인 서원을 더욱 이상적이면서도 지향할 만한 공간으로 만든다. 이 「서원아집도기」 속의 인물들이 된 듯 김홍도와 교유한 문인들이 자신을 대입할 수 있게 재현한 공간에서 차를 준비하는 다동의 도상은 고상함과 우아함을 한껏 돋보이게 강조하고 있다. 김홍도를 비롯하여 그와 교유한 문인들과의 모임에서 실제로 차는 그들에게 중요한 요소였음을 추측해볼 수 있고, 또 아회 장면이 실제든 상상이든 그들의 우아한 모임 속에서 차를 필수요소로써 인식했던 것 같다.

이 그림의 뒷이야기도 살펴보자. 선면 <서원아집도>는 화면 우측 하단에 “무술년(戊戌年) 여름 비 오는 날에 그려 용눌에게 주다(戊戌夏雨中寫贈用訥)”라는 김홍도의 관서에 따라 이 그림이 1778년 여름에 제작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서원아집도기」내용의 제시는 그림보다 한 해 먼저인 1777년 7월에 강세황이 직접 적은 것이다. 화면에 제발을 미리 적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므로 작품이 제작된 상황과 시기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강세황이 기문(記文)을 적었던 1777년 김홍도의 생활에 대해 살펴보면 마성린(馬聖麟)의 기록 중 「평생우악총록(平生憂樂總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정유년(1777) … 별제 김홍도, 만호 신한평, 주부 김응환, 주부 이인문, 주부 한종일, 주부 이종현 등 유명한 화사들이 중부동의 감목관 강희언의 집에 모였는데 공사의 주문에 응하여 볼만한 것이 많았다. 나는 본래 그림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봄부터 겨울까지 그의 집에 드나들면서 감상을 하기도 하고 혹은 화제를 쓰기도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김홍도는 1777년을 매우 바쁘게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강세황이 1777년에 부탁받은 선면 그림 위에 이 제시를 썼을 가능성이 크며 그 이후인 1778년에 김홍도가 그림을 완성했을 것이다.

김홍도는 화제로 적혀 있는 「서원아집도기」(1)에 의거하여 선면 <서원아집도>를 그리면 서도 기존 내용에 없는 차 끓이는 다동의 도상을 선택하였다. 이는 속세를 벗어난 이들의 고아(高雅)한 모임 속에 차를 등장시켜, 제작자인 김홍도와 감상자인 용눌의 미감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들의 차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원본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김홍도만의 시대적인 해석을 녹여낸 것이기도 하다. 김홍도의 여러 다화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차 달이는 장면은 당시 차에 대한 관심과 인식의 확대와 함께 그의 취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찻물을 끓이는 전다 행위가 그만큼 아회의 지향점을 나타내는 중요한 시각적 이미지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처럼 탈속하여 정신적 자유로움과 고아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와 문인 모임은 지향하는 바가 같다.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 명대의 서원아집을 주제로 한 작품들에서도 차를 준비하는 다동의 모습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대 강남 지역에서 성행한 ‘시은’(市隱, 문인들은 전통적으로 산속에 숨어서 세속과의 인연을 끊었던 과거의 은일과는 달리, 자신의 저택이나 도시 근교에 서재와 정원을 마련하고 서화고동 완상을 비롯한 탄금, 위기, 전다 등을 즐기는 시은을 추구함) 생활과 이와 맞물려 당시에 유행된 정원 문화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함은혜 연구원
함은혜 연구원

‘서원아집’을 주제로 한 다화는 차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일부 차 애호층이 생겨남에 따라 차가 가진 정신성과 서원아집 속 문인들의 이상적 삶이 부합되면서 하나의 시각적 결과물로써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서원아집의 배경은 북송이지만 차를 달이는 다동의 모습에서 북송대의 주요 다법(茶法)이었던 점다(點茶)의 모습은 볼 수 없고, 대부분 풍로 위에 탕관이 올려져있는 도상임이 확인된다. 이는 서원아집이라는 이상적인 문인 모임의 표상과, 송대 점다법에서 명대 포다법으로의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 차 문화의 시대적인 반영이 혼합된 것이다.

당시 시은자(市隱者, 도시에서 은일하는 문인을 일컫는 말)들에게는 은거의 상황 속의 차 달이는 장면은 “세속을 떠나 이상적인 상태로 인간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문인들에게 있어서 모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다 행위는 당시 그들이 있는 현실의 공간을 탈속의 공간으로 바꿔주는 주요한 매개체였던 것 같다. 김홍도는 이미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 <서원아집도>를 통해서 우아하고도 고상한 그들의 모임 속에서 차의 이러한 역할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차를 마시는 이 공간도 나만의 은일의 공간, 세속의 근심에서 자유로운 공간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껴보면 어떨까.

※ (1) 「서원아집도기」에 의해 왕선의 원림에 모인 16명의 문사들을 다음의 다섯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①왕선·체조·이지의 및 소철이 소식이 붓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음. ②이공린이 도연명의「귀거래사」를 그림으로 그리는 장면을 황정견·조보지·장뢰·정정로가 옆에서 보고 있음. ③진관이 노송나무 아래 앉아서 도사 진경원이 월금(月琴) 타는 것을 듣고 있음. ④왕흠신이 미불이 암벽에 제(題)하는 것을 머리를 들어 보고 있음. ⑤유경이 원통대사의 무생론(無生論)에 대한 고담(高談)을 귀 기울여 듣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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