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립국악단 정악 공연 장면.
경북도립국악단 정악 공연 장면.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우리 국악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 <흥부가>, <수궁가>, <심청가>의 스토리는 조선시대까지 전해오는 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새롭게 창작한 스토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적벽가(赤壁歌)>의 경우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한 장면을 소재로 하여 재창작한 것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조조(曹操)는 오초연합군의 화공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연합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치다가 화용도에 이른다.

이때 조조 앞에 나타난 저승사자는 의리의 사나이 관우(關羽). 관우는 조조를 정에 이끌려 조조를 못 죽이고, 겨우 살아난 조조는 탄식하는 그 장면을 노래한 것이 바로 판소리 <적벽가>다.

<적벽가> 외에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소재로 한 시조도 많고 이중에는 시조창으로 지금까지 부르는 노래도 있다. 남창지름시조로도 불리는 <장판교상에>도 그렇다.

장판교 상에 환안(環眼)을 부릅뜨고 장팔사모창 메고 섰는 저 장사야 너의 성명이 무엇이냐

나는 한종실 유황숙의 말째 아우 거기장군(車騎將軍) 연인(燕人) 장익덕이다

저 장사 호통소리 듣고 뒤로 주춤주춤 하더라

장판교 전투는 조조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유비의 형주 땅으로 쳐들어왔을 때, 신야와 번성 전투에서 패배한 유비는 백성들과 더불어 퇴각하면서 방어선을 장판교에 쳤을 때의 싸움을 말한다. 조자룡은 유비의 아들 유선을 구출하여, 장판교 수비를 장비에게 맡기고 유비에게 달려갔다. 남은 장비는 필사적으로 장판교를 방어했다. 위의 시조는 그 장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장판교 위에서 둥근 눈을 부릅드고 호통을 치니, 조조군의 선봉장 하후걸은 말에서 떨어지고 조조 군사들은 감히 접근을 못했다는 것. 그 덕에 유비는 무사히 강하로 도망가 군사를 정비하여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과연 장판교에서 장비가 적의 10만 대군을 단기필마로 막아낼 수 있었을까? 『삼국지』를 읽다보면 재미있는 스토리에 빠져, 이런 의문을 가지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뻥’이다.

이러한 의문은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도 가졌었다.

사가(私家)에 있다가 16세에 갑자기 왕이 된 선조는 18세가 된 1569년, 당시 무인으로 용맹을 크게 떨쳤던 장필무를 인견하는 자리에서 평소 가졌던 의문을 펼쳤다. 조금 각색하여 그 질문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장 장군, 장비의 고함에 만군(萬軍)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지연의』에는 있다고 들었다. 장군의 생각은 어떠시오?”

이 질문에서 선조가 말한 ‘있다고 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들은 것이 아니라 선조가 직접 읽었다. 그것도 아주 『삼국지』를 탐독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왕이라고 하지만 선조도 당시에는 18세의 나이다. 그 나이에 『삼국지』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데, 마침 북방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면서 용맹을 떨친 당대의 용장이 나타났다. 바로 장필무(張弼武,1510년 ~ 1574년) 장군이다. 장필무 역시 장비와 같은 장씨가 아니었던가. 장필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선조가 듣고 싶은 대답은 이러했을 것이다.

“전하, 소장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사옵니다.”

실제로 장필무 장군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572년 함경도병마절도사로 오랑캐의 침입을 훌륭히 막아냈다.

선조와 장필무장군과 만나고 약 한 달이 지났을 때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하는 경연에서 당대의 유학자 기대승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먼저 기대승은 임금에게 ‘전하, 지난번에 장장필무 장군에게 삼국지 이야기를 하셨죠?’하고 운을 뗀 후 이렇게 말한다.

“…(『삼국지연의』는)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칩니다. 우연히 한 번 보셨으나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그중의 내용을 들어 말씀드린다면 동승(董承)의 의대(衣帶) 속 조서(詔書)라든가 적벽 싸움에서 이긴 것 등은 각각 괴상하고 허탄한 일과 근거 없는 말로 부연하여 만든 것입니다.”

소설 속 내용이 흥미를 느껴 장군에게 한 번 물어 보았다가 기대승에게 혼쭐이 나는 선조를 상상해보면 재미있다. 기대승은 퇴계 이황과 8년 동안 사단칠정을 주제로 논쟁을 했던 요즘 말로 하면 논리학의 대가였기에, 선조는 말 한마디 못 하고 기대승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기대승의 잔소리는 계속된다.

“…『전등신화』는 놀라우리만큼 저속하고 외설적인 책인데도 교서관이 재료를 사사로이 지급하여 각판(刻板)하기까지 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은 모두 이를 마음 아파합니다. 그 판본을 제거하려고도 하였으나 그대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일반 여염 사이에서는 다투어 서로 인쇄하여 보고 있으며 그 내용에는 남녀의 음행과 상도(常道)에 벗어나는 괴상하고 신기한 말들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삼국지연의』는 괴상하고 탄망(誕妄)함이 이와 같은데도 인출(印出)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어찌 무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이상 인용은 고전종합DB, 『선조실록』)”

기대승의 말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무식해서 『전등신화』나 『삼국지연의』와 같은 책을 읽는다는 것인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기대승의 말은 이런 책들이 대단히 인기가 있었음을 방증한다. 아무리 말려도 출판이 되어 보급되고 있다는 말이고, 심지어 ‘위에서 우연히 한 번 보셨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왕도 읽었던 것이다. 민망하니까 기대승은 ‘우연히’라는 말로 수식했을 뿐이다. 영·정조 이후는 청나라의 모종강본이 수입되면서 『삼국지연의』는 더욱 널리 읽혔다. 그 직접적인 인기의 증거는 위에서 언급한 오늘날의 판소리 다섯마당 중의 하나가 바로 <적벽가>란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시조도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런 거짓들이 기대승과 같은 유학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있었을까?

바로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야기의 인과적 재미를 통해 사실과 사실 너머에 있는 가치를 인지하고 싶어 한다. 흔히 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있다. ‘왕비가 임신 중에 죽었다’하면 그것이 사실이라도 사람들은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신이시여! 지금 막 돌아가신 왕비 뱃속의 아이는 도대체 누구의 아이입니까?’하면 사람들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이 이야기의 출발이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궁금해 하면서 보다 자발적으로 진실과 가치에 다가간다.

소설 읽었다고 당대 유학자에게 핀잔을 듣고, 도성을 비우고 총알같이 북쪽으로 도망갔다고, 또 이순신장군을 박해했다고, 수백 년이 지난 현대에까지도 비난을 받고 있는 선조임금이 조금 불쌍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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