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어진 황룡포본(高宗 御眞 黃龍袍本)

전 채용신 '고종 어진', 20세기, 비단에 채색, 180cm×10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 채용신 '고종 어진', 20세기, 비단에 채색, 180cm×10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고종이 왕의 일상복인 황색의 곤룡포를 착용하고, 익선관을 쓰고, 주칠에 금색 장식이 달린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어진이다.

어진 속 고종은 화문석이 깔린 바닥에 놓인 의자에 앉아 붉은 색 족좌대 위에 두발을 올려놓았다. 황색 곤룡포 속엔 붉은색 받침옷을 입었고, 받침옷의 깃이 위로 올라왔다. 각대는 가슴까지 위로 올려 맸고, 왼쪽 옷자락을 접어서 각대에 끼워 붉은색 안감을 드러냈다. 얼굴과 몸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두 손은 양쪽 무릎 위에 편안하게 올려놓았다.

왼쪽 허벅지 위로 붉은색 술과 상아로 만든 호패가 보이는데, “임자생 갑자등국(壬子生 甲子登國)”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임자년(1852년)에 태어나 갑자년(1864)에 왕위에 오르다’는 뜻이다.

이 어진은 표제가 없지만, “광무황제 사십구세어용(光武皇帝 四十九世御容)”이라는 표제가 있는 원광대 소장본 고종 어진과 전체적인 형식이 유사하여, 두 어진은 같은 초본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원광대 소장본이 이 어진에 비해 기량이 떨어지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어 이 어진보다 후대에 모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종 어진>은 아주 가는 세필로 왕의 얼굴(용안)모습을 묘사하였는데, 주름이나 수염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고, 얼굴 바탕색도 밝게 칠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고종의 성격을 잘 드러내었다. 특히 눈동자의 홍채 부분에 흰색의 반사광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어진을 제작할 때 고종의 초상 사진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도 있다. 입술의 윤곽선은 진하게 그리고, 갈라진 주름까지 표현할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사진보다 더 사실적인 묘사는 왕의 얼굴(용안)뿐 아니라 입고 있는 옷과 화문석·용상 등 다른 기물의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어깨와 가슴에 단 보(補)의 용무늬는 금을 너무 두껍께 칠해 부분적인 박락도 있다. 용상의 각도나 방석, 족좌대의 모양은 모두 위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부감의 시점으로 그렸다.

공수 자세를 취하지 않고 소매 바깥으로 표현된 손, 가슴 위로 높이 올린 옥대, 황색의 곤룡포는 이전 시대의 어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특히 황색은 명나라 황제가 입던 곤룡포의 색으로,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명나라 황제와 대등한 지위가 되었기 때문에 황색의 곤룡포를 입은 것이다.

백남주 큐레이터
백남주 큐레이터

고종은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왕실의 정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복궁을 재건하였고, 어진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872년 태조 이성계의 낡은 어진을 새롭게 이모하여 봉안하였고, 1900년에는 역대 왕들의 어진을 봉안하던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어진들이 소실되자, 대대적으로 어진을 제작하였다. 어진 제작을 위해 고종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을 초빙하였으며, 도화서 화원 외에도 궁궐 외부에서 실력자들을 초빙하였다. 역대 어진 제작에 세 차례나 참가했던 채용신(蔡龍臣, 1850~1941)역시 도화서 화원이 아니었지만 고종의 어진을 여러 점 그렸다. 채용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본인의 어진 초본을 채용신이 갖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 초본을 이용해서 그려진 여러 점의 고종 어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어진의궤와 미술사(이성미, 소와당, 2012),

왕과 국가의 회화(박정혜 외, 돌베개, 2011)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국립고궁박물관, 2015)

채용신의 초상화 연구(변종필, 경희대 대학원 박사논문, 2012)

한국의 초상화, 형과 영의 예술 (조선미, 돌베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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