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암곡 “5센티의 기적”과 노간주나무

응애에 당한 신갈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응애에 당한 신갈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점심이 부족할 것 같아 최부자집 요석궁 근처에서 김밥 몇 줄 샀다. 어느 해 겨울 저녁 이 집에서 저녁 먹곤 산책하는데, 그만 까불다 귀가 찢어져 밤새 응급실에서 고생했던 일이 선하다. 

아침 9시 40분 가뭄이 심한 오월의 흙길은 먼지가 뿌옇다. 통일전, 남산리 석탑을 지나 칠불암 가는 들녘에 차를 댄다. 고위산 가는 길, 나무 그늘 시원해 콧노래 부르기 좋은 구간이다. 50분가량 오르면 칠불암인데 화장실 공사를 하는지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염불 외는 소리, 합장에 기도하는 이들, 구경꾼들까지……. 야외에 단을 만들어 설법하는 자리에 사람이 많다보니 시끌벅적, 화장실 공사에 야단법석보다는 어수선하다고 해야겠지. 11시 20분경 내리쬐는 햇볕에 땀을 닦으며 바위길 올라 고위산으로 간다. 물통을 확인했더니 저마다 물이 부족하다. 정상에서 되돌아와 열암곡으로 가야하는데 걱정이 된다. 백운재·산정호수 삼거리 따라 고위산(高位山, 494미터)은 단숨에 올랐다. 

“11시 30분이면 이른 시간인데 백운암까지 내려갔다 옵시다.”“…….”

“가까운 거리니 오래 안 걸립니다.”

권유와 설득으로 백운암·천룡사 가는 길 내려선다. 저 멀리 천룡사지 석탑과 틈수골 아래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내려가는 바위 길이 험한지 한 사람은 더듬더듬 애를 먹는데 혹시 다칠까 염려된다. 물이 떨어져서 미안해도 어쩔 수 없는 일. 15분 내려가 백운암이다. 마당에 수돗물 채우며 입을 닦고 보니 치술령이 눈앞에까지 왔다. 

“점심, 고위산 정상이 어떨까? 배부르면 올라갈 때 힘들어 지쳐요.”

“…….”

같은 노선을 다시 오르는 길은 가깝고 멀던 간에 지루하다. 표정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 바위에 앉아 땀을 닦는다. 세상 풍경이 즐겁고 산 위에서 맞는 바람 또한 신선하다. 

그 옛날 진한 땅에 여섯 성씨가 있었는데 설·손·배·정·이·최씨. 이른바 육부촌이다. 

“경주 설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씨족 중 하나’(주18)입니다.” 

“…….”

삼국사기에 설씨녀(薛氏女)는 미천한 민가의 딸이나 용모가 단정하고 행실이 반듯해 보는 이마다 흠모하면서도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진평왕 때 늙은 아버지가 변경(邊境)을 지키러 가게 된다.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녀를 사모하던 사량부 소년 가실(嘉實)이 부역을 간다. 설씨녀는 은혜의 증표로 거울을 쪼개주지만 기약된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 성화에 시집을 가는데, 신혼 전날 삐쩍 마른 사람이 나타난다. 거울을 맞춰보니 가실인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백년해로 한다. 신라 설씨는 설서당 원효와 요석(瑤石)공주가 낳은 설총이 유명했다.

오후 1시 10분 백운재 조금 오른 갈림길에서 세갓골(2.4킬로미터)을 따른다. 

“나뭇잎이 왜 다 젖었죠? 비 온 것도 아닌데…….”

“진딧물이나 응애류 배설물입니다. 수액을 빨아먹고 배설해 놓은 것입니다.”

앵초. [사진=김재준 시인]
앵초. [사진=김재준 시인]

봉화대를 왼쪽으로 두고 20분 내려가면서 기린초와 앵초를 만난다. 앵초(櫻草)는 산지의 풀밭에 양지바르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데 꽃은 벌써 졌다. 타원형 잎은 섬모와 표면에 주름이 있고 가장자리는 갈라진다. 봉오리가 앵두 같아서 앵초인데 동자꽃 비슷한 홍자색 꽃은 4월에 핀다. 

오후1시 40분에 드디어 석불좌상이다. 등에는 이리저리 꿰맨 듯 거신광(주19) 돌이 먼저 보인다. 단 아래쪽에 검은 비닐로 덮인 구조물이다. 저기가 넘어진 석불, 열암곡석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어떤 연유에선지 산산조각 나버렸다. 2005년 등산객에 의해 불두(佛頭)가 발견되고, 2007년 발굴조사와 깨진 광배, 불두, 조각돌에 접합과 복원을 통해 대좌(臺座 불상을 올려놓는 대)에 안치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엎어진 대형불상이 발견된 것인데 열암곡마애석불이다. 불상의 코가 암반에서 겨우 5센티 떨어져 해외통신은 “5센티의 기적”으로 불렀다. 학계에서 8세기 후반경 지진으로 넘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위에 부딪쳤더라면 박살났을 것이다. 

열암곡 부처. [사진=김재준 시인]
열암곡 부처. [사진=김재준 시인]

“…….”

“퍼즐 맞추기를 했네.”

코가 없는 좌상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다.

“…….”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땅속에 박혀 있으니 정말 애처로운 노릇이다.

“땅속에 엎어진 불상은 일으켜 세우면 안 될까?”

“여러 번 복원을 시도했지만 남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서 어려움이 많아요. 크레인을 위한 도로개설이 어렵고 헬기나 특수 장비를 동원한다해도 부러질 수 있어 현재로선…….”

“이건 돌이 아니야.”

“5센티의 기적”. [사진=김재준 시인]
“5센티의 기적”. [사진=김재준 시인]

천 년 넘도록 땅속에 엎어진 석불에게 다 같이 합장한다. 5백 미터 높이도 안 되는 남산이지만 크고 위대한 산이라는 것을 여기서 실감한다. 바위가 얼마나 널브러져 있었으면 열암곡(列岩谷)이라 했을까? 아직도 주변에는 많은 바위들이 있다. 세갓골 계곡 끝으로 보이는 들길이 인생의 여정처럼 구불구불 휘돌아 지나간다. 오후 2시 출발, 30분 동안 오르고 내려가는데 왼쪽 바위산 아래 칠불암이 그림 같고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감탄사가 나온다. 숲으로 뒤덮인 산길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세상에 이런 길이 있었구나.” 

“이런 데는 심호흡 한 번 하고 가야 해요. 배로 숨을 쉬어볼까요. 마실 때는 배를 내밀고 반대로 등가죽이 붙도록 숨을 빼줘야 합니다.”

고향의 잃어버린 동산 같은 예쁜 산길을 신나게 내려간다. 붉은 싸리 꽃이 한창이다. 쇠물푸레, 생강나무, 잔솔밭을 지나고 참나무 이파리마다 비 맞은 것처럼 모두 젖었다. 신갈나무 넓은 잎에 진딧물이 가득 붙어 진액을 빨면서 끈적거린다. 

바위의 소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바위의 소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참말로 비가 왔다고 하겠어요.” 

“…….”

바짝 마른날이지만 소나무들은 이리저리 비틀려 바위에 뿌리를 박고 산다. 온 산에 바위뿐이다. 이 바위에서 터를 잡고 사는 나무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듯 작은 키에도 엄정함이 배어있다. 누가 이들에게 나무라고 할 것인가? 생명의 존귀함이여.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은 거룩해 희생돼서는 안 된다며 외경(畏敬)이라 했다. 

“이곳은 소나무 전체가 고급 분재”라고 한다. 경주에 산다는 어떤 부부다. 

“이런 나무는 신령이 깃들어 옮기면 죄받아요. 대번에 죽어버립니다.”

“…….”

소금강 보이는 경주시내 쪽이 절경이다. 넋을 놓고 있는데 갑자기 섬섬옥수(주20)를 바늘로 찌르며 앙칼진 나뭇잎이 시비를 건다. 삐쭉한 몸매는 나와 닮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바위산에 호위하듯 쭈뼛쭈뼛 서서 흰 바위와 대조를 이룬다. 하늘 높을 줄 알았지 땅 넓은 줄 모르는 크리스마스트리 원뿔 모양의 나무다. 

노간주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노간주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깊은 산중에 금슬 좋은 부부가 밭일을 하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강보에 싸인 아기를 물고 가버렸다. 이들은 날마다 아기를 잃은 그 자리에서 피눈물을 흘리는데, 어느 날 속이 붉은 나무가 자라났다. 사람들은 애간장이 다 녹아내렸다고 해서 노간주나무라 불렀다. 측백나무 식구인 노간주나무는 석회암 지대에 잘 자란다. 열매를 술에 개어 풍류를 즐길 만하고 중풍으로 손발이 마비된 데도 효과가 있다. 말린 것이 두송실(杜松實), 기름 내어 신경통·류머티즘에 바른다. 늙은(老) 가지(柯)에 열매(子)가 달린다고 노간주, 코뚜레나무라 한다. 양주(Gin) 원료로 학명이 주니퍼(Juniper)다. 소년시절 향이 좋은 주니퍼를 마신 기억이 새롭다. 보통 진(Gin)은 보리·귀리를 발효해서 노간주 열매를 살짝 넣어 빚고, 뱃사람 술인 럼(Rum)은 사탕수수를, 보드카(vodka)는 호밀 등을 발효시켜 자작나무 숯으로 걸러 무색이다. 

계곡 가까이 내려오는 동안 이야기가 한참 다른 데로 새버렸다. 산비탈의 흙 흘러내림을 막은 6~70년대 심은 아까시나무는 제 역할을 다한 건지 늙어서 그만 힘이 없거나 말라 죽은 것들이 많다. 동남산 칠불암에서 2~3시 방향의 바위산은 대부분 소나무, 노간주나무 군락지다. 띄엄띄엄 아이들 종아리만큼 굵은 쇠물푸레도 만날 수 있지만 무더위에는 잎이 넓은 참나무 숲이 고마울 따름이다. 오후 3시 30분 차있는 데까지 왔다.

(주)

18) 성씨의 고향(1986.6 중앙일보사刊).

19) 부처나 보살의 온몸에서 나오는 빛(擧身光),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아우르는 광배(光背)

20) 가늘고 옥처럼 아름다운 손(纖纖玉手).

<탐방길>

● 용장골(금오산까지 3.4킬로미터, 2시간 30분 정도)

용장골 정류장 → (20분)바위계곡 → (30분)설잠교 → (20분)용장사터 → (10분)삼륜대좌불 → (10분)용장사지삼층석탑 → (20분)금오산·이영재 갈림길 → (10분)금오산 → (1시간 40분, 휴식 포함)삼릉 → (20분, 도보)용장골 정류장

● 절골(금오산까지 4.3킬로미터, 2시간 15분 정도)

감실부처 → (1시간 15분)포석정 갈림길 → (1시간)금오산 → (30분)삼화령 → (1시간 20분)칠불 암·고위산 갈림길 → (10분)칠불암 → (1시간)동남산 마을입구

● 틈수골(고위산까지 2.4킬로미터, 1시간 20분 정도)

틈수골 버스정류장 → (10분)와룡동천 → (20분)천룡사터 → (20분)백운암 → (30분)고위산 → (30분)칠불암·고위산 갈림길 → (1시간 20분)통일전 갈림길 → (30분)금오산 → (10분)금송정 → (30분)배리삼존불

● 탑골(금오산까지 4킬로미터, 2시간 정도)

탑골 주차장 → (5분)마애조상군 → (20분)금오산·감실부처 갈림길 → (1시간 40분)금오산 → (10분)용장골 갈림길 → (1시간 30분)칠불암 → (1시간 30분)삼화령 → (20분)금오산 → (30분)옥룡암 갈림길 → (50분)마애조상군

*4~8명 정도 걸은 평균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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