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문재 풀에 내린 서해낙조. [사진=김재준 시인]
나문재 풀에 내린 서해낙조. [사진=김재준 시인]

[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나문재는 개펄 등에 무리지어 사는 한해살이 풀. 어긋나는 녹색 잎은 잎자루가 없고 나중에 붉게 변한다. 8~9월에 꽃피고 어린잎은 나물을 해먹는다. 경징이풀·함초·칠면초·기진개 등으로 부른다. 

철종이 머문 고택, 고려왕실이 머문 궁지 

다음날 새벽 안개비 맞으며 철종외가까지 걸었다. 파주염씨(坡州廉氏) 고택인데 고샅에는 첫사랑길 안내판을 붙여 놨다. 

“봉녀와 강화도령.”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이원범은 서울에서 나서 자랐으나 역모에 몰려 강화도로 유배된다. 형과 19살까지 농사를 짓던 그는 왕족이 아닌 백성처럼 살 뻔했으나,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왕으로 끌려간다. 꼭두각시 왕이니 끌려갈 수밖에……. 
이곳 외가의 담장, 우물가 길목을 걸으며 봉녀와 사랑을 나누던 강화도령은 왕이 된다. 그러나 사랑을 뺏긴 봉녀는 목 졸려 강물에 던져졌다고 전한다. 
 
아침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린다. 우산을 받쳐 들고 고려궁지에 차를 대니 주차할 곳이 마땅찮다.

나문재 풀. [사진=김재준 시인]
나문재 풀. [사진=김재준 시인]

“스티커 끊길라.” 
“…….”
“스티커 끊고 여행하라는데…….”
현수막에 강화 스티커 여행이라고 씌어있다. 
“유적지 보는 데마다 스티커 붙여 준다는군. 스탬프 여행도 있잖아.”
 
여기는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39년간 머물렀던 고려왕실이다. 왕실이 몽고에 항복했을 때 삼별초(三別抄)7)의 배중손과 이곳 출신 김통정은 진도, 제주도로 옮겨 끝까지 항전했지만 여몽연합군에 모두 죽는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은 멀리 유구왕국(오키나와)으로 가서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13년 오키나와에서 보았던 수막새8)가 우리나라 것과 똑같았으니…….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했던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불태웠지만 복원해 놨다. 그 당시 많은 서적과 문화재를 약탈해 갔는데 강화 동종도 가져가려다 워낙 커서 포기하고 다행히 이곳에 걸렸다. 진품은 강화박물관에 있다.

필자 설명에 귀 기울이는 일행들. [사진=김재준 시인]
필자 설명에 귀 기울이는 일행들. [사진=김재준 시인]

 
“성당이 왜 이렇게 많아?”

프랑스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강화읍민 3분의 2가 죽었고.9)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이 효수(梟首)10)당한 곳이어서 읍내에 성당이 많다.
빗길에 차로 골목길 나오니 용흥궁이다. 강화도령 이원범은 조정에서 데리러 왔을 때 역모로 죽은 할아버지, 큰형을 떠올려 잡으러 온 줄 알고 도망치는데 작은 형은 도망가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철종이 된 후 그가 살던 초가집은 왕이 되었으니, 용이 흥했다 해서 용흥궁(龍興宮)이 됐다. 

“여행의 기본은 체력·호기심·배려인데 여러분은 이번에 체력이 떨어지니 모두 부족했습니다. 체력을 키우려면 술을 좀 마셔야 해요. 뇌가 행동하도록 명령하니까…….”

고려궁지에서 바라본 읍내. [사진=김재준 시인]
고려궁지에서 바라본 읍내. [사진=김재준 시인]

(주)
7) 좌별초·우별초·신의군. 고려 고종 때의 특수부대. 최우가 야별초를 발전시킨 것.
8) 기와지붕 끝마무리에 썼던 수키와.
9) 역사산책(이규태).
10) 목을 베어 매달아 놓음.

<탐방길>

● 전체 5.2킬로미터, 4시간 40분
 
함허동천 입구 → (1시간 20분)바위능선 → (1시간 20분)마니산 → (50분)정수사 갈림길 → (35분)정수사 → (25분)해안도로 → (10분)함허동천 입구
 
*10명 정도 많은 휴식과 느리게 걸은 평균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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