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과거시험, 그리고 서울 생활

이황의 신주를 모신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내부. 보물 제211호.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이황의 신주를 모신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내부. 보물 제211호.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이황은 결혼을 했다. 상대는 진사 허찬의 딸인 동갑내기 김해 허씨였다. 김해에 살다가 고성을 거쳐 의령에 정착한 허씨의 집안은 크게 출세한 인물은 없지만 향리에서 덕망을 얻고 있었다.

이황이 스물세 살 되던 해 가을에 첫 아들 이준이 태어났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이황은 세 차례나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훗날 대학자가 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이황이 과거시험에 여러 번 떨어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어쩌면 이황은 천재형 학자가 아니라 노력형 학자였는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비록 출발은 더디었지만 나중에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높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으니 말이다.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이황은 비로소 소과에 합격을 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는 문과, 무과, 잡과, 그리고 생원시와 진사시가 있었다. 문과와 무과, 또는 이 양과를 합쳐서 대과라고 했고, 생원시와 진사시는 소과라고 했다. 잡과는 전문직 중인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가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외교관, 의사, 과학자, 법조인 등으로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전문직종을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불과 100여 년 전인 조선시대 때만 해도 그들의 신분은 중인에 지나지 않았다.

소과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시는 서울과 각 도의 감영에서 실시했으며, 여기에 합격한 사람들만이 서울에서 실시하는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복시에 합격해야 비로소 생원이나 진사가 되는 것이었다.

대과는 소과 합격자를 대상으로 서울과 각 도의 감영에서 실시하는 초시와, 초시 합격자만 모아서 예부나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복시와, 복시 합격자만 모아서 어전에는 실시하는 전시(殿試)의 세 단계를 거쳐야 했다.

복시에 붙으면 최종적으로 합격한 것이었다. 전시는 복시 합격자의 순위를 가리는 시험이었다.

이황이 소과에 합격하던 해에 둘째 아들 이채가 태어났으며, 그 산후병으로 부인 허씨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맏아들은 다섯 살, 둘째 아들은 태어난 지 겨우 한 달만의 일이었다. 허씨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되던 해, 이황은 안동 권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권씨는 종8품직을 지낸 권질의 딸로 할아버지는 참판까지 지낸 집안이었다.

서른세 살이 되던 해, 이황은 두 번째로 성균관 유학길에 올랐다. 더 늦기 전에 문과에 응시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3년마다 열리는 문과 식년시는 간지에 자(子), 묘(卯), 오(午), 유(酉)자가 들어가는 해에 개최되었다. 마침 이듬해가 갑오년이었다.

10년 만에 다시 들어온 성균관에서 이황은 호남 출신의 김인후(金麟厚)를 사귀었다. 나이는 이황보다 아홉 살 아래였지만 이황에게 도학을 깨우쳐준 김안국에게 배웠다는 인연으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김인후는 훗날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올랐지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낙향한 뒤 학문에만 전념하여 기세붕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가 되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 이황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던 넷째 형 이해의 집을 드나들면서 새로운 책과 학문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방문한 황진사의 집에서 『심경부주(心經附註)』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중국 송나라 학자 진덕수가 『사서삼경』 등 여러 경전에서 뽑은 중요한 구절과 철학자들의 학설을 모아서 『심경』이라는 책을 펴냈다. 여기에 명나라

학자 정민정이 후세 학자들의 학설을 추가한 책이 『심경부주』였다.

이황은 몇 달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심경부주』를 수백 번 탐독한 끝에 마침내 통달하게 되었다. 이황은 『심경부주』를 읽고 나서 “유학의 모든 문제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므로 결국 마음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유학의 진정한 정신은 무엇이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습득한 것이었다. 훗날 『심경부주』를 보완하기 위해서 「심경후론」을 저술한 이황은 “내가 도학에 감흥한 것은 바로 『심경부주』의 힘 덕분이다”라고 했다. 이황이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거듭한 『심경부주』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꼭 읽어야 할 중요한 책이 되었다.

이황은 『심경부주』를 읽고 깨달은 학문적 영감을 바탕으로 연구를 거듭하고 다른 지식을 접목하면서 자신만의 철학과 사상을 확립해갔다. 그런 의미에서 『심경부주』를 이황 사상의 기반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이황의 사상을 ‘심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해 가을에 대과의 초시에 응시한 이황은 장원급제를 했다. 복시에 대비해서 청량산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공부를 한 이황은 이듬해 2월 2등으로 복시에 합격했다. 관직을 제수하기 위해서 순위를 매기는 전시에서는 전체 33명 중에서 4등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서른네 살이 되던 해 이황은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은 순탄하지가 않았다. 연이은 사화로 사림파는 세력을 잃고 이황이 추구하던 도학사상을 실천하기에는 평탄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황이 후학들에게 도를 강의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인 명옥대. [사진=한국지역인문자연연구원]
이황이 후학들에게 도를 강의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인 명옥대.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왜의 사신을 거절하지 마소서!’

1544년(중종 39년), 경상남도 통영 사량진에 왜선 20여 척이 쳐들어왔다.

격전을 치른 끝에 왜적을 물리치긴 했지만 관군도 적지 않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왜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상태가 소홀했다는 점을 문제 삼아서 병마절도사와 수군통제사가 해직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왜적에 대한 대책이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대다수의 대신들은 왜국과의 교역을 단절하고 사신 왕래도 중단해야 한다는 강경책을 내놓았다. 그때 홍문관 전학으로 있던 이황은 강경책 위주의 외교정책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왜의 사신을 거절하지 마소서(乞勿絶倭使疏)」라는 유명한 상소문이다.

이 상소문에서 이황은 두 가지 관점을 거론했다. 하나는 ‘왕자(王者: 임금)는 오랑캐를 다스리지 않는다’였다.

“왕자는 오랑캐를 다스리지 않는 법입니다. 『춘추』에 ‘오랑캐에 대해서는 오는 자를 막지 않고 가는 자를 붙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스리지 않는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깊이 다스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왜적와 같은 오랑캐는 대책을 미리 정하고 상대하지 말고 상대의 행동에 따라서 유연하게 대응하는 게 좋다는 뜻이다. 감정에 치우쳐서 강경책을 펴면 오랑캐의 본성을 자극해서 오히려 더 큰 일에 휘말릴 수도 있음을 경고한 의견이었다. 이러한 의견은 적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군의 피해를 최소로 해야 한다는 것으로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는 입장이었다.

이황이 거론한 또 하나의 관점은 ‘권한은 가지되 세력은 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랑캐를 상대할 때 상황을 결정짓는 권(權)과 세(勢)는 언제나 내게 있게 해야지 저들에게 있게 하면 안 됩니다. 또한 권을 가지되 세는 잊은 채 무심하게 대하면 저들은 큰 덕으로 여기고 기쁜 마음으로 와서 성심으로 복종할 것입니다.”

‘권을 가지되 세는 잊으라’는 말은 상황을 주도하는 힘은 우리가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힘으로 상대를 억지로 굴복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힘을 앞세우면 왜적을 굴복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군도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게다가 당장은 잠잠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왜적은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갈등은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이 상소문에 나타난 이황의 외교정책은 당시 조선의 국력과 여러 차례의 사화를 거치면서 어수선해진 조정의 상황을 고려하면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반응은 차가웠다. 영의정 윤인경을 비롯한 많은 대신들은 “이황의 상소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내용으로 논의의 대상이 아닙니다”라고 무시해버렸다.

현대에 들어서 이황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상소에 대해 ‘이황의 인간관, 학문관, 역사관에 외교철학과 국제적 감각까지 가미된 뛰어난 평화외교론’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대표적인 이황학 연구자인 다카하시 교수는 이 상소에 대해 “이황의 학문은 물론이고 인간관과 평화론을 바탕으로 덕치주의 평화외교와 현실적 국토방위라는 두 가지 입장에서 국가를 지킬 수 있는 외교론이다”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당시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명종은 “조정의 논의가 이미 정해졌고 내 뜻도 바꾸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이황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이황은 자신의 이상과 현실정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황이 이언적의 글을 읽고 감명받아 쓴 여주 이씨 옥산 문중 유묵 중 원조오잠, 사산오대 편. 보물 제526-2호. [사진=한국지역인문자연연구원]
이황이 이언적의 글을 읽고 감명받아 쓴 여주 이씨 옥산 문중 유묵 중 원조오잠, 사산오대 편. 보물 제526-2호.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중앙정치에 실망해서 낙향하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소윤의 거두 윤원형과 함께 정적 탄압에 앞장섰던 이기가 이황을 탄핵했다. 당시 이황은 홍문관 전한이었는데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도 대윤이 꾸민 역모를 제대로 아뢰지 못했으며 오히려 협조했다고 모함을 했다.

관직을 삭탈당한 이황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오로지 나라와 백성만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해왔는데 억울한 죄명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차라리 능력이 부족하다고 했으면 모르겠지만 역모에 가담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547년(명종 2년), 명종은 이황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여서 홍문관 응교로 임명했다. 이황의 결백을 알고 그의 능력을 아낀 대신들의 탄원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황은 다시 벼슬길에 나서는 게 달갑지 않았다. 이미 그의 속마음은 중앙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못해 중앙정부로 돌아온 이황은 외직을 요청했다. 권력투쟁을 일삼는 중앙정치권에서 벗어나 건강을 돌보며 마음껏 독서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향에서 가까운 청송군을 원했지만 단양군수로 임명되었다. 단양군수로 있는 동안 이황은 향교를 정비하고 지역 유생들의 교육에 힘썼다. 잦은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저수지인 복도소도 만들었다. 나중에 단양의 유림에 서는 단암서원을 세우고 이황의 위패를 모셔서 그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세운 공적을 기렸다.

단양군수로 있은 지 10개월쯤 되었을 무렵,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했다. 당시에는 상피제(相避制)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일정한 범위 내의 친족 간에는 동일한 행정구역이나 통솔관계에 근무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였다.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이거나 파벌을 형성하는 것을 방지하고 관료 체계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상피제로 인해 이황은 풍기군수로 옮겨갔다. 그 후 14개월 동안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드는 업적을 남겼다. 풍기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안향의 고향이었다. 전임 군수 주세붕은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이황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발상지라고도 할 수 있는 백운동서원에서 선비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줄 것을 중앙정부에 요청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소수서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많은 서적과 토지와 노비를 하사했다.

1549년(명종 4년) 8월, 넷째 형 이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해는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서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인물이었다. 성격이 청렴하고 강직해서 관직에 있을 때는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바른 말 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인종은 즉위하자마자 소윤의 세도가였던 이기를 우의정에 임명했다.

이 인사는 조정에 물의를 일으켰다. 겉으로는 원로대신을 발탁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왕실의 외척을 고위직에 임명한 것이었다. 국정을 감찰하는 기관인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던 이해는 임금의 실정을 지적하는 기관인 사간원과 함께 이기를 비판하는 상소를 제출했다.

인종은 인사를 번복할 수 없다고 버텼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반대가 워낙 심하자 결국 이틀 만에 인사를 취소했다. 이 일 때문에 이기는 이해에게 앙심을 품었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기는 원한을 품고 있던 인물들에게 복수를 했다. 당시 한성부 부윤으로 있던 이해는 이기의 모함으로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를 뒤집어썼다. 참혹한 고문 끝에 곤장 100대를 맞은 후 갑산으로 유배를 가던 길에 양주 부근에서 장독이 도져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이해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자 이황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결국 그해 12월 이황은 풍기군수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겉으로는 병환이 심해져서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이해의 죽음을 계기로 현실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낀 나머지 낙향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황은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계상서당을 지었다. 그곳에서 강학을 하는 한편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면서 지냈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참신한 인물을 발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인물 발탁의 기준은 깨끗하고 강직하고 청렴하고 근실함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선발했는데 이황은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물망에 올랐다. 비록 이황을 탄핵한 소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학식과 덕망은 모두가 인정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1552년(명종 7년), 쉰두 살의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총장이 된 것이다. 어지러운 정치판에 비해서 성균관은 그나마 학구적인 분위기여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학풍 진작과 면학 분위기 조성에 힘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도 이미 기성 정치판의 때가 묻어 있었다. 크게 실망한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병을 핑계로 물러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도 명종은 여러 차례 벼슬을 주면서 이황을 중앙정부로 불렀다. 임금도 이황을 간절히 원했고 주변에서도 이황을 끊임없이 천거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이황은 잠시 조정에 나왔다가 이내 사퇴하기를 거듭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황은 조선시대에 사직을 원하는 상소를 가장 많이 올린 사람이었다. 명종 13년에 올린 사직 상소는 후대에 명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리에 맞는지 아는 것입니다. 첫째, 어리석음을 감추고 벼슬자리에 있는 것은 의리에 맞습니까? 둘째, 병에 시달리느라 일을 하지 못하면서 국록만 먹는 것은 의리에 맞습니까? 셋째, 터무니없는 명성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은 의리에 맞습니까? 넷째,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은 의리에 맞습니까? 다섯째, 직무를 다하지 못하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것은 의리에 맞습니까?” (다음 회에 계속)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