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생의 역작 '천명신도'

『선조유묵첩』. 이황의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필적을 모은 ‘선조유묵(先祖遺墨)’첩. 보물 제548-2호.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선조유묵첩』. 이황의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필적을 모은 ‘선조유묵(先祖遺墨)’첩. 보물 제548-2호.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이황학 연구의 권위자인 이상은 박사는 이황의 생애를 수학기, 출사기, 강학기로 나누었다. 태어나서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를 수학기, 문과에 급제한 서른네 살부터 풍기군수에서 막 퇴임한 마흔아홉 살까지를 출사기,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 교육에 전념하던 쉰 살부터 임종할 때까지를 강학기로 구분했다. 이황이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고 중요한 저술을 집필한 것은 대부분 강학기에 이루어졌다.

이황이 강학기였던 쉰세 살에 완성한 「천명신도(天命新圖)」는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천명을 중심으로 한 장의 그림에 담은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밝히려고 시도한 「천명신도」는 정지운(鄭之雲:1509~1561)의 「천명도」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황 철학의 근본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계관이다. 이황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며 인간의 도덕이 통용되는 사회였다. 「천명신도」는 그러한 이황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황이 제자를 가르칠 때 가장 강조했던 책 중 하나가 『심경』, 즉 『심경부주』였다. 『심경』에 대해 “나는 평생 이 책을 신명처럼 믿었고 엄한 아비처럼 공경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제자를 가르칠 때 『소학』, 『대학』, 『심경』, 『논어』, 『맹자』, 『주자서』의 순서로 교재를 삼았다. 본격적으로 유학 전문서적을 배우기 직전에 『심경』을 공부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심경』을 공부함으로써 학문을 배우는 정신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었다.

1556년, 훗날 중요한 정치가이자 학자가 된 김성일(金誠一)이 이황의 문하에 입문하여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김성일과 이황은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받았다.

“선생님 이(理)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리학에서는 이가 곧 진리이다. 김성일은 이황에게 “진리란 무엇입니까?”라고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물은 것이었다.

“어려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쉽다. 옛날 선비들이 ‘배를 만들어서 문을 건너고 수레를 만들어서 땅 위를 다닌다’고 한 말을 떠올리면 다른 것도 다 알 수 있다. 배로 물을 건너고 수레로 땅 위를 다니는 것은 이(理)이다.

『선조유묵첩』. 이황의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필적을 모은 ‘선조유묵(先祖遺墨)’첩. 보물 제548-2호.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선조유묵첩』. 이황의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필적을 모은 ‘선조유묵(先祖遺墨)’첩. 보물 제548-2호.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그런데 배로 땅 위를 다니고 수레로 물을 건너는 것은 이가 아니다. 임금은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공경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애로워야 하고 자식은 효도를 해야 하는 것은 이이다. 그런데 임금이 어질지 못하고 신하가 공경하지 않고 아버지가 자애롭지 못하고 자식을 효도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가 아니다. 천하에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은 이이고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가 아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 참된 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황 사상의 위대한 지점이 바로 이 대답 속에 있다. 이황은 진리를 어렵고 높은 곳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세속 세계에서 찾으려고 했다. 산속이나 특정한 수행 장소에서 고행을 하면서 진리를 찾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했고 인간이 살아가는 행위 속에서 진리를 실현하려고 했다. 인간과 자연과 세상이 순리대로 움직이는 것이 진리라고 파악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했으며 그것을 세상의 삶속에서 실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황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만고불변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보물 제1894호『 퇴계선생문집』.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보물 제1894호 『 퇴계선생문집』.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과 309명의 제자들

이황의 학문과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세 권의 책이 있다. 첫째는 『논어』이고 둘째는 『심경부주』이며 셋째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이다.

『주자대전』은 중국 송나라 때 성리학자 주희(朱熹: 주자)의 문집으로 본편100권 별집 11권 속집 10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물이다. 주희가 평생 동안 저작한 모든 학설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의 질문에 답한 편지와 시(詩), 기(記), 명(銘), 비문(碑文), 묘지(墓誌) 등을 담고 있다. 1543년(중종 38년), 마흔세 살의 이황은 『주자대전』을 처음 접했다. 이황이 이 책을 얼마나 탐독했는지는 김성일의 회고로 알 수 있다.

“선생이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대전』을 구해 오셨는데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읽기 시작하셨다. 여름이 다가도록 그치지 않자 주변에서 더위에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러자 선생은 ‘이 책을 읽으면 가슴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일어나서 저절로 더위를 잊어버리는데 무슨 병이 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주자대전』을 읽으면서 이황은 주자의 학문에 깊이 매료되었다.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바탕으로 삼고 거기에 자신의 이론을 보태서 새로운 학문으로 승화시킨 주자의 사상은 탁월했다. 이후 『주자대전』은 이황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제자들에게 강학을 할 때도 이 책을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이황은 제자들에게 방대한 『주자대전』을 한 질 베끼도록 했다. 그러면서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는 등 문제점을 찾아서 수정을 했다. 훗날 나라에서 『주자대전』을 다시 간행할 때 이황이 만든 필사본은 소중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선조실록』에는 “주자대전의 교정은 이황의 공이 반을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561년, 4년 전부터 짓기 시작한 도산서당이 마침내 완공되었다. 이황이 환갑을 맞은 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토계리에 자리 잡은 도산서당은 방 1칸, 마루 1칸, 부엌 1칸으로 이루어졌다. 방은 ‘완락재’, 마루는 ‘암서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에 서는 진리를 완성하고 즐기겠으며 마루에서는 바위에 깃들듯이 자연과 더불어 지내겠다는 의미였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후학을 가르치고 책을 읽으면서 말년을 보낼 보금자리였다.

도산서당이 완공되자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들었다. 이황의 문하를 거쳐간 제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이황 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만 309명이다. 이중에는 대제학을 지내고 재상을 지내고 시호를 받는 등 명망을 떨친 사람도 여러 명이다. 이황의 3대 제자로는 류성룡(柳成龍), 조목(趙穆), 김성일이 꼽힌다. 그 외에도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제자만 해도 수십 명이 넘었다.

이황이 제자 권호문에게 써준 유첩인 『퇴도선생필법 및 퇴도선생유첩』. 보물 제548호.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이황이 제자 권호문에게 써준 유첩인 『퇴도선생필법 및 퇴도선생유첩』. 보물 제548호.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이황의 제자를 성씨로 분류하면 120개 성씨가 넘으며 지역별로 따져보면 예안과 안동을 비롯하여 서울과 그 인근 지역, 영주, 예천, 성주, 풍기, 선산, 영천, 영해, 의성 등 영남 북부지역, 산청, 함안, 창원 등 영남 남부지역, 강원, 호남, 호서 등 전국의 모든 지역을 망라하고 있다. 이황의 학문이 당시 영남학파의 중심이었음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도 존경받고 인정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다.

쉴 새 없이 몰려오는 제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8칸짜리 기숙교육시설인 농운정사도 지었다. 일부러 멀리서 찾아오려는 제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학문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파고드는 게 중요합니다. 끊어짐이 없으면 뜻은 날이 갈수록 굳어지고 학문은 넓어집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뒷날을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잠시 여유 있게 지내고 나중에 도산서당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하면 틀린 것입니다. 훗날 도산서원에 와도 제대로 공부할 수 없을 겁니다.”

‘누구의 도움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라. 그것만이 학문을 성취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이황이 주장하는 공부법의 핵심이다. 현대에 들어서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생겼다. 어떤 일이든지 1만 시간 동안 꾸준히 노력하면 일정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황은 이미 수백 년 전에 1만 시간의 법칙을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임금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

이황이 도산서당에서 책을 읽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도 조정에서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명종은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며 그를 불렀다. 그때마다 병을 핑계로 거절했지만 그 횟수가 잦아지자 임금에게 미안한 마음이 쌓여갔다.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기대승에게 안부편지와 함께 넌지시 알리자 답장이 왔다.

“거취를 정하는 어려움은 한때이지만 처세의 올바름은 후세에까지 남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도는 한 시대가 우러러보는 것만이 아니라 훗날에도 모범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생님께서도 스스로 도를 지키시면서 일상의 법도에는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자신의 심정을 적극 지지해주는 기대승의 답장에 이황은 “장쾌하도다, 말씀이여!”라고 외쳤다. 거듭된 부름에도 이황이 응하지 않자 명종은 궁중의 화공을 불러서 “가서 이황이 거처하고 있는 도산의 경치를 그려서 오라”는 명을 내렸다. 화공이 도산서당의 풍경을 그려 오자 명종은 명필 송인으로 하여금 그 그림에 이황이 지은 「도산기(陶山記)」를 적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거처에 걸어두고 이황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이 일화만으로도 최고 권력자였던 임금이 이황을 얼마나 아끼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만약 이황이 명예나 부를 탐했다면 임금의 총애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황은 고향에 틀어박혀서 오로지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1567년,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명종이 세상을 떠났다. 임금도 세상을 떠나면 사대부처럼 행장(行狀)을 남겼다. 행장은 죽은 사람의 행실을 간명하게 정리함으로써 그이의 생전 활동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누가 명종의 행장을 쓸 것인가는 긴 논의도 필요 없었다. 당대의 석학이자 명종이 아끼고 의지했던 이황으로 결정되었다.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어린 선조는 여러 차례 교서를 내려 이황을 조정으로 불렀다. 몇 번이나 사양을 하던 이황은 명종에 대한 마음의 빚과 어린 임금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조정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것이 1568년, 이황이 예순여덟 살이고 선조가 열일곱 살 되던 해였다.

서울로 올라온 이황은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지경연 춘추관성균관사를 연이어 겸했다. 이 시기의 이황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은 경연이었다. 경연은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것으로 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기능도 겸비하고 있었다. 특히 선조가 아직 어렸던 탓에 경연은 대단히 중요했다.

어느새 이황은 고희를 눈앞에 둔 나이였다. 어린 임금을 얼마나 보필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할 나이였다. 이황은 남은 힘을 끌어 모아 임금을 위한 충언을 남기기로 했다. 그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아니 꼭 해야 할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이황은 7천 자가 넘는 긴 상소를 올렸다. 「무진년의 여섯 가지 소」라는 제목의 이 상소는 국내정치 분야의 대표적인 상소로 손꼽히고 있다.

“첫째, 계통을 소중하게 여겨서 인과 효의 도를 온전히 하십시오. 둘째, 참소와 아간을 막아서 양궁을 친하게 하십시오. 셋째, 성학을 돈독하게 해서 정치의 근본을 세우십시오. 넷째, 도덕과 학술을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하십시오. 다섯째, 대신을 미루고 대간과 소통하십시오. 여섯째, 몸을 닦고 살피는 일에 정성을 다해서 하늘의 보살핌을 받으십시오.”

이황은 경연을 통해서 선조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 군주가 국가를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유학적 덕목을 가르쳤던 것이었다. 이제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 이황은 제왕학의 주요 내용을 간추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기로 했다.

이황의 대표 저술 중 하나인 『성학십도』는 그때까지 이황이 이룩한 학문의 정수를 집대성한 것이다. 『성학십도』는 중국과 조선의 현인들이 만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도표 7개와, 이황이 직접 만든 도표 3개 등 모두 10개의 도표와 그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성학십도』의 도표들은 우주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인간 세상에서 그 원리가 실현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우주의 원리로 해결해가는 과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주의 원리’는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나 보편타당한 진리이다. 즉, 한마디로 정리하면 ‘군주가 나라를 이끌어감에 있어서 어떤 아집이나 특정 세력에 이끌리지 말고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섭리에 맞게 이끌어가라’는 뜻이다.

1568년 12월, 이황은 일생의 공력을 기울여서 완성한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바쳤다. 그리고 이제 자신은 소임을 다했으니 은퇴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나이도 많은 데다 젊을 때부터 고질적으로 괴롭혀온 병환 때문에 몸도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선조는 이황을 치하하면서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이유로 은퇴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해를 넘긴 끝에야 이황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직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선조는 이황에게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했다. 그러자 이황은 뜻밖에도 기대승을 추천했다. 고향 안동의 도산서당에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나주 사람을 추천한 것이었다. 게다가 기대승은 이황의 사상에 반발하여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온 인물이 아니었던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됨됨이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대인의 풍모를 이황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1569년(선조 2년) 3월, 예순아홉 살의 이황은 조정을 떠나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도산서원과 주변 산수를 담은 정선의 산수화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보물 제585호로 퇴우이선생진적에 수록되어 있다.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과 주변 산수를 담은 정선의 산수화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보물 제585호로 퇴우이선생진적에 수록되어 있다. [사진=안동시청, 안동 도산서원]

떠나는 길, 다시 살아서 오는 길

1570년(선조 3년) 11월, 시제를 지내기 위해 종가에 갔던 이황은 감기에 걸렸다. 집안 사람들은 몸이 불편하니 제사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황은 “내가 많이 늙은지라 제사를 모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빠질 수 없다”고 하면서 참석을 강행했다. 그 바람에 감기가 도져서 12월 2일에는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이황은 주변정리를 시작했다. 12월 3일, 자손들을 불러서 여러 사람에게 빌려왔거나 빌려 준 책들을 제자리로 돌려주라고 했다. 12월 4일, 조카 이영에게 유언을 받아 적게 했다. 유언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첫째, 예장을 사양하라. 둘째, 유밀과를 쓰지 마라. 셋째,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만 돌을 쓰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적고 뒷면에는 고향, 집안 내력, 지행, 출처만 간단하게 적어라. 넷째, 장례 절차는 두루 의논해서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해라.”

12월 7일에는 제자 이덕홍에게 자신이 남긴 책을 정리해줄 것을 부탁했다. 12월 8일에는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했다. 그날 오후 6시경 세상을 떠났다.

이황 유언의 핵심은 가능하면 최대한 간소하게 장례를 지내라는 것이었다. 특히 나라에서 장례비용을 부담하는 국장인 ‘예장’을 사양할 것을 첫째로 했지만 지켜지지 못했다. 이황의 부음을 듣자마자 선조는 즉시 이황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영의정의 예를 갖추어서 예장을 할 것을 명했다. 상주인 아들 이준이 이황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예장을 사양하는 상소를 세 번이나 올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급기야 장례기일이 촉박해지자 어쩔 수 없이 예장을 했다.

위대한 인물이 사망하면 임금이 내리는 칭호가 있다. 그것을 ‘시호’라고 한다. 이황은 사후 6년 만에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황의 시호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율곡 이이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에서는 정몽주가 성리학을 세우고 조선조에서는 김굉필과 조광조가 도학을 한다고 했지만 공부방법을 자세히 몰랐습니다. 그밖에 학문한다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그 언론과 풍지를 들으면 옛사람의 학문을 제대로 안 사람으로 진실로 비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정몽주가 성리학을 들여온 이래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은 많았지만 아무도 성과를 남기지 못했고, 오로지 이황만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쌓았다는 뜻이었다.

1600년(선조 33년), 원집 49권, 별집 1권, 외집 1권 등 총 51권 31책의 이황문집이 간행되었다. 일찍이 선조가 이황의 글과 글씨를 빠짐없이 수집해서 인쇄하라고 명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지체되어 이황 사후 30년 만에 나온 것이었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문묘는 유학정신으로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이곳에 모셔졌다는 것은 모든 유학자들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반출된 이황의 저작물은 일본 유학의 주류 학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 근세유학의 선구자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이황의 「천명도설(天命圖說)」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제자들에게 이황학을 전파했다. 아먀자키 안사이는 이황학을 자신의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이황을 ‘주자 이래 최고’라고 극찬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황에 관한 연구는 더욱 활발해졌다. 1970년 서울에 이황학연구원이 생겼으며 안동대의 이황학연구소를 필두로 경북대, 단국대 등 국내 여러 대학에서 이황학을 연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이황학회가 성립되어 일본, 중국, 미국, 독일, 러시아, 대만, 홍콩 등지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세계 곳곳에서 이황을 연구하고 있다.

수백 년이 흐른 현대에 와서도 이황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황의 사상에는 자아의 확립, 세상과의 소통, 이를 위한 철학적 방법론 등 현대 사회에도 요긴한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과 소통하면서도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아를 지키는 것,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으려고 했던 것, 이런 것들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덕목과도 일치한다. 때문에 이황은 과거의 학자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학자로, 그리고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인정하는 학자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 참고자료
『청년을 위한 이황평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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