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홀려, 국악에 미쳐

1960년대 가야금병창 연주를 하는 박귀희.
1960년대 가야금병창 연주를 하는 박귀희. [사진 제공= 칠곡군청, 김승국]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 가난과 근심에 쪼들리는 백이십만 서울시민에게 하루 동안 명랑한 기쁨을 드리오리니 온갖 볼일 제쳐놓고 봄빛 어리인 창경원 금잔디로나 오시라!

1947년 3월 19일 『경향신문』 기사 중의 한 구절이다. 『경향신문』은 1947년 <전국민속예술농악대제전>이라는 것을 개최했다. 이때가 8·15해방을 맞이하고 두 번째 봄을 맞는 해이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 미군정 치하에서 국민을 위로하는 잔치를 마련한 것이다.

‘가난과 근심’에 쪼들리는 서울시민을 위로하겠다는 문구가 와 닿는다. 이 신문은 “창악으로는 임방울, 오태석, 정남희, 박록주, 박귀희 등과 이밖에 수많은 명기명창들이 총동원하야…” 3월 29일부터 4월 1일까지 4일 동안 일종의 국악축제를 연 것이다.

임방울이야 국창(國唱)으로까지 알려진 사람이지만 박귀희는 누구인가?

박귀희는 1921년 생으로 당시 스물여섯 살. 함께 출연한 박록주가 1906년 생으로 당시 마흔한 살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귀희의 출연은 나이로 보아서는 파격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박귀희는 여러 창극의 주인공을 하면서 이미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스타였다.  

박귀희(朴貴姬)는 1921년 2월 6일(음력) 경북 칠곡군 가산면 심곡리 341번지(가산면 탑고개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박귀희는 자서전에서 자신은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현재의 가산면 송학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하판동은 아버지 장병관((張柄琯)의 집이 있던 곳이었고, 후실이었던 박귀희의 어머니 박금영은 심곡리 탑고개 마을에서 살았다. 장병관은 칠곡의 명문세가인 인동 장씨로, 대농이었으며 술도가를 운영했던 갑부였다.

박귀희의 부계 쪽 혈통은 간단히 말하면 양반 명문집안이었다. 때문에 장병관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대를 이을 아들을 학수고대하였다.

아명이 ‘노미’였다고 박귀희는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는데, 노미는 ‘놈’이다. 다음 자식은 아들을 바라고 그렇게 지은 것이다. 장병관은 본처에게서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고민하다가 후실을 얻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흔히 그랬듯이 후실을 가까운 이웃마을에 살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병관의 본가인 송학리 12-201번지에서 심곡리 341번지까지는 약 1.5km 정도의 거리여서 도보로 충분히 왕래가 가능한 거리였다. 

박귀희의 원래의 이름은 장영심(張永心)이었다. 호적상의 이름은 오계화(吳桂花), 예명은 박귀희다. 박귀희는 재력이 있는 아버지 덕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꽃신도 신고 고운 색동옷도 입으면서 주위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박귀희의 어머니 박금영은 대단히 교육열이 높았다. 어린 박귀희를 서너 살 때 동네 서당에 보내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서당에서 박귀희는 기초적인 한문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박귀희를 대구 외갓집으로 보냈다. 신식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때부터 박귀희는 대구 봉산동에 있는 외갓집에 머물면서 1929년 대구공립보통학교(오늘날의 대구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박귀희는 자서전에서 초등학교 때 공부를 상당히 잘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공부도 잘하고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던 박귀희가 국악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대개 국악은 집안의 분위기에 따라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 대물림하거나 부모나 친척 중의 누군가가 국악에 종사하는 경우 자연스럽게 국악을 접하면서 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또 본인이 재질이 있어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 국악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박귀희는 후자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악에 입문하는 최초의 계기는 있기 마련이다. 박귀희의 경우 어릴 때 국악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완고한 경상도 양반이라는 부계 집안의 분위기는 국악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박귀희의 대구 외갓집 외숙모는 국악을 상당히 좋아하였다.

나의 외숙모는 국악을 꽤나 좋아하셨는데 어느 날인가 어린 나를 이끌고 대구극장에서 열리는 조선성악연구회의 공연을 구경가게 되었다. (중략) 공연 중간쯤에서는 가야금 병창을 하시는 오태석 선생이 심청이 인당수 끌려가는 대목을 하였다. 옆에 손수건을 놓고서 눈물을 닦아가면서 소리를 하는데, 어지나 잘하던지 관객들에게 재창 삼창 오창을 받는 광경을 보고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다.(박귀희 자서전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 p.29)

박귀희가 자서전을 쓴 것이 1990년대 초반이니 약 60년 전의 기억이지만, 아무리 어린 시절이라 해도 결정적인 것은 기억하게 마련이다. 박귀희 역시 국악 공연을 관람하고 충격을 받았던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외숙모 손에 이끌려 간 국악공연에서 충격을 받은 박귀희는 새로운 행동에 들어간다. 국악을 관람하는 것은 수동적인 행위지만 적극적으로 배우기 위해 능동적으로 노력했던 것이다.

봉산동 대구공립보통학교 가는 길에 조그만 국악연구소 같은 것이 있어 맨날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그 집 문간에선 목만 빼꼼히 내밀고 그 노래 소리들을 훔쳐들었던 것이 국악에 몸담게 된 실마리가 됐다.

“석 달 동안을 내내 훔쳐들었어요. 그랬더니 하루는 그 집 선생 손광재(孫光在)라는 분이 들어오라고 그래요. 그래 들어갔더니 노래가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 거예요. 그렇다고 했지요. 그래 아는 노래가 있느냐, 아는 노래가 있으면 불러보라는 거예요. 불렀지요. 「만고강산」을 불렀어요. 그랬더니 뭐 3, 4년 배운 사람보다도 낫고 대구에 소녀명창이 하나 났다는 거예요.”(1979년 8월 2일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

이 인터뷰 기사는 박귀희가 살아 있을 당시 본인의 육성을 기록한 것이다. 박귀희는 실로 우연히 국악 소리에 매료되어 귀동냥하다가, 또 우연히 재능을 인정받아 국악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이때가 1932년 무렵이다.  

그때 박귀희를 사로잡은 소리가 바로 「만고강산」이라는 단가(短歌)다. 단가란 판소리를 하기 전에 목을 풀기 위해 하는, 판소리에 비해 비교적 짧은 소리를 말한다. 사설 내용은 대부분 산천풍월(山川風月)이나 고사(故事)를 읊은 것이다. 판소리와 상관없는 사설 내용의 단가도 있다. 단가는 약 50종에 이르나, 흔히 부르는 것은 20여 종이다.

단가는 판소리에 앞서 부르기에 기교를 덜 부리고 담담하게 노래한다. 즉 본격적인 판소리에 앞서 목을 푸는 노래가 바로 단가인데 「만고강산」은 판소리 명창들이 자주 부르는 단가 중의 하나이다. 사설은 금강산을 유람하는 내용이다.

만고강산(萬古江山) 유람(遊覽)할 제 삼신산(三神山)이 어디메뇨
일봉래(一蓬萊) 이방장(二方丈) 삼영주(三瀛洲) 이 아니냐
죽장(竹杖) 짚고 풍월(風月) 실어 봉래산(蓬萊山)을 구경갈 제
경포(鏡浦) 동령(東嶺)의 명월(明月)을 구경하고 청간정(淸澗亭) 낙산사(洛山寺)와 총석정(叢石亭)을 구경하고 
단발령(斷髮令)을 얼른 넘어 봉래산(蓬萊山)을 올라서니
천봉만학(千峯萬壑) 부용(芙蓉)들은 하늘 위에 솟아 있고
백절폭포(百折瀑布) 급(急)한 물은 은하수(銀河水)를 기울인 듯 잠든 구름 깨어 일고 맑은 안개 잠겼으니 선경(仙境)일시 분명쿠나
때마침 모춘(暮春)이라 붉은 꽃 푸른 잎과 나는 나비 우는 새는 춘광춘색(春光春色)을 자랑한다
봉래산(蓬萊山) 좋은 경치(景致) 지척(咫尺)에 던져두고 못 본 지가 몇 날인가 
다행(多幸)히 오늘날에 만고강산(萬古江山)을 유람(遊覽)하여 이곳을 당도(當到)하니 옛일이 새로워라 
어화 세상(世上) 벗님네야 상전벽해(桑田碧海) 웃들 마소 엽진화락(葉盡花落) 없을손가
서산(西山)에 걸린 해는 양류사(楊柳絲)로 잡아매고 동령(東嶺)에 걸린 달은 계수(桂樹)에 머물러라 한없이 놀고 가자

1960년대 판소리 공연을 하는 박귀희.
1960년대 판소리 공연을 하는 박귀희. [사진 제공= 칠곡군청, 김승국]

상당한 공력이 없으면 부르지 못하는 노래인데, 초등학생이 세 달 귀동냥으로 듣고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니 박귀희는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자서전에는 「만고강산」을 부른 것이 아니고, 심청가의 한 대목인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부른 것으로 되어 있다. 

「만고강산」이든 「소상팔경」이든 이것을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어린 아이가 제대로 소화해내기는 어려운 노릇이지만 박귀희의 소리를 들은 손광재는 재능을 알아보고 박귀희를 박지홍(朴枝洪)에게 소개했다. 박지홍은 당시 달성권번 사범으로 소리명창 김창환(金昌煥)의 제자이고, 1909년 스물일곱 살 때부터 대구에 거주하면서 권번에서 소리 사범을 했다.

박지홍을 만나면서 박귀희의 소리는 일취월장한 것으로 보인다. 박귀희 역시 이때부터 학교도 자주 결석하고 소리를 배웠는데 급기야는 집안에 알려져 경을 치르게 된다. 어머니는 당연히 결사적으로 소리 배우는 것을 반대했지만, 박귀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다행히 외숙모는 박귀희의 편이 되어 주어 그나마 박귀희는 소리를 계속 배울 수가 있었다. 취미로 하다가 말 것이니 뭐 그리 반대할 것이 있느냐고 외숙모가 어머니를 설득해,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취미로 국악을 배우다가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항상 기이한 인연으로부터 결정될 때도 있다. 박귀희도 그랬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1935년 당시 여류 명창으로 전국적 명성을 드날리던 이화중선(李花中仙)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화중선은 전설적인 판소리명창으로 당시 막 대동가극단을 창단했었다. 

이화중선은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목적으로 대구에 내려온 것인데 이때 달성권번의 손광재는 이화중선에게 박귀희를 소개했다. 이화중선은 박귀희에게 이름을 물었다. 이화중선의 눈에 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종의 데뷔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박귀희가 어렸다 해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만약 이화중선의 눈에 들어 공연이라도 하게 된다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은 자명하다.

때문에 박귀희는 순간적으로 이름을 ‘박귀희’라고 대답했다. 바로 이 순간이 칠곡 양반 인동 장씨 장병관의 딸 ‘장영심’에서 국악인 ‘박귀희’로 새로 탄생하는 찰나이다. 이화중선은 박귀희라고 주장하는 아이에게서 노래를 들어본다. 일종의 테스트였다. 

“귀희라고? 아따 그것 이쁘게 생겼네. 그래 니 소리 한 번 들어보자.”   
나는 당대의 대명창 이화중선 앞에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그동안 배운 단가를 불렀다. 이윽고 소리를 다 들은 이화중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이고, 손 선생님. 그동안 대구에서 명창 하나 기르고 계셨네요잉. 야를 나 줏쇼. 이름이 귀화라고 헛제. 너 나 따라가서 우리 극단에 입단할래?”
“네? 극단에 입단을 하라고예? 아니 선생님 그 말씀 사실입니꺼?”
“그래, 좀 고생은 되것지만, 나를 따라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공연도 하면 기량도 늘고 너한테는 좋은 것이여.”
나는 이렇게 하여 대동가극단에 입단을 하게 되었다.(박귀희 자서전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 p.37)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박귀희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다른 말로는 부모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독립적인 ‘박귀희’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대동가극단은 이화중선의 남편인 임종원에 의해 조직된 국악 공연단으로 이화중선을 비롯해 임방울, 장판개 등을 단원으로 가졌고, 멀리 만주까지 공연을 하러 다닌 인기를 누리던 가극단이었다.

며칠 후 대구극장에서 박귀희는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떨리지 않을 리 없었다. 「소상팔경」을 불렀다. 소리가 끝나자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이렇게 어린 명창이 탄생했다. 당시의 장면을 박귀희는 이렇게 회고한다.

대구 장안에서는 대구에서 ‘소녀 명창’이 났다고 화제가 되었다.

대구극장은 그 다음날부터 나를 보려고 오는 구경꾼들로 극장은 초만원 사례를 겪었고, 마침내는 대동가극단에서 귀염받는 소리꾼이 될 수 있었다. … 첫 공연으로 명창이 났다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이 가극단의 일원이 되어 일급 단원의 대우를 받으며 순회공연 길을 오르게 되었다. 

나의 국악인생은 이때부터 긴 여정이 시작되었고, 파란만장한 소리꾼의 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여행이기도 했던 것이다.(위의 책, p.40)  

이렇게 하여 1935년, 우리 나이로 열다섯 살에 박귀희는 국악 예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박귀희는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을 따라 전국 순회공연에 나선다.

고생도 많았지만 이 생활은 박귀희에게 당시 국악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현실인식을 심어주었다. 공연을 하는 틈틈이 박지홍과 장판개, 그리고 이화중선에게 춘향가나 흥보가의 토막소리를 익혔다.

공연에서는 주로 단가를 불렀지만 단가는 판소리의 하위 장르여서 박귀희는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문헌>

박귀희 자서전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

하응백, 『창악집성』

양효숙, 「박귀희의 삶과 예술」, 중앙대학교 석사논문, 2005.

김승국, 「향사 박귀희의 한국음악사적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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