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의 길로 들어서다

여성국극에서 남자 역을 하는 박귀희.
여성국극에서 남자 역을 하는 박귀희. [사진 제공= 칠곡군청, 김승국]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 대동악극단 공연을 1년 정도 따라다닌 뒤 박귀희는 악극단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대구에 머문다.

이때 박귀희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하나 더 보태진다. 대구에서 가야금병창의 명인이었던 강태홍(姜太弘)을 만난 것이다. 강태홍은 전남 무안 세습무가(世襲巫家) 집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부터 가야금을 배웠으며, 가야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창조(金昌祖)에게서 가야금을 전수받았다.

가야금병창은 가야금을 타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다. 창(唱)이 주가 되고 가야금이 부(副)가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줄은 줄대로 잘해야 하고 창은 창대로 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은 모두 19세기 중반 이후 정립된 것으로 김창조와 박팔괘 등을 그 원조로 삼는다.

이화중선의 눈에 든 것이 박귀희에게 하나의 행운이라면 마침 대구에서 사범을 하던 강태홍에게 가야금병창을 사사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박귀희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박귀희는 강태홍에게서 가야금과 병창의 기초수련을 닦고, 판소리 수련도 계속한다.

1938년에는 대구 부근에 있던 화원 용연사로 들어가 100일 동안 적벽가로 이름을 떨치던 조학진(曺學珍)에게서 판소리를 수련한다. 이를 100일 공부라 하는데 과거의 명창들은 이런 식으로 집중적으로 스승의 소리를 따라서 연마했다. 이것은 당시 소리 공부의 한 관례였다.

이 소리 공부는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의 일과와 똑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세 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 11시에 잠드는 시간까지 마치 좌선을 하듯 앉아서 소리 공부를 해야 하는데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 그야말로 세 끼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선생의 북장단에 맞춰 소리를 질러댔다.(박귀희 자서전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 57p)

뛰어난 예술가는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그 자신의 노력도 상당히 중요하다. 판소리나 가야금의 경우 기능적인 요소도 상당히 중요하기에 끊임없는 수련이 없이는 대가가 되기 힘들다.

박귀희의 경우 본능적으로 훌륭한 선생을 알아보고 그의 모든 것을 전수받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조학진에게 적벽가를 배운 후 박귀희는 열아홉 살 때는 담양으로 가서 서편제의 큰 줄기인 박동실에게 흥보가와 심청가를, 스물한 살 때는 하동 쌍계사에서 유성준에게서 수궁가를 배웠다.

그 후에는 박귀희가 어릴 때 공연 모습을 보고 경이롭게 생각했던 오태석에게 다시 가야금과 병창을 전수받는다.

요즘도 그렇지만 국악인들에게 계보는 상당히 중요하다. 스승의 음악을 대부분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기에 목을 쓰는 방법, 악기를 다루는 방법이 같고, 가락과 사설도 거의 같다. 때문에 판소리의 경우 동편제니 서편제니 중고제니 하는 유파가 생겨난다. 유파가 같다는 것은 같은 스승에게서 배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스승을 만나 열심히 배우는 것이야말로 국악인들이 자신의 음악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스승 역시 아무에게나 자신의 기량을 전수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싹수’가 보여야 제자로 삼는다.

일단 제자로 삼으면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다. 제자 역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절대적이다. 이런 신뢰관계 속에서 한 유파가 형성되고 전승된다.

박귀희는 처음 국악에 입문하면서부터 박지홍, 이화중선, 강태홍, 조학진, 유성준, 박동실 등에게서 국악을 전수받았고, 마지막으로 1941년부터 약 3년 동안 오태석에게 가야금병창을 전수받는다. 대략 10년 정도를 당대의 제일가는 스승으로부터 소리와 가야금을 전수받은 것이다.

오태석 선생에게서 가야금병창을 사사받을 무렵은 내가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살던 시절의 일인데, 당시 나는 봉익동의 대각사 부근에서 살고 있었고, 오태석 선생은 익선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오태석 선생에게서 가야금병창을 3년여 정도 사사받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선생의 지도를 받았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앞의 책, p.54)

봉익동의 대각사 부근과 익선동은 길 하나 건너면 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이다. 당시에는 많은 국악인들이 이 부근에 살았기에 지척에서 스승을 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박귀희가 소리와 가야금을 교육받는 일에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대동가극단을 시작으로 이후 한양가극단을 비롯해 여러 단체에서 공연도 꾸준하게 했다. 그 외에도 박귀희는 열일곱 살에 첫 결혼을 했다.

‘그 외에도’라고 말한 데 주목하기 바란다. 보통 당시의 여자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가장 중대한 일이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미고 아이를 낳으면 다른 외부활동은 부차적인 것이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박귀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겪는다. 그중에서는 기억의 저편에 묻어 두고 싶은 일도 있고,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나에게 그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결혼이다.(위의 책, p.69)

박귀희의 첫 결혼상대는 평안도 출신 강씨인데 대동가극단 시절부터 박귀희를 연모해 따라다니다가 구혼을 했고, 열일곱 살 소녀 박귀희는 그 사랑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결혼은 순탄치 못했다. 박귀희는 공연이나 소리공부를 위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때문에 평범한 가정주부 역할을 원하는 남편과의 갈등은 깊어갔다. 둘 사이에 아들 둘이 생겼고, 그 아이는 박귀희 어머니가 키우다시피 했다.

둘째를 낳고 그들은 합의하에 헤어졌다. 명창에 대한 꿈, 그것이 박귀희에게는 더욱 소중했기에 소리와 가야금을 배우고 공연하는 ‘그 외의 일’이 바로 가정사였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는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예인 박귀희의 운명 같은 것일 터이다. 가정사를 제외한다면, 박귀희는 날개를 단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태석에게서 가야금병창을 연마하던 시절 이전에 이미 박귀희는 공연계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국악단 활동과 레코드 취입

박귀희는 1938년 여름 조학진에게 적벽가를 수련한 후 악극단 생활로 돌아간다.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에 다시 가려고 했으나, 마침 대동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가버린 뒤여서 한양창극단에 입단하게 된다.

한양창극단은 정이남이 단장이었고, 박록주, 임방울 등 모두 30~40명 정도가 단원이었다.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소리, 악기 연주, 춤, 줄타기 등 종합적인 공연을 하였다. 박귀희는 한양창극단에 입단한 1938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예인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당시 200원의 정규 월급에다, 100원의 보너스를 받아 생활도 안정적으로 꾸밀 수 있었다. (회고록에 의하면 이 당시 박귀희는 100원은 용돈으로, 100원은 저축, 100원은 어머니께 송금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이 4~5원이었으니 창극단 활동을 통해 상당한 거액을 벌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때 처음으로 1,100원의 거액을 받고 일본 빅타레코드사에서 「춘향가」와 「흥보가」로 음반 취입을 하였다. 이 돈으로 서울 혜화동에 집을 마련해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박귀희는 공연이 없던 여름에는 공부에 전념했는데, 1939년 박동실에게, 1940년 유성준에게서 100일 동안의 소리공부를 했다.

1938년부터 박귀희는 상당히 알려진 신진 명창이 되었으며, 국악인들 사이에서도 신뢰와 리더십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40년에는 「조선일보」 주최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정작 박귀희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했던 것은 창극 활동이었다. 한양창극단에서 활동하던 박귀희는 1943년 5월 임방울, 박록주, 박초월, 정남희 등의 쟁쟁한 명창들과 함께 동일창극단을 재창단하게 된다.

동일창극단은 1942년 원래 경남 거제 출신이었던 하익원이 창단했으나, 이듬해 임방울이 대표를 맡고 박귀희가 단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동일창극단은 창극공연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창극은 판소리에서 파생한 근대적 형태의 한국식 오페라라 할 수 있다. 판소리는 원래 한 사람의 소리꾼과 한 사람의 고수가 이끌어나가는 전통 극음악이다. 그런데 판소리의 사설은 대부분 여러 주인공이 등장하는 서사 형태를 이루고 있어, 한 소리꾼이 목소리로 여러 배역을 담당하게끔 되어 있다.

이를테면 판소리 「춘향가」에서 소리꾼은 이도령, 춘향이, 월매, 방자, 변사또 등의 여러 역할을 혼자서 소화해야 한다. 즉 1인극이다. 때문에 고도의 기량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극 양식이 가지는 입체성을 띨 수는 없었다.

때문에 1902년 이후 이동백, 송만갑 등의 판소리 명창들은 판소리의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고자 「창극춘향전」의 공연을 시도했고, 이것은 차츰 일제강점기 시절 대중적인 인기장르로 부각하기 시작했다. 이후 창극은 전통의 판소리뿐만 아니라 고전 소설이나 역사에서 소재를 따서 각색한 창작 창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무대에 박귀희가 뛰어들면서 동일창극단이 야심차게 준비한 것이 바로 「일목장군(一目將軍)」이다. 창작극인 이 창극은 극작가 김아부(金亞夫)가 대본을 쓴 것으로 당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눈을 하나 잃어버린 고구려의 한 장군 이야기를 엮은 내용의 사극(史劇)이다.

동일창극단 이전까지만 해도 창극에서 극중 남성 역은 남자가, 여성 역은 여자가 배역을 맡는 것이 관례였다. 물론 남장 여성이 창극에서 남자 주인공 역할을 한 것이 최초는 아니었다. 1910년대의 기생조합에서 공연한 창극에서 이도령 역을 여성이 맡은 경우도 있었지만, 이때는 관객들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따라서 그때의 창극에서 남성 역은 당연히 남자 소리꾼이 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목장군」은 그러한 상식을 뒤집었다. 박귀희가 이 창극에서 남자 주인공인 장군 역을 맡았던 것이다. 여자 주인공인 아리수 역에는 박초월이었다. 바로 1940년대 초부터 195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이 「일목장군」은 박귀희의 회고에 의하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전국 순회 공연은 물론이고 중국의 길림, 훈춘, 하얼빈까지 공연이 이어졌다.

동일창극단은 일목장군 이후 박귀희가 왕자 역할을 한 「선화공주」를 무대에 올렸고 이 역시 엄청난 흥행실적을 기록했다(이 「선화공주」는 1956년 국내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로 각색되어 영화관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의 남자 주인공도 박귀희였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은 패망하고 1945년 8·15 해방이 찾아왔다. 박귀희는 해방 당시 신의주에서 공연을 하던 중 해방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여성국극에서 이도령 역의 박귀희/
여성국극에서 이도령 역의 박귀희. [사진 제공= 칠곡군청, 김승국]

해방을 맞이하자 국악계도 큰 혼란에 휩싸인다.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자 국악계는 1945년 10월 하순 ‘국악원’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출범시킨다.

국악원은 출범 당시 위원장은 이왕직아악부 아악사장을 지낸 함화진, 부위원장은 국악이론가 박헌봉, 총무국장은 유기룡 등이었지만, 좌익계였던 함화진이 1947년 검거되면서, 1948년 8월 박헌봉을 위원장으로 하여 국악원은 ‘대한국악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박귀희는 몇몇 뜻있는 여성 국악인들과 함께 새로운 조직을 출범시킨다.

그 결실이 바로 1948년 9월 창단된 ‘여성국악동호회’다. 회장으로는 박록주(朴綠珠), 부회장으로는 김연수(金鍊守)·임유앵(林柳鶯), 총무에는 정유색(鄭柳色), 재정외교부에는 박귀희(朴貴姫), 연구부에는 김소희(金素姫)·한영숙(韓英淑), 감찰부에는 김농주(金弄珠), 서무부에는 성추월(成秋月), 선전부에는 신숙(愼淑) 등이었다.

여성국악동호회는 대한민국 정부 출범 당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여러 예술단체의 하나이지만 그 내용으로 보면 순수한 공연단체였다. 다른 말로 하면 탈이념적 단체로 해방 이전의 동일창극단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여성 중심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단연히 이 단체의 목적은 공연이었다.

이름은 ‘동호회’를 표방했지만 창극 공연을 위해 결성한 것이었고, 회장으로는 연장자였던 선산 출신의 명창 박록주였다. 재정은 박귀희가 맡았던 것으로 보아 실질적으로는 박귀희가 주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여성국악동호회는 해방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일목장군」과 「선화공주」의 흥행을 이어보자는 목적에서 결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런데 남자 배역을 여자가 소화한다는 발상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박귀희의 회고에 의하면 그것은 창극단 순회공연 시 생길 수밖에 없는 남녀 연애문제에서 발단이 되었다. 젊은 남녀단원들이 전국을 순회하다 보면, 자연 애정문제가 생기고 이것이 더 진행되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기게 되었다.

아이가 있으면 여관 등에서는 방 빌려주기를 꺼리는 문제도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문제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단원 내부에서 성적인 문제로 갈등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한편 박귀희는 1939년 가을 레코드를 취입하러 일본에 녹음을 하러 가게 되는데, 이때 우연히 동경에서 송죽가극단(松竹歌劇團)의 공연을 보게 된다.

아사쿠사 국제극장에서 열렸던 이 공연은 순수한 여성들로만 구성된 단체라는 점에서 그때 당시에 나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성들이 남자 역을 하는데, 참으로 연기력도 좋았고, 호흡도 잘 맞았으며 재미도 있었다.

‘다까라스’로 불리는 일본의 여성극은 지금은 일본의 귀중한 전통문화로 보존되고 있다.(앞의 책 pp.101-102)

박귀희는 ‘다까라스’ 공연을 보고 막연하게나마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창극단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마침 동일창극단 공연에서 남장 역할을 하게 됨으로 인해, 그리고 그 공연이 성공함으로 인해 여성창극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일목장군」과 「선화공주」의 성공은 이러한 박귀희의 생각을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아이디어가 있다 해도 실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박귀희가 특히 남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것을 꼭 실행에 옮긴다는 점이다. 그것이 무모할 때도 있게 보이지만 박귀희는 집념을 가지고 그 일을 실행해 나간다. 이것은 후술하겠지만 국악예술고등학교 설립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행해진다.

여성국악동호회는 1948년 10월 창단공연으로 「옥중화(獄中花)」를 시공관의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이 공연은 해방 이전의 「일목장군」과 「선화공주」와는 달리 흥행에 실패했다. 절치부심 끝에 여성국악동호회는 이듬해 김아부가 각색하고 연출한 「햇님 달님」을 공연한다. 박귀희가 남자 주인공 햇님 왕자 역을 맡고 김소희가 달님 공주 역을 맡아 1949년 초연된 이 「햇님 달님」은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여성국악동호회의 첫 작품 「옥중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두 번째 작품 「햇님 달님」은 창극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그들은 흥행 수입으로 창립공연 때 진 빚을 갚은 것을 물론이고, 단원들에게 개런티를 듬뿍 주고도 거금 200여 만 환이 남아 사무실을 위한 집을 170만 환에 살 수 있었다.

서울에서 「햇님 달님」이 놀라운 흥행을 거두자 지방도시에서 흥행사들이 몰려들어 대구와 부산으로 순회공연에 나서게 됐고, 「햇님 달님」은 대구와 부산에서 더욱 인기를 누린다. 관객은 여성국극의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와 의상에 압도됐으며, 특히 남성으로 분장한 여성 배우의 특이한 매력 때문에 수많은 여자 관객들이 매료당한다. 여성국극단들은 야사, 설화, 전설을 애정과 이별 중심으로 재구성한 레퍼토리로 극성팬들을 몰고 다니며 50년대에 찬란한 여성국극 전성기를 누린다.(문화포털, 문화지식.)

이 공연을 통해 박귀희는 명실상부한 스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던 가운데 6·25전쟁이 터진다. 전쟁이 터지자 단원들은 흩어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박귀희 역시 대구로 피난을 갔다가 1·4후퇴 이후 부산에서 김소희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가서 피난민을 위한 공연을 열었지만 당시의 전시상황은 공연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여성 국극은 여러 단체로 분화가 일어나면서 5~6년 인기를 끌지만, 50년대가 끝나면서 국극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린다.

<참고문헌>

박귀희 자서전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

하응백, 『창악집성』

양효숙, 「박귀희의 삶과 예술」, 중앙대학교 석사논문, 2005.

김승국, 「향사 박귀희의 한국음악사적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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