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교육의 대모(代母)가 되기까지

1960년대 학생들을 지도하는 박귀희. [사진 제공= 칠곡군청, 김승국]
1960년대 학생들을 지도하는 박귀희. [사진 제공= 칠곡군청, 김승국]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박귀희는 6·25전쟁 후, 주로 세 가지 일에 주력한다.

그것은 첫째 국악 교육 등의 국악 전수 활동, 둘째 공연 등의 예술활동, 셋째 운당여관 운영과 관련된 사업이다. 이 세 가지 활동은 각각 다른 영역이면서도 하나의 영역이기도 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하는 일이 여럿이라 해도 그것은 한 인간의 자장 속에서 동시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박귀희가 국악교육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전후 국악인들의 생계문제를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국악인들은 권번에서의 교습이나 활동, 그리고 공연 수입 등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그런데 6·25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가 지나가자 국악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거의 와해되었다.

정악을 했던 일부 국악인들은 국립국악원에서 생계를 이을 수 있었지만 국악인들 중 다수를 차지했던 판소리를 포함한 민속악 계열의 활동을 했던 국악인들은, 영화의 활성화 등과 맞물려 그 활동과 교습무대가 점점 사라져갔다.

더군다나 권번 등에서 일부 담당했던 교육기능마저 상실되자, 국악인들 사이에서는 국악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교습소 설립이 수요와 공급 양쪽 측면에서 절실해졌던 것이다. 이에 박귀희는 「햇님 달님」의 여자 주인공이었던 김소희와 함께 돈암동 전차 종점 부근에 700평 정도의 부지를 인수하여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여 3년간 운영하였다.

이 학원은 잘 짜인 강사진 덕에 몰려드는 학생들로 인해 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에 박귀희는 학원을 아예 정식 인가 학교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구상을 했다.

이 구상은 국악이론가이자 민속악계에 큰 영향력이 있던 박헌봉을 만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박헌봉은 박귀희의 구상에 적극적으로 찬동했고 이에 1958년 11월 ‘재단법인 국악학원 기성회’를 조직했다. 박귀희는 돈암동 학원을 매각하여 당시 돈으로 1,700만 원을 마련하고,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만나 재원을 모았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1,350만 원을 내놓았고 그 외 여러 기업과 독지가들이 협찬을 했다.

그리하여 종로구 관훈동에 부지 500평, 건평 1천 평 규모의 2층 건물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문교부의 인가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 한 결과 1960년 3월 문교부의 인가를 받고 1960년 5월 13일 국악예술학교로 개교할 수 있었다.

이때 초대 교장은 박헌봉이었다. 이 국악예술학교는 박귀희의 발품과 추진력, 박헌봉의 명성과 국악계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설립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박귀희는 1973년 이 학교가 재단법인으로 바뀔 때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 학교는 1984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2008년에는 국립예술중고등학교로 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2016년까지 모두 11,68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현재 한국 국악계 여러 분야에서 중추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귀희는 국악예술학교 개교에 힘쓰면서도 1950년대 이후 한편으로 가야금병창의 연마와 보급, 진흥에 정열을 바쳤다. 가야금병창의 명인이었던 강태홍과 오태석에게 동시에 사사를 받았고, 또 본인의 노력으로 인해 박귀희는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와 병창 예능보유자로 인정받는다. 그녀는 이후 가야금병창의 전승과 보급에서 많은 업적을 이룬다.

김승국(노원문화재단 이사장)은 그의 논문 「향사 박귀희의 한국음악사적 행적」에서 박귀희의 예술활동을 다섯 단계로 구분하는 데 이는 대체로 타당하다.

그것은 첫째 ‘동일창극단’을 통한 예술활동, 둘째 ‘여성국악동호회’를 통한 여성국극 활동, 셋째 가야금병창 활동, 넷째 국악 작곡 활동, 다섯째 전래 민요 발굴 및 보존 활동이다. 이 다섯 활동은 각각이면서도 하나이기도 한데 그중 가야금병창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다.

즉 박귀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23호 가야금산조와 병창 예능보유자로서의 역할을 대단히 훌륭하게 소화했다. 가야금병창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인데, 이는 김승국에 의하면 다시 다섯 갈래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학교 교육을 통하여 가야금병창 전공자를 길러낼 수 있는 기반을 조성 했다.

둘째, 전국 국악경연대회에 가야금병창부문이 자리 잡을 수 있게끔 힘썼다.

셋째, 국내외 행사 및 재일 교포 위문공연 등 가야금병창의 레퍼토리를 확대하여 대중화에 앞장섰다.

넷째,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두어 대학교육 및 중고등학교에 가야금병창 교육을 정착시켰다.

다섯째, 1979년 ‘향사 박귀희 가야금병창곡집’을 출간하여 교육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김승국, 「향사 박귀희의 한국음악사적 행적」)

박귀희는 처음부터 판소리 공부를 했기에 판소리의 좋은 대목을 가야금병창곡으로 옮기고, 또 발굴한 민요를 가여금병창곡으로 재창조하는 일을 했다. 현재 연주되는 거의 모든 가야금병창곡은 박귀희에게서 재탄생했고, 그녀의 제자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그녀의 ‘향사 박귀희 가야금병창곡집’ 안에는 가야금의 도해, 가야금병창의 연주형태, 채보에 쓰인 음역과 조현법, 그리고 운지법, 특수기호 등의 해설이 실려 있고, 그동안 작곡하여 널리 불리어지고 있던 창작곡 22곡과 편곡하거나 작곡하였던 18곡과 단가 5곡 판소리 중의 애창대목 5곡 등 50곡이 오선 악보로 정리되어 수록되었다.

그녀는 산조음악과 판소리에 밀려 멸실 위기에 처해 있던 가야금병창이라는 분야를 크게 발전시켰다.

가야금병창은 소리도 잘하고 가야금도 잘 타는 음악가가 솔로 형태로 단가나 판소리의 한 대목을 불러 감동을 주던 것이었는데 그녀는 제자들과 함께 최대 인원 80명까지 이루어진 대규모적인 무대예술로 발전시켜 소리의 멋과 가야금의 경쾌함, 화려한 무대의상으로 관객에게 시각, 청각(視覺 聽覺)의 만족을 주어 공연효과를 극대화 시켰다. (김승국, 앞의 논문)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박귀희는 ‘가야금병창의 어머니’라 해도 무리가 없다. 한편 박귀희는 전통명소인 운당여관의 여주인이기도 했다.

운당여관에서 외국인 손님을 받아 한국을 알리거나, 또 바둑명인전이 열려 유명한 장소가 되었거나 하는 것은 물론 의미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 자체가 한 예술가의 명성을 더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귀희는 운당여관의 운영을 국악 발전을 위해 활용했다. 제자들에게 기식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국악 교육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박귀희는 국악예술학교가 안정이 되어가자 1972년부터 법인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자신의 대전 전답과 국악인 박소군을 설득하여 경기도 오산에 있는 과수원 5천 평, 무용인 한영숙으로부터 사당동 대지 150평을 기증받아 1993년 2월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취득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이로써 학생들은 국악과가 아닌 일반학과로도 입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박귀희는 학교의 운영을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며, 1988년 석관동 교사에서 금천구 시흥동으로 교사(校舍)를 옮길 때도 운당여관을 판 돈 26억을 재단에 헌납하였고,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재단에 헌납하였다. 국악교육을 위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대인(大人)이었다고 하겠다.

제자들과의 가야금 병창 연주. 좌로부터 김성녀, 박귀희, 안숙선. [사진 제공= 칠곡군청, 김승국]
제자들과의 가야금 병창 연주. 좌로부터 김성녀, 박귀희, 안숙선. [사진 제공= 칠곡군청, 김승국]

예인으로서의 박귀희

박귀희는 국악예고의 설립과 운영, 법인화, 교사 이전 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사업가로서 운당여관도 훌륭하게 운영했다. 그렇다고 그가 예술활동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1960년 미국 시카고박람회 세계민속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것을 필두로 일본, 프랑스, 독일, 이란 등 수많은 공연을 해외공연을 통해 국악을 알리는 데 앞장섰고, 창극, 가야금병창, 판소리 등에서 수많은 국내외 공연을 하였다.

이 공연은 대개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한 것이어서 제자들의 활동무대를 넓혀주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1961년 동경에 ‘한국무악원’을 설립하여 교포들에게 민족의 문화정체성을 심어주고 일본에 한국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그는 타계하기 직전 자서전 집필에 몰두하였는데 그 자서전 마지막 글귀는 다음과 같다.

우리 가락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이어준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의 일면을 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작업에 들어선 국악인들은 스스로 긍지를 갖고 힘차게 참여해야 한다. 국악의 즐거움은 곧 ‘민족혼’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박귀희 자서전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 p.230)

이 말은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박귀희의 말에는 울림과 진실이 있다. 몸소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로로 박귀희는 198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고, 1993년 건강이 악화되자, 그해 6월 운니동 사저를 학교 발전기금으로 기증하고, 7월 13일 소유하고 있는 현금 전액을 다시 발전기금으로 기증한 뒤 그 다음날인 7월 14일 향년 일흔셋을 일기로 작고했다.

박귀희는 국악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고, 받은 사랑보다 더 많은 것을 국악에, 그리고 제자들에게 베풀고 영면했다. 안숙선, 김덕수 등 그의 수많은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현재 한국 국악의 기둥이 되어 박귀희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박귀희 자서전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

하응백, 『창악집성』

양효숙, 「박귀희의 삶과 예술」, 중앙대학교 석사논문, 2005.

김승국, 「향사 박귀희의 한국음악사적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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