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혼례도첩' 제1면, 회혼례장 주변. [작자 미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33.5cm×45.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혼례도첩' 제1면, 회혼례장 주변. [작자 미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33.5cm×45.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회혼례도첩(回婚禮圖帖)'은 혼인 60주년을 기념하여 회혼례를 여는 모습을 다섯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뒤 하나로 묶은 도첩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첩에는 회혼례의 전 과정이 매우 생생하게 그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림 외에 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회혼례를 치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첫 장면에는 고령인 신랑이 지팡이를 짚은 채, 기럭아비를 앞세우고 신부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두 번째 장면은 회혼례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고령의 신랑 신부는 자손과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초례청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서있다. 처음 혼례를 올릴 때처럼 신부는 녹색의 원삼을 입고 가체를 올렸으며, 신랑은 남색의 단령을 입고 관모를 썼다.

세 번째 장면은 회혼례 의례에서 제일 중요한 과정인 헌수(獻壽)를 하는 장면으로, 큰 상을 받은 노부부에게 자손과 하객들이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며 술잔을 올리고 시를 지어 바치고 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장면은 회혼례를 치른 신랑이 하객들과 함께 축하주를 마시며 잔치를 즐기고 있다. 술과 음식을 권하는 신랑의 모습과 하객들이 예를 갖추고 술잔을 올리는 장면을 연이어 그렸다.

'회혼례도첩' 속에 등장하는 행사를 치루는 공간에는 잔칫집답게 천막이 드리워 있고, 집안에는 자손과 하객들이 가득 차있다. '회혼례도첩'은 마치 건축 도면을 그린 것처럼 건물의 구조를 정밀하게 그렸으며, 마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것 같은 부감(俯瞰)의 시선으로 각 장면을 구성하였는데, 평행사선 구도로 공간과 인물을 배치하였다.

'회혼례도첩' 제2면, 회혼식 장면. [작자 미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33.5cm×45.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혼례도첩' 제2면, 회혼식 장면. [작자 미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33.5cm×45.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혼례를 마치고 벌어진 연회에서는 주인공과 자손들, 그리고 참석한 하객들은 붉은색 칠을 한 상에 음식을 각각 받았다. 상 위에는 음식도 푸짐하게 차려지고, 꽃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게다가 사군자와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이 둘러져 있다. 기쁘고 즐거운 날답게 잔치에 온 사람들의 복색도 화려하고 다양하여 그림 전체의 색감이 화사하다.

오늘의 주인공인 노부인은 족두리를 쓰고, 하늘색 저고리에 푸른색 치마를 입었으며, 노신랑은 붉은색 갓을 쓰고, 흰색 포에 붉은 세조대를 둘렀다. 자손들 중 여인들은 청색·황색·녹색·보라색 등 다양한 색상의 삼회장저고리와 다홍색·남색·녹색의 치마를 입었고, 어린 여자 자손은 머리에 도투락댕기를 드려 한껏 치장을 하였다.

참석한 남자들의 대부분은 포를 입고 관을 쓴 차림인데, 개중에는 녹색과 청색의 포를 입은 사람도 눈에 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머리에 꽃가지를 꽂고 있어 그 모습이 매우 이채롭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한국일생의례사전』에는 회혼례를 “자녀들이 회혼을 맞는 부모를 위해 마련하는 의례이면서 잔치”로 정의하고 있다.

이 사전에 따르면, “회혼잔치를 하려면 부부가 자녀를 두고 한평생 같이 살며 함께 늙어야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자녀가 없어야 한다”고 한다. (『한국일생의례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014.)

회혼은 태어난 지 60년이 된 것을 축하하는 회갑(回甲),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회방(回榜)과 더불어 부부가 함께 장수와 복록을 누린 것을 축하하는 매우 특별한 의례였으며, 평균 수명이 길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효를 국가의 주요한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실에서도 회혼례를 권장하고 축하했다. 이를 뒷받침 하는 사례들이 전해지는데,『조선왕조실록』에는 회혼례에 필요한 물건을 내려 축하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백남주 큐레이터

고종 20년(1883) 1월 14일에는 봉조하 강노(姜㳣)의 회혼례에 “필요한 물건과 내외의 옷감, 음식물을 호조로 하여금 넉넉히 실어 보내고 별도로 예조 낭관을 파견하여 문안하고 오게 하라”는 기록이 있고, 영조 45년(1769) 6월 11일에는 임금이 “사서(士庶)로서 회혼례를 낸 사람들을 소견하고 각각 주백(紬帛 : 명주와 비단)과 고기를 내려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국가가 회혼례를 축하하여 음식과 물품을 내린 것은 비단 고위 대신들의 회혼례만은 아니었고, 일반 백성 중에서 회혼례를 맞은 사람들에게도 명주와 비단, 고기를 내려 축하했다.

회혼례를 참석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하객과 친지들은 열두 폭 병풍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였는데, 이 병풍을 만인병(萬人屛)이라 불렀다. 이 병풍에 서명을 하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어, 회혼 잔치를 한다는 소문만 들으면, 하객들은 아무리 먼 곳이어도 반드시 찾아가서 서명을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조선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윤진영, 다섯수레, 2015),

조선왕조실록(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조선후기 평생도 연구(최성희,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한국일생의례사전(국립민속박물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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