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조석진 外, 1900년, 비단에 수묵채색, 110.5cm×61.8cm, 보물 932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채용신·조석진 外, 1900년, 비단에 수묵채색, 110.5cm×61.8cm, 보물 932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조선 21대 왕인 영조(1694~1776) 임금의 모습을 그린 어진이다.

영조는 조선의 역대 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임금으로, 각 방면에서 조선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국왕이었다.

그는 탕평책을 써서 붕당의 대립을 완화시키고, 균역법을 실시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浚渫)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영조는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스스로도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다.

영조는 어진 제작에도 매우 적극적인 왕이었다. 재위 기간 중 여섯 차례에 걸쳐 모두 12본의 어진이 제작된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아쉽게도 왕위에 오르기 전의 모습을 그린 <연잉군 초상>과 여기에 소개하는 51세 때의 <영조 어진> 두 점만이 전해진다.

51세의 모습을 그린 <영조 어진>속 영조는 검은색 익선관을 쓰고,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은 모습으로 왼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이 어진은 반신상으로 제작되어 전신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매우 아쉬운 작품이다.

고종 임금 재위 중인 광무 4년(1900년) 10월 13일 화재가 발생하여 경운궁 선원전 제3실에 봉안되었던 영조 어진과 제7실에 보관하고 있던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효명세자)의 어진이 모두 소실되자 이를 대대적으로 모사하게 되었는데, 51세 <영조 어진> 역시 이때 다시 그려졌다.

<영조 어진>은 채용신(蔡龍臣, 1850~1941년)과 조석진(趙錫晉, 1853~1920년) 등이 범본을 보고 이모(移摸)하였는데, 채용신은 도화서의 화원이 아니었지만, 실력 있는 사람들을 외부에서 추천받아 어진을 그렸던 전통에 따라 주관 화사로 조석진과 함께 선발되어 <영조 어진>의 제작에 참여했다.

<영조 어진>의 범본이 된 어진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毓祥宮) 내 영조가 제사를 준비하던 집인 냉천정(冷泉亭)에 봉안했던 초상화이다.

범본으로 삼은 어진은 영조 20년(1744)에 당시의 도화서 화원이었던 장경주(張敬周, 1710~?)가 주관화사로, 김두량(金斗樑, 1696~1763)이 동참화사가 되어 그린 것이다.

이 어진은 영조가 생모를 곁에서 모신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걸어 둔 초상화였고, 진전에 봉안하던 용도가 아니었으므로, 전신상이 아닌 약식의 반신상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사된 어진 속 영조의 얼굴빛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도화색으로 채색되었고,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의 윤곽은 진한 갈색으로 그렸다. 또 날카로운 콧날과 콧방울도 입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이목구비보다 더 뛰어나게 표현된 것이 수염인데, 해당 부위에 먼저 얼굴색을 칠한 뒤, 그 위에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해 흰색으로 수염을 그렸다. 예리한 눈매와 높은 콧등이 왕자이던 시절에 그려진 <연잉군 초상> 속 영조의 모습과 닮아 있다.

옷자락을 그릴 때 외곽선을 그리지 않고 면으로만 채색하여 다시 그려진 19세기말의 유행 했던 초상화 양식을 따랐다.

일례로 곤룡포 위에 착용하던 대(帶)의 위치가 앞가슴 보(補)쪽으로 올라가게 그린 것은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화면 우측에 “영조대왕어진 광무사년경자 이모(英祖大王御眞 光武四年更子 移摸)”라는 표제가 있는데, 이 표제는 고종 황제가 직접 쓴 것이다.

어진은 북송의 유학자 정이(程頤, 1033~1107)가 말한 것처럼 ‘터럭 하나만 달라도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원칙에 따라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를 기본으로 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 조선 시대에는 어진 제작이 결정되면 먼저 도감을 설치하였고 어진 화사를 결정하였다.

제작 방식은 초본(草本)제작, 상초(上綃), 설채(設彩), 장축(粧軸), 표제(標題)의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초본은 밑그림을 말하는데,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리는 도사(圖寫)의 경우에는 왕이 마음에 들어 할 때까지 초본을 여러 본 제작했다.

초본이 완성되면, 그 위에 비단 천을 겹쳐 놓고, 비단 위로 비쳐 보이는 형상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상초 작업을 했다. 상초가 끝나면 채색 작업인 설채를 했는데, 이 때 비단의 뒷면에서 채색을 하는 배채(背彩)를 먼저하고, 다음으로 비단의 앞면에서 채색을 했다.

이렇게 배채를 하는 까닭은 자연스러운 발색 효과를 낼 수 있고, 시간이 경과해도 안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채색이 끝나면 어진 뒷면에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바르고, 위 아래로 축을 달아 족자 형태로 꾸민 다음, 화면 위에 어진의 주인공과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표제를 썼다.

이렇게 완성된 어진을 진전 또는 궁궐 내외의 특정한 장소에 봉안하면 어진 제작은 마무리된다. 어진 제작이 모두 마무리되면, 어진 제작과 봉안 과정에 참여했던 관리와 화원 및 장인들을 포상했다.

【참고문헌】

어진에 옷을 입히다(박성실, 민속원, 2016)

어진의궤와 미술사(이성미, 소와당, 2012)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10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국립고궁박물관, 2015)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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