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이란 무엇인가

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뉴스퀘스트=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이번 칼럼은 성품(性稟)에 대한 내용이다.

같은 산맥으로 이어짐에도 높이 솟아 있는 준엄한 산이 있고, 위태롭게 능선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험한 악산(岳山)도 있다.

같은 땅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윤택하고 비옥한 평야가 있는가 하면, 볕이 잘 들지 않고 물이 고이지 않는 척박한 토양도 있다.

사람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같은 사안에 대하여 이를 긍정하며 극복하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 같은 상황 자체를 억울해하고 부정하면서 신세 한탄이나 하며 심지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다.

명심보감 순명(順命) 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고 부(富)를 통해 귀(貴)해짐은 하늘의 뜻에 있다. 만사에 나뉨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덧없는 인생들이 스스로 공연히 번잡하도다.” 子曰 死生有命 富貴在天 萬事分已定 浮生空自忙 자왈 사생유명 부귀재천 만사분기정 부생공자망

이 글귀는 마치 죽고 사는 문제는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고 만사에 분수 역시도 정해져 있으니 헛된 욕심을 낼 필요 없이 안분자족(安分自足) 하면서 사는 것이 낫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다른 각도로 이 글이 다가올 수 있다. 태어난 것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듯이 죽는 날이 엄연히 다가올 것이고 삶과 죽음 사이의 인생의 역정은 모두가 자연의 섭리 안에서 주어지는 과정이다.

죽는다는 사실이 정해져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각성 하게 되며 반성적 성찰을 일으키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인생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결코, 돈이 많다고 해서 귀해지는 것은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해서 천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음에도 박(薄)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돈이 없음에도 후(厚)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만사분(萬事分)’이란 단순히 분수 소관이라는 뜻이 아니며 모든 일에는 에너지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건물을 세우는 데에도 에너지가 들어가고 물건을 만드는 행위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만사에 나뉨이 정량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예를 든다면 핸드폰 하나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기술력, 인력, 재화, 이를 위한 인류사에 있어 서의 발전 과정들의 모든 총량이 곧 핸드폰 생산의 에너지에 해당된다.

이를 미시적으로 측정한다면 그 양은 계산할 수 있지만, 거시적으로 측정한다면 그 양을 계산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단순 모형을 세워서 재화의 총량을 계산함으로써 그 변수의 경향성을 읽어 세상을 분석하는 방법을 쓴다.

이러한 모든 행위가 분(分)이라는 단어에 내포돼있는 것이다. 에너지가 정해져 있음에도 우리는 역량 이상의 일을 손대고 싶어 하고 또 노력한 것 이상으로 얻어내고 싶어 한다. “덧없는 인생들이 스스로 공연히 번잡하다.” 浮生空自忙 부생공자망 는 말은 바로 이를 꾸짖는 격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받고 태어난 물리적인 에너지는 유한하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외울 수 있는 양은 유한하다. 암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우는 것은 힘들어하지만 이해력이 빠른 사람도 있다. 지식을 활용하는 데에는 더디지만, 육체노동이나 운동신경에는 영민함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다.

주역 계사전(周易 繫辭傳)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덕이 없으나 지위는 높고, 지혜가 부족한데 도모하는 것은 크며, 힘을 쓸 줄 모르는데, 맡은 임무가 무거우면, 불행을 피할 수 없다.” (德薄而位存 知小而謨大 力小而任重 鮮不及矣)

지식이 높지만, 덕이 없는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운다면 매사에 잔머리로 사람을 부리려고 하거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는 통솔력으로 인해서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될 것이다. 대안이 부족하고 해결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큰 프로젝트를 맡긴다면 그 프로젝트의 앞날은 불투명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근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노 젓는 일을 맡긴다면 그 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상당수의 문제는 바로 사람을 제대로 모르고 스펙과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덕이 있는 사람’, ‘지식보다는 지혜로운 사람’, ‘힘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을 키워내는 교육과 안목이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위의 문구는 이를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근세와 현대사회는 산업화를 통해서 형성된 자본을 시장경제의 토대를 통해서 물질적 발전을 하여왔다.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위해서는 합리적인 사회와 경제 운용 시스템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지혜의 성찰과 덕성의 함양보다는 효과적인 지식체계와 분업화 전문화가 더 절실하게 필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뒷전으로 밀려난 인류 유산인 도덕교육과 교양 등의 인문적 문화의 손실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일례로 인륜 파괴적 범죄는 입에 올리기가 두려울 정도로 잔혹해지고 있다.

각종 매체를 통해서 쏟아지는 사건 사고 보도를 접하고 있다 보면, “저런 범죄 사건은 차라리 보도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품게 할 정도로 잔인하고 민망한 내용이 아주 많다.

필자는 21세기에 들어서 있는 현재와 앞으로의 가까운 미래 시점은 인류사에 있어 가장 큰 전환기라고 보고 있다. 즉 새로운 산업혁명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 같은 급변하는 시대의 큰 변화는 여태까지 인류가 경험했던 양태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AI와 클라우드로 대표되는 기술의 발전은 지식을 큰 체계로 통합시키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각각의 콘텐츠들은 상당 부분 공유를 통해서 시너지를 내게 될 것이다.

이런 류의 변화는 새로운 경제와 문화의 패러다임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면한 문제는 기능적인 지식의 비약적인 발전은 반드시 그에 따른 책임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람의 성품(性稟)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의 성품(性稟) 범위를 벗어난 지식과 물리력은 큰 폐혜를 불러오게 될 수 있다.

후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엄정한 법규를 집행하라고 하는 경우나 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베풀어야 하는 일을 맡긴다면 개인의 재량은 기준 범위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일과 임무의 짐을 감당하지 못한 상태에서 좌절감에 의해 쇠퇴하게 된다.

잘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는 이 같은 사례가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문과 적성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취업과 진학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이과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거나 공학적 적성이 분명한 학생에게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의대를 추천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성품에 대하여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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