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시대 축제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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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이철형(와인나라 대표)] 그리스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AD 46~120)가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매일이 축제다!’ 라고 했고 이를 이어받아 미국의 시인 에머슨(1803~1882)도 ‘삶은 축제다, 단 현명한 사람들에게만!’이라고 했다.

축제의 기원과 그리스 축제에 관한 지난 칼럼에 이어 이번에는 로마시대로 가보자.

로마시대에는 바카날리아(Bacchanalia)라는 축제가 있었다. 바로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의 로마신에 해당하는 바쿠스에 대한 숭배 의례를 통해 그를 기리는 축제였다.

엄밀히는 종교 축제였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종교를 핑계 삼아 당시 사람들이 맘 놓고 즐기자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참가한 신도들은 와인을 마시고 황홀한 상태에서 광적으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행진도 했었다고 할 정도니까…

이 바카날리아는 어떻게 로마에서 생겨났을까? 그 전파와 확산과 부침의 과정을 살펴보자.

에트루리아 지역 (로마 바로 위쪽(짙은 녹색)에서 시작하여 그보다 더 위와 아래쪽(옅은 녹색)과 코르시카섬까지 확산)
에트루리아 지역 (로마 바로 위쪽(짙은 녹색)에서 시작하여 그보다 더 위와 아래쪽(옅은 녹색)과 코르시카섬까지 확산)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과 그 관련 종교가 BC 200년 경에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남부 이탈리아와 로마 북쪽의 에트루리아(오늘날의 토스카나, 움부리아, 라찌오 지역)의 두 경로를 통해 로마에 전해진다.

바카날리아는 로마 남쪽의 캄파니아 출신인 바쿠스 신전의 한 여사제(Paculla Annias)에 의해 로마의 티베르강 하류 아벤티노 언덕(Abentine Hill) 기슭의 삼림 지역에 비밀리에 도입되는데 이곳에는 디오니소스 관련 신화 중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인 세멜레(로마에서는 스티물라(Stimula)라고 불렀다고 함.)의 성소가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평민 거주지역이자 다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고 로마의 토착신으로서 와인과 풍요의 신이자 평민과 자유의 수호신인 리베르 파터(Liber Parter)의 성전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처음 도입되었을 당시에 바카날리아는 이 지역에서는 낮에만, 그것도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1년에 단지 3일만 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반면 로마 북쪽의 에트루리아 지역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참여하는, 와인과 제사와 점술과 축제가 결합된 형태로 이 축제가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앞서 언급한 로마의 평민과 다민족 지역의 종교축제와 결합하면서 한 달에 5번, 밤에 의식을 행하고 남녀노소는 물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 제사와 축제행사가 성 폭력과 성 문란 사태를 야기하게 되었고 입교자가 이 의식에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경우 배교자로 몰아서 제거하는 사태로까지 전개되었다.

오늘날로 보면 사이비 종교화되어 사회 규범과 미풍양속을 해치는 의식 행위까지 하게 된 셈이다. 이것은 당시 로마의 사회규범에도 어긋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상류층과 귀족층까지 이 문화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사회적 문제로 공식화된 것은 당시에 이곳에 초기에 입교했다가 탈퇴했던 한 창녀(Hispala Faecenia)가 배신에 대한 징계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런 사실들을 당시 로마 집정관(Postumius)에게 고발하면서부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집정관이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관련자 약 7,000명을 색출, 체포하여 그들 대부분을 처형하였는데 이런 사실은 로마 역사학자인 리비(Livy)(BC64/59 ~ AD 12/17)의 기록을 통해 전해졌다.

☜ Titus Livius(Livy).
티투스 리비우스 (Livy).

그런데 사실 그는 BC 1세기경의 사람이라서 실제 바카날리아가 로마에 도입되고 융성했던 시기와는 약 200년이라는 차이가 있어 후세의 학자들이 그의 기술 내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여하튼 흥미로운 것은 그 집정관은 BC 186년에, 문제가 된 이 축제를 완전히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일부 규제를 통한 개혁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바카날리아의 규모와 조직, 사제 제도 등을 통제하는 법을 원로원에서 제정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벌규정까지 두었는데 그 규제의 내용은 기존의 숭배 장소와 지부 등은 해체시키고 모임별로 남자 2명에 여자 3명만이 모인 집회이되 그것도 사전에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야 하고 남자가 바쿠스의 사제직을 맡는 것을 금지시키는 식이었다.

이는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민간에서 인습처럼 정착된 것을 지나치게 억누를 경우 지하세계로 들어가서 더 큰 사회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이것을 오히려 양지로 끌어내서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풀이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상황이 정치적으로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 근처까지 쳐들어왔던 2차 포에니 전쟁(BC 218~203)을 통해 심한 위기 상황을 겪은 후라서 땅에 떨어진 지배세력(원로원)의 권위를 되찾고자 원로원이 로마와 그 동맹국들에 대해 시민과 종교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 다른 해석은 이 축제가 원래 여성들 위주로 진행되었던 바 가부장적인 로마의 가족 제도의 규범에 어긋났기 때문에 규제를 했다는 것과 이 축제에 노예와 가난한 사람들까지 참여하게 되어 혁명 세력화하는 것을 당시 집권층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하튼 이렇게 규제를 받게 되어 변경된 축제는 나중에는 리베랄리아(Liberalia) 축제로 통합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바쿠스, 리베르, 디오니소스는 로마 후기 공화정(BC 133년 이후)에서는 동일 신으로 추앙되었고 이들에 대한 신비스런 숭배와 의례는 로마의 초기 황제 시대(BC 27~AD 284)까지도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축제는 로마 식민지까지 널리 퍼져나가서 AD 400년경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카니발과 같은 거리 행진 형태로 변형되어 남게 되었다고 한다.

리베랄리아(Liberalia)는 리베르(Liber)라는, 로마 토착 신화에 나오는 번식과 성장을 주관하는 전원의 신과 그의 부인인 리베라(Libera)라는 신에게 봉헌하는 축제인데 매년 3월 17일에 개최되었다.

토가.
토가.

이 축제는 당시 15,6세(14세라는 설도 있다)의 소년들이 어릴 때부터 악으로부터 보호해준다고 하여 목에 두르고 있던 부적을 떼고 어른들이 입는 토가를 입는 성인식을 겸하는 성격도 띄었다.

이 축제는 행진, 제사, 야한 노래들과 나무에 디오스소스 가면들을 걸어두는 등의 행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리베르는 자유로운 아버지라는 의미의 리베르 파터(Liber Pater)라고도 하는데 케레스(데미테르), 리베라(페르세포네)와 함께 아벤티노 언덕의 세 신중의 하나로 평민들의 수호신이었다.

이 리베르라는 로마 신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동일한 신이고 리베르의 별칭이, 우리에게 익숙한 와인의 신인 바쿠스인 것이다.

자유를 주는 신이니 축제에는 빠질 수 없는 와인을 마시고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런 평민의 신과 대비되는 것이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의 세 신인 유피테르(제우스), 유노(헤라), 아테나(미네르바)로 이들은 귀족들의 수호신이었다. 로마시대에 귀족들이 섬기는 신과 일반 평민들이 섬기는 신이 따로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 바카날리아 등의 축제에 관한 내용들은 벽화나 석관의 부조 등으로 남아 있는데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미술계에서는 야외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흥청망청 거리며 반라 혹은 전라의 모습으로 파티를 하는 장면들로 묘사되어 나타난다.

이런 장면을 그린 화가로는 티치아노, 루벤스 등이 있다. 결국 바카날리아의 의식과 이야기가 미술 작품으로 승화된 것이다.

판(Pan) 조각상 앞에서의 바카날리아 니콜라스 푸생작 (Bacchanal before a Statue of Pan, 1631–1633)
판(Pan) 조각상 앞에서의 바카날리아 니콜라스 푸생작 (Bacchanal before a Statue of Pan, 1631–1633)
안드로스 사람들의 바카날리아 티치아오 베첼리오 작 (The Bacchanal of the Andrii 1523~26년, 유화)
안드로스 사람들의 바카날리아 티치아오 베첼리오 작 (The Bacchanal of the Andrii 1523~26년, 유화)

인생에서 축제는 중요하다. 개인적, 사회적 에너지 충전의 근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쾌락 그것도 사회의 집단적 유흥도 좋으나 개인적, 사회적 건전성의 한계선을 넘지 않는 선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고 그 건전성의 기준도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축제의 사회적 건전성의 경계선은 어디까지 일까?

오늘날에는 과거 로마시대처럼 건전한 사회적 규범을 무너뜨릴 정도로 무어라 마셔라 하면서 흥청망청대는 식의 바카날리아는 아니지만 유쾌하게 놀고 즐기는 개념의 축제 명칭으로 바카날리아가 여전히 활용되고 있기는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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