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석태문(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우리나라 지폐는 4종이 있다.

1천원 권은 퇴계 이황, 5천원 권은 율곡 이이, 1만 원 권은 세종대왕, 지폐 수명 10년을 갓 지난 최고액면 은행권인 5만원 권의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은 국내 지폐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지폐의 등장인물이란 점에서 우리나라 지폐사에서 율곡 가문은 지폐 명문가라 할 것이다.

한 나라 지폐의 등장인물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다방면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던 당대의 거물이다.

베트남의 지폐.
베트남의 지폐.

베트남의 지폐는 어떨까?

현재 베트남에서 사용가능한 지폐는 총 12종이다. 100동에서 50만동까지 분포가 다양하다. 시중에서 거래되는 지폐는 500동에서 50만동까지 10종이다.

100동, 200동은 사진으로만 봤지 시중에서는 보지 못했다. 베트남 돈(동)의 가치는 우리 돈의 약 20분의 1이다.

100동은 5원, 200동은 10원이니 현 물가수준에서는 거래하기 힘든 화폐 단위이다. 작은 마트나 가게는 500동 지폐도 받지 않거나 거스름으로 사탕 하나를 주기도 한다. 이 추세라면 500동 지폐도 조만간 시장에서 자취를 감출지 모른다.

베트남의 12종 지폐 인물은 모두 호치민이다. 한 인물로 12종을 채웠다는 것이 한국인의 심성으론 믿기지 않는다. 내 세울 인물이 없어서 그랬나, 베트남 조폐공사가 인물 선정 작업을 귀찮아했던 것인가.

한국에서는 한 가문의 인물이 두 번 등장하는 것에도 만만찮은 거부감을 드러냈지 않았던가. 그런 필자에게 12종 지폐의 주인공으로 호치민을 선택한 베트남의 지폐정책은 의문이자, 흥미꺼리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지구촌의 지폐를 들여다보면, 베트남과 같은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권, 입헌군주국가, 이슬람 왕정국가는 건국 지도자, 현존 왕이 지폐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한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폐의 앞에, 뒤는 찰스 다윈, 윈스톤 처칠, 아담 스미스 등 당대를 대표한 인물로 채워졌다. 몽골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을 내세웠고, 말레이시아는 현 국왕이 등장한다. 입헌군주국, 왕정국가는 현왕 중심이니, 왕이 바뀌면 지폐 인물도 바뀐다. 몽골은 징기스칸의 위대성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징기스칸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1990년까지 소수민족과 정치지도자들이 함께 지폐에 등장했다. 1991년 이후에는 모든 지폐가 모택동으로 바뀌었다. 소수민족을 우대하던 지폐인물 정책이 자본주의 성장이 본격화되자 사회주의 체계를 수호하려는 의도로 건국자 우대 지폐정책으로 바뀐 것이다.

호치민은 1억에 육박하는 인구를 가진 베트남에서 가장 서민적 지도자, 동네 아저씨 이미지로 그들 앞에 다가섰던 유일한 지도자이다. 호치민은 50개 이상의 가명과 160개가 넘는 필명을 사용하며 종횡무진의 삶을 살았다.

그는 국민들에게 ‘호 아저씨’로 불리기를 원했다.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했던 필자 세대에게 호 아저씨 이야기는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할 정도로 감동 그 자체였다. 사람의 삶은 사진에도 담긴다고 했다.

그의 사진 중에는 베트남 전통의상을 입고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이 있다. 깡마른 체구의 호치민. 자애로운 눈빛으로 사람을 보는 모습이다. 이 사진의 얼굴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대변하는 전쟁과 정치의 인물이 아니다. 우리 마을 옆집에 살고 있는 호 아저씨다. 주면서도 눈곱만큼도 받겠다는 기대가 없는 부모님의 마음이 담긴 표정이다.

호치민 광장의 묘소.
호치민 광장의 묘소.

호치민은 1890년 베트남 중북부의 응우안(Nghe An)성의 깜리엔(Kim Lien)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깜리엔은 어머니의 고향 마을로 호치민은 유년을 여기서 보냈다.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유교기반의 지방관리 출신이어서 유교적 품성이 몸에 배였을 것이다. 베트남 최초의 통일 왕조인 응우엔 왕조의 수도인 훼(Hue)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학교의 교사도 잠시 했다.

프랑스 식민치하에 살았으나, 이때까지는 특별히 독립 운동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베트남 노동자가 파업을 벌일 때 호치민은 프랑스 관료와의 협상 통역자로 참여한다.

통역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는 이유로 프랑스 관료에게 뺨을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이 호치민에겐 항프 활동, 조국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치민은 훼를 떠나 다낭에도 잠시 머물렀다. 사이공(통일 후 호치민으로 개칭)에서 주방보조로 요리를 배웠다. 호치민은 1911년 스물한 살 청춘의 나이에 조국을 떠났다. 호치민의 풍찬노숙 삶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먼 이국에서 조국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조국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식민의 땅 베트남을 구하게 될 모티브를 얻었다. 그는 힘들었지만 베트남 국민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프랑스 증기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요리사로 근무하며 3년간 유럽 여러 나라를 다녔다.

그가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힌 시기였다. 3년간(1914~17년)의 영국 런던 밑바닥 생활도 경험하면서 그의 사고는 한층 성숙해졌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호치민은 파리에 정착한다.

호치민의 집무실.
호치민의 집무실.

28세의 청년 호치민이 마주한 전후 처리과정은 그가 지적, 사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장차 베트남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기회가 되었다.

1919년 6월 베르사이유 강화회의가 열릴 때 전 세계의 약소국 대표들은 자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파리에 모였다.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 선생을 만난다. 그는 김규식 선생과 거의 매일 만났다고 한다.

김규식 선생에게서 해박한 세계정세 이야기, 백인 중심의 서방 제국주의, 무자비한 약소국 침탈, 억압과 차별의 실상을 들었다. 처음엔 단순히 선진국에 청원하는 수준의 부드러운 투쟁을 염두에 두었던 호치민은 김규식 선생을 만나면서 달라졌다.

호치민이 매일 아침 읽었다는 목민심서도 김규식 선생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호치민은 정치범 석방, 집회·결사의 자유 등 베트남 인민의 자결을 촉구하는 '조국 해방을 위한 8항목'을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8항목으로 인해 그는 베트남 지식인 사회에 이름을 알린다.

이후 호치민은 해외와 국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국의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21년에는 프랑스 식민지 인민연맹을 창설하여 약소국간 협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중국 남부와 태국 등 베트남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최초로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였고, 중국에서는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하여 청년교육에 집중하였다. 이런 사회주의 정치 활동으로 1931년 6월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된다.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3년 석방된 뒤에는 모스코바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호치민은 조국을 떠난 지 30년만인 1941년 베트남에 돌아온다. 조국 해방을 위해 베트남 독립연맹을 결성하면서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호치민(胡志明)’은 ‘깨우치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60개가 넘는 그의 이름에서 마지막에 깨우치는 사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평생 동안 전력을 다해 배우고 익힌 사람이었지만 ‘세상에는 배워야 할 일은 너무나 많은데 나는 여전히 작기만 하다’는 겸양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호치민은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러시아어, 그리고 중국의 3개 방언에도 능통하였던 영민한 사람이었다. 끝없는 향학열과 유교집안에서 자란 겸양지덕(謙讓之德)이 호치민이란 이름을 짓게 하였을 것이다.

21세 청년의 나이에 조국을 떠나, 51세의 장년이 되어 마주한 조국은 여전히 식민치하에 있었다. 국제 정세는 급박했다. 2차 세계대전은 조국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일본의 패망을 예상한 호치민은 친미·친중 활동을 펼친 끝에 베트남독립연맹이 임시과도정부 승인을 얻기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2월 호치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주석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1954년 프랑스와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열강의 간섭으로 독립국가 수립은 쉽지 않았다.

결국 제네바 회담에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고 만다.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한 호치민은 “우리는 폭격 위험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간절히 통일 조국을 염원하였다.

그러나 1969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 불귀의 객이 되면서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호치민의 소원은 1975년 4월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자력 통일로 성취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호치민은 자긍심의 원천이다. “너희들 미국 이겨봤어?”, “너희는 국부가 있어?”두 가지 질문에 모두 자신 있게 답할 나라가 어디일까? 쉽지 않은 질문을 쉽게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 베트남인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강 국가 미국을 이긴 나라, 1억에 가까운 국민 모두가 ‘호치민은 우리의 국부다’라고 외칠 수 있으니 말이다.

호치민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완결된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란 평가가 일치하기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프랑스 관리에게 얻어맞은 뺨 사건이 그의 독립투쟁의 시초였다.

그는 구소련을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여겼다. 중국은 베트남 공산당을 지원해준 형님쯤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현존하는 최강의 패권국가임을 잊지 않았다. 이들 세 나라의 비위를 맞추고 손잡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 조국 베트남 독립에 불가피한 나라들이었고, 이들의 실질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호치민에게 이념은 조국 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호치민을 평가하는 단어들도 많다. 민족주의, 혁명, 평등, 자유, 유교적 윤리 등 다양한 단어들이다.

모두 20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치열하게 다투었던 핵심가치들이다. 그러나 호치민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로 서(恕)에 주목한 사람도 있다. 용서하고, 헤아려 동정하고, 깨닫고, 밝게 알게 된다는 뜻이다.

서(恕)는 동양의 언어이기에 서양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호혜(reciprocity)가 적당하다고 한다. 호혜는 가족, 작은 마을 공동체에서 가능한 개념이다. 가족 간에, 함께 사는 마을 주민 간에는 내가 가진 것을 주었다고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웃이 어려움에 처하면 자연스레 부조하는 것이 호혜이다. 호혜적 활동이 호치민이 수행한 독립운동이자, 공동체 정신, 민족주의 사상의 발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공공기관 작은 회의실의 호치민 흉상.
공공기관 작은 회의실의 호치민 흉상.

하노이에 가면 호치민 광장이 있고, 호치민 묘소가 있다. 생전에 그가 주석으로 집무했던 주석궁과 작은 집무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관공서나 공공기관의 사무실, 회의장에는 필수품처럼 흉상이나 동상이 있다. 호치민 박물관이 세워져 있는 지역도 적지 않다.

통일정부는 사이공시를 호치민시로 이름을 바뀌었다. 그가 베트남 독립을 이끈 국부이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베트남인들에게 호치민은 한없이 자애로운 아버지이고, 아무리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영원한 스승이다.

민족주의자로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는 베트남인들에게 대가 받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이웃 아저씨인 ‘호 아저씨’(Bac Ho=박호)로 불리기를 원한 그의 바람에 따라 베트남 사람들은 그를 주석이라 하지 않고‘박호’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했던 일이 아무리 많아도 돌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자신을 기억하지 말라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다른 나라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그는 거대한 묘소에 생전의 모습으로 안장되어 있다.

세상에는 국부 반열에 올랐지만 감히 국부라 칭하기 어려운 지도자도 적지 않다. 모택동은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의 오점이 있다. 흑묘백묘론의 실용주의자 등소평은 천안문 사태의 아픔이 있다.

필자의 상식 부족으로 적합한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떨까?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또 박정희·김대중 두 분 대통령을 더하여 국부를 가릴 수 있을까?

훼(hue)시의 호치민 박물관.
훼(hue)시의 호치민 박물관.

묘한 대비가 떠오른다.

호치민 사후 6년 뒤에 베트남은 통일 조국을 이루었다.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왜적이 퇴각하였다.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같은 듯 다른 점도 많아서 두 영웅의 죽음을 직선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생전에 두 영웅의 삶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충효와 애민, 민족주의, 그리고 똑같이 가졌던 실용주의 사고는 몇 백 년의 시공 차이에도 일치하는 가치들이다.

베트남 경제가 날개를 날았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가장 큰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베트남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나라이다. 한-베 두 나라의 경제협력이 극대화하고 있다.

한반도와 베트남의 두 영웅이 추구했던 실용과 애민사상은 좌우 이념 알력을 넘어서는 가치들이다. 실용과 애민·애족의 한반도를 위해 호치민의 나라, 베트남이 주고 있는 교훈을 되새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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