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너리 병입

[뉴스퀘스트=이철형(와인나라 대표)] 4차 산업 혁명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과거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사회 한 켠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지혜를 발휘하면 틀림없이 모두가 공생하는 것이 가능하다.

과거처럼 한 쪽이 얻으면 다른 쪽이 무조건 잃어야 하는 제로섬 게임의 시대가 아니라는 얘기다.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사회적 부가 나름 충분히 축적되어 있기에 조금의 지혜만 발휘하면 충분히 사회적·경제적 공생으로의 이행이 가능한 시점이다.

그래서 혹시나 영감과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과거 와인 산업에서 일어났던, 전반적인 시스템의 변화를 가져온 사건들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 변화는 지금은 당연시 되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혁신이었고 개혁이었다.

와인을 마시면서 와인을 용기에 담는 작업은 어디서 이루어지는 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마트나 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우리들이 먹는 농산물들은 수확한 후 어디서 소량으로 나누어 포장이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 그다지 궁금하지 않는 이유는 원산지 표기를 믿고 그 세척 공정, 포장 과정 등 전반적인 유통 과정에서의 위생 상태가 안전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뉴스에서 보면 중국산이 국산으로 속칭 포대갈이를 통해 원산지가 바뀐다고 한다. 게다가 유통과정에서 품질이 변질된 경우도 심심찮게 뉴스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의외로 식품에서 가짜 논쟁과 위생 논쟁은 상존함을 알 수 있다.

와인 산업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와인의 역사를 보면 와이너리에서 직접 와인을 와인병에 담기 시작한 것은 불과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1924년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이 부착한 라벨.
1924년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이 부착한 라벨.

1924년 샤토 무통 로칠드의 오너인 고(故)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이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내가 만든 와인은 내 와이너리에서 병입하여 내가 직접 내 라벨을 부착하여 판매한다’라는 철학을 실천하기 전까지는 소위 네고시앙이라는 중개상들이 병입을 했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세계적으로 와인을 수출했던 프랑스 보르도에서 조차도 병입은 네고시앙들이 했다.

보르도의 경우 1855년 파리 박람회를 계기로 나폴레옹 3세의 명에 따라 보르도의 그랑 크뤼 와인 등급을 5개의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이 각 와이너리의 와인들의 병입은 1920년대 중 후반까지도 이들 각 와이너리들의 와인을 판매해주는 네고시앙들이 병입을 했다던 것이다.

네고시앙들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었는데 그들이 공통적으로 한 일은 병입이었다. 병입을 제외한 자신 명의의 포도원 소유 유무와 직접 양조 유무를 기준으로 네고시앙의 유형을 나누어 보면 크게 4가지가 된다.

첫째 자신의 포도원도 없고 양조도 하지 않고 포도원에서 양조한 와인을 가져다가 블렌딩하여 자기 브랜드로 팔거나 특정 포도원에서 양조한 와인을 그대로 병입만 하여 해당 포도원의 브랜드로 판매하는 경우, 둘째 자신의 포도원은 없지만 포도 재배자로부터 포도를 구매하여 네고시앙이 직접 양조하여 병입하여 자신의 브랜드로 판매하는 경우, 셋째 자신의 포도원을 가지고 거기서 수확한 포도로만 자신이 직접 양조하여 자신의 브랜드로 판매하는 경우, 넷째 자신의 포도원의 포도는 물론 다른 포도 재배자로부터 포도를 구매하여 자신이 직접 양조하여 자신의 브랜드로 판매하는 경우다.

이 네 가지 유형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매우 다양한 유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스템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특히 특정 포도원이 양조한 와인을 오크통 채로 가져다가 네고시앙의 건물에서 병입하여 판매할 경우 그 특정 포도원의 브랜드로 판매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포도원의 와인을 블렌딩하여 수량을 늘려서 파는 경우 달리 확인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최종 생산 와인의 원료의 원산지와 품질과 생산자에 대해 네고시앙이 부정을 저지르고자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칫하면 정품이 아닌 가짜를 진짜인 줄 알고 구매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빨간 원 안에 빨간 밑줄 친 부분이 샤또 병입 표시. ( mis en bouteille au Chateau =bottled at the Chateau)
빨간 원 안에 빨간 밑줄 친 부분이 샤또 병입 표시. ( mis en bouteille au Chateau =bottled at the Chateau)

이렇게 당시 유통대자본이었던 네고시앙들이 장악한 와인 유통 시장시스템에 대해 반기를 들고 개혁에 나선 개혁가가 바로 샤토 무통 로칠드의 20대의 팔팔한 젊은이였던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이었다.

그가 직접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병입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과연 대자본이었던 네고시앙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당연히 기존 유통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니 네고시앙들의 반대와 협박이 많았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럼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했을까? 당시만 해도 아직 샤토 무통 로칠드는 1855년 그랑크뤼 등급 분류 기준에 따르면 지금처럼 1등급이 아니라 2등급에 불과했기에 발언권도 그다지 크지 않았을 때다.

그는 당시에 4개의 1등급 와이너리들(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 샤토 오브리옹, 샤토 마고)과 소떼른의 1등급인 샤또 디켐의 오너들을 설득했다. 앞서 언급한 가짜 와인의 가능성과 소비자 보호라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그 결과 그 보다 훨씬 나이 많은 다른 1등급 오너들이 그의 말을 인정하고 그의 의견에 따라 각자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자신들이 직접 병입하는 것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1등급 와이너리들이 모두 그러겠다고 하니 속으로는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네고시앙의 입장에서도 달리 반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반대하면 자신들이 그 동안 실제 생산량을 속여왔거나 향후 속여서 병입하겠다는 의심을 살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당연시 되는 라벨에 적힌 “샤토 병입(=Mis en Bouteille= Bottled at the Estate)”이 생겨났고 지금은 아주 소규모의 와인 생산자나, 포도 재배자를 제외하고는 전부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병입하는 것으로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 샤토 병입은 와인 생산의 전 과정을 와이너리가 직접 책임지고 통제 관리한다는 의미이자 진품의 신뢰성에 대한 메시지를 소비자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네고시앙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단순 중개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거나 양조를 원하지 않는 단순 포도재배자나 소량의 양조를 하는 와이너리들의 와인을 모아서 양조하고 블렌딩하여 판매 유통을 대행해주거나 네고시앙 자신의 브랜드로 판매하는 역할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와이너리의 샤토 병입과 상관없이 공존하고 있다.

관례처럼 익숙하고 당연한 것을 당연시 하지 않는 발상의 전환은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또 그렇게 해야 인류사가 발전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근본적으로 다수가 혜택을 보는 방식으로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의 개혁이 결국은 와인 산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수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공생의 개혁 방안을 찾는 것, 그러한 원리가 우리 사회의 갈등해소에도 적용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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