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초상' 작자 미상, 18세기 이모, 비단에 먹과 채색, 89.7cm×67.6cm, 국보 제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시열 초상' 작자 미상, 18세기 이모, 비단에 먹과 채색, 89.7cm×67.6cm, 국보 제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반신 초상이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송시열은 유학자들의 상징인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幅巾)을 썼으며,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얼굴은 선묘(線描)를 주로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선의 짙고 옅음으로 얼굴의 부분을 나누었다. 얼굴의 울퉁불퉁한 외곽선과 깊게 패인 주름은 마치 높은 산맥의 줄기를 그린 것처럼 보이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눈썹은 터럭 한 올 한 올을 정치하게 묘사하였다.

눈은 크게 뜨지 않았지만 검은색의 세필로 속눈썹과 눈매를 선명하게 그렸고, 눈동자는 윤곽을 그리지 않고 옅은 회색으로 수정체를 칠했으며, 동공은 짙은 색으로 칠한 후 흰색 안료를 점으로 찍어 생생한 눈빛을 연출하였다.

수염은 얼굴을 채색한 이후에 그렸는데,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백색의 선으로 풍성하게 표현하였고, 수염 아래의 턱 선은 그리지 않았으며, 입은 수염에 감추어져 두툼한 아랫입술만 보인다.

머리에 쓴 복건은 평면적으로 표현하였고, 입고 있는 심의의 옷 주름은 같은 굵기의 선으로 윤곽만 표시하였다.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옷의 주름을 묘사한 까닭에 송시열의 안면 특징인 큰 얼굴, 깊고 많은 주름, 초승달 형 눈썹, 주먹코, 두텁고 큰 입술, 큰 귀가 더욱 강조되어 시선을 집중시킨다.

송시열은 생전에 정승의 자리에 올랐지만, 후대에 그린 초상화는 거의 심의를 입고 복건이나 사방관을 쓴 유복 차림의 초상화뿐이고, 관복이나 공복을 입은 초상화는 없다.

그 이유는 송시열이 공자, 맹자, 주자와 같이 자(子)를 붙여 ‘송자(宋子)’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에 조선 유학의 총수로 추앙받았기 때문이다.

심의는 유교의 법복으로 조선 중기 이후 유학자들이 즐겨 입었던 겉옷이었다. 심의는 외형적으로 상의와 하의가 서로 연결된 한 벌의 옷으로 각 부분의 형태에는 유교의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각 학파 별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에 차이가 있었고, 심의에 대한 해석도 학파 별로 달라서 노론은 깃이 직선인 직령심의(直領深衣)를, 기호남인과 소론은 깃 모양이 사각형인 방령심의(方領深衣)를 입었다.

이 그림의 화면의 위 중앙 부분에는 정조가 지은 찬시가 예서로 씌어있다. 정조는 정조 2년(1778) 3월에 이 시를 짓고, 송시열의 초상이 봉안된 사당에 승지(承旨)를 보내 제를 올렸다.

절개와 의리는 천년 세월이 흘러도 고상하여

평생 동안 나는 존중하였다.

역대 임금들도 누차 칭찬하고 높이 평가하였으니

사림(士林)인들 어느 누가 공경하지 않겠는가?

종횡무진으로 내뱉는 말씀은 모두 이치에 합당하여

아름답게도 학문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천하를 다스릴 원대한 계획을 펼치지 못하고

아!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다데.

한양의 사당에

엄숙하고 고고한 선생의 초상화가 있어

젊은 유생들이 모두 참배하러 갈 때에

승지가 한잔 술을 올린다.

1778년 바쁜 국정에 틈을 내어 글을 짓다.

정조가 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이 초상화의 제작 시기는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완성도가 높아 임금이 보시기 위해 어람용(御覽用)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초상화의 오른쪽 상단에는 송시열이 지은 자경문(스스로 삼가고 경계하는 글)이 해서로 씌어있다. 이 글은 송시열이 45세 때, 흠모하던 주자를 따라 지은 자경문으로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에「서화상자경(書畫上自警)」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고, 송시열의 다른 초상화에도 같은 글이 씌어있다.

자연 속에서 사슴들과 함께 지내며/ 초가집에서 사누나.

창문은 환희 밝고 주위가 고요할 때/ 주린 배 참으면서 책을 보았다네.

네 모습 볼품없고/ 네 학문 텅 비었구나.

천제(天帝)의 진실한 마음을 어기고/ 성인의 말씀 업신여겼으니

너는 단언하건대/ 책벌레구나.

1651년 우옹(尤翁)이 화양서옥에서 직접 글을 짓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다.

- 정조가 쓴 어제와 송시열이 지은 자경문은 『조선시대초상화』I, 국립중앙박물관, 2007, 201쪽에서 인용

현재 전해지는 송시열의 초상은 20여점으로 조선 시대에 그려진 단일 인물 초상으로는 가장 많은 수량이다.

이는 송시열이 복권되고 나서 1744년에 문묘에 배향된 이후, 송시열을 기념하는 서원과 영당이 매우 많이 설립되었고, 그의 초상을 봉안하려는 수요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호는 우암(尤庵)이다. 그는 27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2년 뒤인 1635년에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봉림대군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던 송시열은 병자호란 이후 청과의 화친이 이루어지자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다가, 효종이 즉위한 후 조정에 돌아가 왕을 도와 북벌파로 활약했다.

하지만 효종이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다시 낙향하여 재야에 머물렀다. 그의 몸은 비록 재야에 머물렀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강했다.

1689년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후의 경종)로 책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그는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로 인해 정국을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복권되었고, 1744년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을 공인받게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조선 후기 심의 초상 연구(심경보, 고려대 대학원 석사논문, 2014)

조선시대초상화1(국립중앙박물관, 한국서화유물도록 제15집, 2007)

한국 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편(국립민속박물관, 2017)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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