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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⑥] 경북-조선시대 최고의 백과사전을 만든 권문해 (2)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⑥] 경북-조선시대 최고의 백과사전을 만든 권문해 (2)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19.08.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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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1556년 스물세 살이 된 권문해는 경북 안동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퇴계의 문하에 있던 서애 류성룡, 학봉(鶴峰) 김성일 등과 친교를 맺고 평생에 걸쳐 우정을 나누었다.

퇴계는 권문해에게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손수 써주면서 학문에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숙흥야매잠」은 중국 송나라 때 학자 진백(陳栢)이 지은 것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부지런히 수양하라’는 심신수양의 구체적 실천방법을 제시한 글이다.

퇴계가 손수 적은 글을 제자에게 내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퇴계는 권문해의 자질을 알아보고 기대를 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 불교, 도교를 통섭적으로 수용하다

156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한 권문해는 1562년 겨울 안동 향교의 교수로 있을 때 계상서당으로 퇴계를 찾아가서 한 달 동안 머물기도 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스승을 기리는 일에 적극 참여했다.

1573년 2월,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퇴계의 묘비 세우는 일을 의논했으며 3월에는 퇴계를 모실 여강서원을 세우는 문제를 논의했다. 9월에는 도산서당에 가서 도산서원을 세우는 문제를 상의했다.

1575년 2월에는 경상감사 김계휘에게 퇴계가 편찬한 『이학통록(理學通錄)』을 간행할 것을 요청했다.

권문해는 서경덕의 제자 허엽(許曄)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퇴계와 허엽은 같은 동인(東人) 계열이었지만 성리학에 대한 관점은 서로 달랐다.

이기론(理氣論)을 펴는 데 있어서 퇴계는 이(理)의 우위를 주장하는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이었고, 허엽은 이와 기를 일원적으로 파악하고 기의 작용을 강조하는 주기론(主氣論)의 입장이었다.

권문해가 퇴계와 허엽에게 가르침을 받을 무렵에는 성리학의 이론적 갈래가 뚜렷하지 않았다.

주리론과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문적 논쟁이나 토론도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학문적 관점에서 보면 권문해는 유학을 공 부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성리학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권문해는 성리학에 관한 뚜렷한 저술이나 이론을 남기지도 않았다. 때문에 권문해가 퇴계와 허엽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성리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학문적 관심 때문으로 짐작된다.

사상적 성향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스승으로 모심으로써 자신의 학문적 영역을 넓히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권문해는 용문사에 들어가서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불교의 사상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권문해는 유교와 불교를 서로 비교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풍속과 설화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불교를 이단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려를 부정하면서 탄생한 새로운 조선왕조의 엘리트들이 고려의 국가이데올로기였던 불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신 도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입장을 보였다.

도교의 특징으로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과 변화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꼽을 수 있다. 학문에 대해 열려 있던 권문해는 유가적 입장을 바탕으로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을 통섭하는 방식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권문해가 세워 심신을 수양하던 예천 초간정의 여름 및 가을 풍경.
권문해가 세워 심신을 수양하던 예천 초간정의 여름 및 가을 풍경.
권문해가 세워 심신을 수양하던 예천 초간정의 여름 및 가을 풍경.
권문해가 세워 심신을 수양하던 예천 초간정의 여름 및 가을 풍경.

권문해는 학문에 있어서는 유교, 불교, 도교를 통섭적으로 수용했지만, 관직에 있을 때는 유교적 가치인 절의와 명분을 중요하게 여겼다.

언관으로 있을 때는 옳지 않은 것을 보면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을 유지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의 존중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가까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측면도 있었다.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권문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대부가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는 공정하고 정직해야 한다. 요즘 권력에 아부하는 일은 점점 많아지는데 충성스럽고 곧으며 청렴한 풍속은 차츰 사라지고 있다. 나는 이를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언관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시비를 공정하게 가려야 한다. 그런 이후에 사람의 기본도리와 법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기쁨을 먼저 따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권문해의 문집 『초간집(草澗集)』에 실려 있는 「연보」에는 그가 관직에 있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선생은 늘 마음을 정직하게 지니고 있으면서 권세에 굴복하는 법이 없었다. 일을 처리할 때는 꿋꿋하고 과감했으며 구차하거나 잘못을 용납하는 법이 없었다. 사물을 파악하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여러 번 헌부에 있는 동안 사람들의 잘잘못을 밝혀냈다. 그렇게 논핵한 것이 50 여 명에 이른다. 조정에서는 훌륭한 간관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했지만 동료들이나 권세 있는 벼슬아치들은 선생을 싫어했다.”

1575년, 청주목사로 있던 권문해는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선왕이었던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고 했다. 그 과정에 대한 논의가 조정에서 벌어지자 권문해는 “임금의 몸은 개인의 몸이 아니므로 권도에 따라서 하시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이처럼 강직한 성격 탓에 권문해는 내직보다는 외직을 많이 지냈다. 외직에 있는 동안에는 각 지역의 학식 있고 덕망 높은 선비들과 교류를 했다.

공주목사로 있을 때는 신분은 낮았지만 학식이 뛰어났던 서기와도 친분을 쌓는 등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교유했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권문해는 대대로 내려온 집안 분위기의 영향으로 의로움을 중시하는 성품이었다.

이런 성격 탓에 청렴한 관리로는 이름을 떨쳤지만 권세가의 눈에는 들지 못해서 크게 출세하지는 않았다. 학문적으로는 퇴계에게 인정을 받고 류성룡, 김성일 등과 친분을 쌓을 정도로 뛰어난 식견을 지녔다.

게다가 가학인 유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대에 유행하던 불교와 도교를 아우르는 풍모도 지녔다. 이처럼 곧은 성품과 높은 학식, 그리고 학문에 대해 열린 자세 등이 어우러져서 『대동운부군옥』이라는 일생일대의 역작을 편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동운부군옥』은 어떤 책인가

제목의 ‘대동’은 ‘동방대국(東方大國)’을 뜻하고 ‘운부군옥(韻府群玉)’은 운별로 배열한 사전이라는 뜻이다. 중국 원나라 때 음시부가 지은 『운부군옥』이 중국의 것임을 상기하면서 『대동운부군옥』은 우리나라에 관한 책임을 밝힌 것이다.

『대동운부군옥』은 권문해가 대구부사(大丘府使)로 있던 1589년(선조 22 년)에 편찬을 완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문해는 20권에 이르는 『대동운부군옥』을 세 질 정서했는데, 그중 한 질은 1591년 부제학으로 있던 김성일이 선조에게 어람시킨 뒤 간행하려고 가져갔으나 임진왜란 때 분실하고 말았다.

또 한 질은 정구(鄭逑)가 빌려갔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나머지 한 질은 권문해의 아들 권별(權鼈)이 가지고 있다가 정산서원(鼎山書院) 원장으로 있을 때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질을 더 정서해놓았다.

대동운부군옥의 편찬 과정이 서술되어 있는 권문해의 자필 초간일기.
대동운부군옥의 편찬 과정이 서술되어 있는 권문해의 자필 초간일기.

『대동운부군옥』은 1798년(정조 22년), 권문해의 7세손 권진락(權進洛)이 정범조(丁範祖)에게 서문을 받으면서 간행을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1812년(순조 12년)부터 간행작업에 들어가서 1836년(헌종 2년)에 완간을 했다. 그 후 여러 차례 복판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초간본은 매우 귀하다.

현재 남아 있는 판본 중에서는 신석호의 소장본이 초간본으로 알 려져 있다. 동일 판각의 후쇄본으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만송문고본(晩松文庫本)이 있다.

『대동운부군옥』의 체제는 권1의 권두에 정범조의 서(序), 김응조(金應 祖)의 발(跋), 홍여하(洪汝河)의 부(附) 해동잡록발(海東雜錄跋), 목록(目錄), 유 목(類目), 범례(凡例), 찬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구성은 평성(平聲) 30운, 상성(上聲) 29운, 거성(去聲) 30운, 입성(入聲) 17운 등 총 106운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량은 1,232엽으로 면수로 따지면 2,464면이다.

『대동운부군옥』의 내용은 지리, 국호, 성씨, 인명, 효자, 열녀, 수령(守令), 선명(仙名), 목명(木名), 화명(花名), 금명(禽名) 등 11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효자와 열녀 항목이 추가로 들어가 있는 것이 중국의 『운부군옥』과는 다른 점이다. 한자에 반절음(反切音) 표시를 하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내용의 구성은 제1운인 동운(東韻)부터 시작해서 ‘동(東)’의 뜻을 2행 협주(夾註)로 달고 ‘동’자를 마지막 글자로 한 숙어(熟語)를 나열하면서 각각의 협주와 그 협주의 출전을 밝혀놓았다.

그 다음은 같은 방법으로 이 한자에 딸린 지리와 인명 등의 유목을 음각(陰刻)해서 표시해놓았고 역시 2행의 협주를 달았다.

1면은 10행으로 되어 있으며 운자와 숙어를 제외한 협주는 모두 작은 글씨로 1행에 20자씩 두 줄을 넣었다. 매 숙어의 마지막 글자로 쓰인 한자는 모두 6,100여 자이며 그 한자의 한글 음은 약 500종에 이른다.

책머리에 있는 「찬집서적목록」을 보면 ‘중국제서(中國諸書: 중국에서 펴낸 책)’로 『사기』와 『한서(漢書)』 등 15종이, ‘동국제서(東國諸書: 우리나라에서 펴낸 책)’로 『삼국유사』,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174종을 참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최남선(崔南善)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활판본으로 『대동운부군옥』을 9권까지 간행하다가 중단한 적이 있다.

신석호의 소장본은 1950년 정양사(正陽社)에서 색인을 붙여 영인본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초판본의 판목(板木)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금곡리에 사는 권문해의 후손 권영기(權榮基)가 보관하고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보를 방대하게 수집한 책으로 백과사전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적을 부분적으로나마 참고할 수 있어서 서지학적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책이다. 통일신라시대의 한문설화집 『수이전(殊異傳)』의 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서 설화문학의 측면에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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