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대동운부군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간일기(草澗日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간일기』는 권문해가 쓴 일기로 『대동운부군옥』의 탄생과 깊은 인연이 있다.

1997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권문해가 썼던 3종의 일기를 간행하면서 그의 호를 따서 『초간일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권문해는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겪은 업무내용과,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서 생활하면서 벌어진 일상을 『초간일기』에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일부 누락된 내용도 있지만 『초간일기』는 조선시대 관직세계와 일상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다.

『대동운부군옥』의 편찬 과정을 담은 『초간일기』

『대동운부군옥』이라는 20권짜리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기록하는 과정에 투여된 시간과 노동량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하는 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권문해가 쓴 자필 초간일기. [사진=예천군청]
권문해가 쓴 자필 초간일기. [사진=예천군청]
권문해가 쓴 자필 초간일기. [사진=예천군청]
권문해가 쓴 자필 초간일기. [사진=예천군청]

『초간일기』에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의 편찬을 마치고 이를 정서하도록 지시했다는 구절만이 남아 있다.

이 정도의 대대적인 작업을 수행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평소에 일기를 꾸준하게 써온 사람이라면, 집필과정이나 그때그때의 소회에 대해서 일정하게 언급하는 게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권문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로지 『초간일기』를 통해서만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할 무렵의 권문해가 어떠한 학문관과 역사관을 가지 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초간일기』는 권문해가 쓴 「선조일록」, 「초간일기」, 「신묘일기」, 이 세 가지 일기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초간일기』라는 이름으로 아우른 것이다.

『초간일기』의 원고는 모두 권문해가 작성한 것이 분명하지만, 「선조일록」와 「초간일기」는 후손 중에서 누군가 정서한 것이고 「신묘일기」는 글씨가 흘림체이고 군데군데 수정한 대목이 있는 걸로 미루어 권문해 가 쓴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일록」은 1580년 11월에서 1584년 7월까지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1582년 11월부터 12월까지의 내용은 간단하게 작성되어 있으며 1583년 5월 18일부터 10월 말까지는 내용이 없다.

이 시기에 권문해는 공주목사, 사헌부 장령, 성균관 사성, 직강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초간일기」는 1587년 7월부터 1590년 4월까지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때 권문해는 대구부사로 있었다.

「신묘일기」는 1591년 7월부터 그해 10월까지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때 권문해는 우부승지로 재직하고 있었다.

『초간일기』의 특징은 그날 있었던 일 중에서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풍속 등에 대해서 보고 듣고 알게 된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1581년(선조 14년) 5월 21일의 일기에는 충남 부여를 지나다가 신 를 도와서 백제를 침공했던 중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비석을 살펴보았다는 내용이 있다.

“아침에 비가 내렸다. 식사를 한 후에 ‘소정방 비석’을 방문했다. 비석은 밭 가운데 있는 석탑부도였다. 아랫단에 비문을 새겨 넣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마모되어서 내용을 제대로 식별할 수가 없다. 대략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민간풍속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권문해는 1584년(선조 17년) 1월 7일의 일기에 경북 예천군에서 열리는 ‘칠일회(七日會)’를 소개하고 있다.

“고을의 풍속 중에 매년 정월 7일에 읍내 광대들이 잡회를 공연한다. 이를 ‘칠일회’라고 하데 멀리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려고 모여든다. 태수 류군실이 어린 처를 데리고 객사 대문 밖에 나와서 하루 종일 칠일회를 구경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 중에서 비웃거나 욕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 전해들은 괴상한 일도 일기에 기록해놓았다. 1589년(선조 22년) 7월 11일의 일기에는 전라도 나주의 어느 시골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상세하게 적어놓고 있다.

“무자년과 기축년 사이에 전라도 나주의 한 촌가에 있는 뽕나무에서 털이 났는데 그 모습이 사람의 수염과 비슷했다고 한다. 그 길이가 몇 자에 이르자 털을 잘라냈는데도 다시 자라고 또 잘라냈는데도 다시 자랐다. 이런 일이 몇 달이나 반복되자 괴이하게 여긴 집 주인이 그 뽕나무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초간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내용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일기 곳곳에 인물평이 나오는데 훗날의 저술을 위해서 참고용으로 기록한 것으로 짐작된다.

“도하는 대구 하빈현 사람이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재주가 뛰어나다는 칭찬이 동네에 자자했다. 나이가 들도록 경전을 공부해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20여 년째 문과에 합격하지 못하던 천순 무인년 가을 우리 세조께서 성균관을 둘러보시다가 시험을 보기로 했다. 시험일까지 7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도하가 서울에 도착했다.”

이처럼 권문해는 평소에 우리나라의 역사, 유적, 풍속 등에 관심이 많았다.

십수 년 동안 일기에 이런 것들에 대한 자료를 꾸준히 기록해놓았다. 이는 훗날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정황을 통해서 우리는 권문해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문해는 왜 『대동운부군옥』과 같은 방대한 저작을 편찬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초간집』에 실려 있는 연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선생이 일찍이 남정공(권문해의 동생)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 풍속은 질박하고 촌스러우며 문헌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선비들이 중국의 일을 이야기할 때는 역대의 흥망을 어제 일처럼 환하게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일은 수천 년 동안의 역사를 마치 태고의 일처럼 아득하게 여기고 있다. 이는 눈앞에 있는 것은 보지 않고 천리 밖에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선생은 강독하다가 틈이 나면 여러 책에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적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역사가들의 좁은 식견을 병폐로 여기고 선생 나름대로 역사를 기술하려는 뜻을 품었다.”

권문해는 일찍부터 당대의 학자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고 중국의 역사만 숭상하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저작을 편찬할 뜻을 품은 것으로 여겨진다.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꾸준하게 일기를 쓰면서 필요한 자료를 그때그때 기록해놓는 등 준비작업을 치밀하 게 해왔던 것이다.

예천 권씨 초간종택의 이모저모. 종택 전면과 뒤에서 본 전경 및 종가별당. [사진=예천군청]
예천 권씨 초간종택의 이모저모. 종택 전면과 뒤에서 본 전경 및 종가별당. [사진=예천군청]
예천 권씨 초간종택의 이모저모. 종택 전면과 뒤에서 본 전경 및 종가별당. [사진=예천군청]
예천 권씨 초간종택의 이모저모. 종택 전면과 뒤에서 본 전경 및 종가별당. [사진=예천군청]
예천 권씨 초간종택의 이모저모. 종택 전면과 뒤에서 본 전경 및 종가별당. [사진=예천군청]
예천 권씨 초간종택의 이모저모. 종택 전면과 뒤에서 본 전경 및 종가별당. [사진=예천군청]

『대동운부군옥』의 의미와 가치

권문해는 학문적으로 대단히 엄격한 태도를 지닌 학자였다.

그러한 면모는 『대동운부군옥』에 잘 나타나 있다. 「범례」를 보면 권문해가 삼국시 대 이전의 기록이나 그 시절의 방언 등에 대해 정확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이전의 문헌은 매우 적고 누락된 것도 많다. 그래서 『사기』와 『전후한서』등 여러 책의 『동이전』을 살펴서 토지와 풍속에 관계된 것 중에서 우리나라 역사책에 수록되지 않은 것을 모두 수집해서 기록했다. 간혹 우리나라 역사책과 다른 내용이 있어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다.”

“삼국시대에는 방언이 많은데 비록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이를 삭제하지 않고 기록한 것은 당시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뜻을 알 수 없거나 혹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내용일지라도 원전에 있는 것을 그대로 기록한 이유는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학자적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세 학자들은 『대동운부군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대동운부군옥』은 임진왜란 이전의 자료들을 백과사전식으로 방대하게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의미를 지닌다. 임진왜란 와중에서 일전되어 현재 전하지 않고 있는 서적들의 편린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수이전』의 경우 본문의 일부가 전재되어 있어 고대설화문학의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가 『대동운부군옥』의 범례에서 밝혔듯이 원전의 인용에 있어서 추호의 가감도 하지 않으려고 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들 자료들을 통해서 충분히 산일된 원전의 면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의 편찬을 마무리하고 정서를 시작한 것은 1587년(선조 20년) 10월 27일이었다. 이 무렵 권문해에게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당시 유행하던 역병에 걸려서 아들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권문해는 아들이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종에게 아들의 시신을 며칠 동안 지켜보도록 했다고 한다. 권문해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보름이 지나서 권문해는 『대동운부군옥』의 정서작업을 시작했다.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서둘러 작업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대동운부군옥』의 정서작업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지방관아에서 호적대장 등을 정리할 때 향교나 서원의 학생들을 주로 동원했다. 짐작하건대 『대동운부군옥』도 대구부의 서리나 인근의 학생들에게 정서를 부탁했을 가능성이 높다.

1589년(선조 22년) 정월에 『대동운부군옥』을 완성했다고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 정서가 끝났다는 뜻일 것이다. 1587년 10월에 정서를 시작했으므로 꼬박 1년 3개월이 시간이 걸린 셈이다.

『대동운부군옥』은 모두 세 질을 정서했다고 「발문」에 나와 있다. 그 무렵 다른 저술들의 경우처럼 다른 학자들에게 열람을 의뢰해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고 보충하려고 세 질을 정서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동운부군옥』의 정서가 끝나고 7개월쯤 지났을 무렵 권문해는 경상도 성주에 있는 친구 정구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대동운부군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정구는 책을 보고 싶다고 간청했다. 그래서 한 질을 빌려주었는데 얼마 뒤 정구의 집에 화재가 나서 소실되고 말았다.

1591년(선조 24년) 7월, 권문해는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하루는 성균관에 재직하고 있는 김성일이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대동운부군옥』을 살펴본 김성일은 “이 책은 사가의 문헌으로 그칠 게 아니라 세상에 알려서 큰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내가 임금께 아뢰어 나라에서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한 질을 가져갔다. 그러나 얼마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분실되고 말았다.

마지막 한 질은 권문해의 아들 권별이 글씨 잘 쓰는 선비에게 부탁해서 한 질을 더 베끼도록 해서 따로 보관을 했다. 혹시라도 마지막 남은 한 부마저 분실하면 천고의 한이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대동운부군옥』은 1836년(헌종 2년)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권문해가 편찬을 마친 것으로부터 2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였다. 이처럼 중요하고 훌륭한 책이 출간되기까지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무관심이다.

『대동운부군옥』은 20권 20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어서 개인이 발간해서 보급하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관에서 추진해야 하는데 당시 관료들 중에서는 『대동운부군옥』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중국의 서적을 더 높이 평가하고 우리의 것은 낮게 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수록된 내용 때문이었다. 『대동운부군옥』에는 여러 인물에 대한 행적이 나오는데 좋은 내용도 있고 나쁜 내용도 있었다.

이런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 후손들이 권문해에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통문을 돌려서 『대동운부군옥』을 훼손하거나 발간을 훼방하는 무리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바람에 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대동운부군옥』의 가치를 알아본 최남선이 조선광문회 에서 활판으로 발간을 시도했으나 9권까지만 발간하고 나머지 11권은 발간하지 못했다.

1957년 정양사에서 신석호의 소장본을 영인본으로 출간했으며, 1976년 아세아문화사에서 다시 신석호 소장본을 영인본으로 출간했다. 최근에는 경상대 남명학연구소에서 『대동운부군옥』을 한글로 번 역하기에 이르렀다.

『대동운부군옥』에 대한 후세학자들의 평가는 극찬 일변도이다. 숙종 때 병조좌랑을 지낸 홍여하는 “동국의 찬술로는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 제일이다”라고 했다.

한국서지학회 회장을 지낸 한학자 임창순은 “우리나라의 역사사전인 동시에 또한 운어사전(韻語事典)으로서 최고 유일한 보전”이라고 평가했다. 인문학자 임형택은 “『대동운부군옥』은 동국에 관한 고실(故實)의 회합처로서 ‘국학적 지식의 바다’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중요하고 가치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대동운부군옥』은 여전히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국학지식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이 훌륭한 책에 수록된 다양한 정보를 학문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이를 우리 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전하는 것은 이제 우리 후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 참고자료

『초간 권문해 선생의 학문과 사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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