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숲 속의 아름다운 모임

'송계아회도', 이인문 作 , 고송유수첩, 조선후기, 지본담채, 38.1X59.1cm, 국립중앙박물관.
'송계아회도', 이인문 作 , 고송유수첩, 조선후기, 지본담채, 38.1X59.1cm, 국립중앙박물관.

[뉴스퀘스트=함은혜(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은 나무로, 소나무 문화를 창출해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수화와 산수인물화에는 소나무가 그려졌고, 또한 역사 속에서 상징하는 의미도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지금 살펴 볼 이인문(李寅文, 1745∼?)의 시대인 조선 후기는 소나무의 ‘은일’, ‘은거’에 대한 상징성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이 상징을 바탕으로 소나무 숲, 송림(松林) 속에서의 문인들의 아름답고 한가로운 모임을 그린 이인문의 <송계아회도>는 ‘은일’과 ‘차의 정취’가 결합된 대표적인 차 그림이다.

중국의 『양서(梁書)』에는 “도사 도홍경(陶弘景)은 유난히 솔바람 소리를 좋아하여 정원에 소나무를 가득 심어놓고 늘 그 소리를 들으며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귀의한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 365~427)도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서성거린다(撫孤松而盤桓).”고 하였는데, 후대의 은거를 지향하는 문인들에게 소나무는 시와 그림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소나무는 ‘청정한 자연’이자 ‘은일의 공간’을 뜻하고, 소나무 숲[松林]은 ‘유유자적하는 공간’으로 상징화되었다.

소나무 아래 계류가 흐르고 한적한 곳에서 함께 모여 시서화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이미 속세를 떠난 탈속(脫俗)의 공간을 의미했다.

이인문은 자신의 호인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처럼 고송(古松)과 유수(流水)를 소재로 하는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 또는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류를 즐겨 그렸으며, 이 소재만으로 다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인문의 송계아회도 일부분.
이인문의 송계아회도 일부분.

그의 《고송유수첩》 내에 장첩된 제15폭 <송계아회도>도 이러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인문의 <송계아회도>는 배경보다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된 셋 이상의 인물들이 소나무 숲 아래에서 물을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송림도(松林圖) 형식의 차 그림이다.

가장 좌측에 있는 고사(高士)는 바위 끝에 걸터앉아 쏟아지는 폭포를 감상하고 있고, 그의 뒤에 있는 고사는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듯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바위에 기댄 고사가 나머지 두 명의 고사들이 한담(閑談)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화면 좌측 하단에 차를 준비하는 다동의 등장이다.

이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풍로의 전체 표면은 가로줄 무늬로 표현되어 있고 그 위에 백색의 손잡이가 높게 솟은 탕관이 놓여 있다.

쌍계형 머리를 한 다동은 찻물을 끓이기 위해 단선을 들고 풍로 앞에 앉아 불씨를 붙이고 있다. 이것은 이인문의 다른 차 그림들에서도 보이는 공통적인 그만의 양식이다.

이 그림의 화면 좌측에는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가 있고, 우측에는 소나무가 각각의 군집을 이루어 하나의 숲을 형성하고 있다.

소나무 숲 속에서 아회를 여는 모습을 그린 분위기와 전체적인 구도는 《화원별집》의 <송계한담도>와 선면 <송계한담도> 등 이인문의 다른 작품들과도 유사하다.

또한 소나무들이 두 그루 혹은 세 그루씩 군집을 이루고 이들이 X자형으로 서로 엇갈려 표현되는 것도 이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소나무 군집 표현법이다.

이처럼 작품의 구도와 소나무 표현법에서 공통점이 많지만 ‘차를 준비하는 다동’은 《고송유수첩》제15폭 <송계아회도>에서만 등장하고 있다.

이는 작가 혹은 감상자의 미감이 반영되어 선택된 도상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림 속 다섯 명의 고사들은 모두 다동의 찻물 끓이는 소리를 들으며 각자의 풍류를 즐기고 있다.

예부터 찻물 끓는 소리를 소나무 바람 소리(솔바람 소리)를 뜻하는 ‘송풍(松風)’에 빗대어 표현했던 것으로 볼 때, 울창한 소나무 숲 속 아회에서 차를 달이는 모습을 등장시킨 것은 탈속과 은일이라는 상징에 청각적인 요소까지 더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상적인 아회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서 죽림칠현과 상산사호(商山四皓), 서원아집(西園雅集) 등의 고사(故事)를 주제로 삼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이 고사들의 내용에는 차를 달이는 부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차 달이는 장면을 선택하여 그린 것은 당시에 이상적이고 고아한 모임을 구현하기 위해서 차가 필연적인 소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이인문은 차 그림을 다수 제작한 화가로서 차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고, 또한 차를 준비하는 장면과 어울리는 그림 속 분위기를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당시 고사(高士)들은 소나무 아래에 모여서 이루어지는 행위들을 통해서 청정한 자연을 마음껏 느끼고 즐겼다.

그림 속의 풍류를 즐기는 고사들의 옆에는 주로 소나무가 있는데, 이는 소나무 한 그루만으로도 산수를 대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은 이미 현실을 벗어난 탈속의 세계로, ‘소나무 아래’는 은둔, 은일의 공간이자 유유자적하는 공간이었다.

함은혜(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함은혜(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이렇게 상징적인 장소에서 차를 준비하는 다동의 모습을 통해 차를 즐기는 고사들의 여유와 정취가 한껏 더 강조되었고, 그들의 모임 또한 우아하고도 아름답게 보였다.

즉, 송림이 탈속을 위한 유유자적한 공간의 표상임을 드러낸 이 그림은 소나무 숲 아래에서 지인들과 함께 서화를 즐기고,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는 고사들의 모습에서 자연에 회귀한 은자(隱者)들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무성한 소나무의 숲 사이로 흐르는 시원하고 맑은 계곡을 떠올려보자. 지금 머릿속에서 연상된 이 시원함과 맑음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바로 ‘차’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담아 그린 그림인 <송계아회도> 속의 인물이 되어, 여름에 소나무의 푸름을 느끼고 시원한 계곡을 바라보면서 맑은 차 한 잔을 마시는 여유를 누려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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