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뉴스퀘스트=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프로이드는 초창기에 인간의 지각 영역을 무의식, 의식, 전의식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는 무의식에 대하여 인간 정신의 가장 크고 깊은 심연에 잠재해 있으면서 의식적 사고와 행동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무의식은 마치 빙산의 대부분이 수면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이 의식이라는 표면 아래에서 존재하는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기억과 억누르는 요소, 알 수 없는 욕구 등이며, 의식 영역 밖에 존재하면서 의식과 행동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의식이란 합리적인 생각과 이에 따른 행동을 하게 하는 정신 행위의 일부분이다.

의식은 새로운 생각이나 경험이 들어오면서 계속 변화한다.

전의식이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면서 현재는 의식에 어떤 내용이 없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의식으로 떠오르는 내용들이 있는 의식의 장소를 말한다.

그는 인간의 본능을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으로 구분하면서 삶의 본능적 요소로 성적본능, 욕구충족 본능, 창조적 본능, 사랑의 본능 등을 꼽았다.

이 삶의 본능(eros)의 에너지를 ‘리비도(libido)’라고 한다. ‘리비도(libido)’라는 말에는 성적본능, 성욕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프로이드는 이를 바탕으로 5단계의 성적 발달단계를 주장하였다.

정리해 보자면 프로이드 이론에서는 사람의 성품(性稟)의 대부분은 무의식이 지배하며, 리비도라는 삶의 본능적 에너지가 무의식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방어기제에 의해서 개인 성격의 독특함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의 이론에서 리비도는 구강기(1세), 항문기(2~3세), 남근기(4~6세), 잠복기(7~12세), 생식기(13~18세)의 5단계로 나이에 따른 발달 과정을 거치면서 잠복됐다가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1923년 이후에 무의식, 의식, 전의식의 체계를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의 세 요소로 더 구체화 시킨다.

프로이드의 이론을 접하다 보면 인간의 품성을 너무 성적본능에 지배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 있고, 무의식의 영역에 나이에 따른 경험적 발달 과정이 훈습되어 방어기제가 작동한다는 설명에서 경험적인 요소가 무의식을 이루게 된다는 모순적인 설명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의문을 품게 된다.

즉,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무의식이라는 다소 도식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한편, 동양학에서의 무의식은 프로이드가 생각하는 무의식과는 개념이 많이 다르다.

유식불교에서는 8가지의 식(識)이 있다. 그중에서 6식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말하며, 7식은 말라야식(末那識), 8식은 아알라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6식중 안,이,비,설,신은 고등 동물이 아니어도 가지고 있는 요소이다. 예를 들면 토끼에게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 있다. 또한, 원숭이나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에게는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기본적 지능(意)이 있다.

하지만 영장류의 경우에도 ‘내가 곧 나라는 것을 인지하는 의식’에 해당 되는 7식인 말라야식(末那識)은 없다고 한다.

오직 사람에게만 ‘나라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8식인 아알라야식(阿賴耶識)은 저장식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연기되어온 인연의 업종자가 훈습되어 나타나는 심의식(心意識)이 바로 8식이다.

정리해 본다면 우리는 안, 이, 비, 설, 신이라고 하는 생존에 필요한 오감의 영역과 의(意)라고 하는 지능, 또는 생각, 그리고 나라는 의식인 7식과 우주 생성 이래로 우리가 태어나기까지 연관되고 훈습되어 저장된 인연을 받은 심의식인 8식으로 연결되어있는 존재인 것이다.

불교에서의 무의식은 이처럼 단순히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업종자와 인연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미 훈습되어 작용하는 힘을 포괄하는 개념인 것이다.

6식중 의(意)의 경우,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과 의식은 모두 ‘의(意)’에 의거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도 생멸에 의한 의(意)가 있고, 진여의 성(性)이 훈습된 의(意)가 있다.

필자는 전자의 생과 사라고 하는 생명 본능적 욕구로 일으키는 의(意)를 개성(個性) 이라고 여기며, 후자의 진여지성(眞如之性)으로서의 의(意)를 천연성(天然性) 또는 성(性)이라고 여긴다.

동양학적인 관점에서 학문과 도(道)를 닦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이치를 증득(證得)하고 마음을 회복하여 곧 천연성에 도달함으로써 신통(神通)에 이르는 것이 그 목적지라 할 수 있다. (성품에 대하여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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