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뉴스퀘스트=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 대만의 난화이진(南懷瑾, 1918~2012)은 동양학에 있어서 공부의 궁극적 도달처는 “성인(聖人)의 경지”라고 말하였다.

그에 따르면 “성인(聖人)에 이르면 신통(神通)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신통(神通)에는 총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태어나면서 이미 가지고 있는 탁월한 능력을 보통(報通)이라 하며, 둘째, 도를 닦아서 얻게 되는 신통을 수통(修通)이라 한다. 셋째, 무병 등 신들림에 의한 신통을 귀통(鬼通)이라 하며, 넷째, 정신병이나 정신적 증상에 의하여 신통하게 되는 것을 요통(妖通)이라고 한다. 마지막 다섯째, 도구나 방편 등을 사용하여 신통하는 것은 의통(依通)이다.”

의통에는 시초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점을 치거나 주역이나 명리학 같은 분석 도구에 의거해서 신통을 이루는 행위가 포함된다.

신통(神通)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자연의 이법과 본성에 순연(順然)하며 이를 통하여 하나(一心)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통이란 마음의 궁극처에서 발휘할 수 있는 지혜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와 물질적 물리적으로 더 잘살게 되어야 하는 문제는 사뭇 마음의 문제와는 다르다.

성(性)이라는 글자는 마음(心)과 생(生)이 합쳐진 글자이다.

마음(心)이라고 하는 무형적 차원과 생(生)이라고 하는 유형적 차원이 합쳐진 것이 성(性)이라는 것인데, 유형적 생(生)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소유적 욕심, 쾌락을 추구하는 정욕, 생존 기계로서의 본능 등이 포괄적으로 포함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성품(性稟)은 곧, 마음과 생명이 결합된 개념이며, 하늘로부터 각기 품수 받은 공통적인 신성성, 자연성인 동시에 훈습된 심의식에 의한 알 수 없는 업(業)이 개입되어있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같은 업식이 생명의 본능인 생노병사와 만나면서 개인의 개별적 성(性)인 개성(個性)을 이룬다.

따라서 개성은 나이가 들수록 더 분화되고 강화된다.

이렇게 삶과 사회에 물든 마음은 우리에게 여러 장애를 일으킨다.

결국 이러한 장애의 바탕은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탐진치(貪瞋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문명 또한 성찰이 없다면 결국 ‘탐진치(貪瞋痴)’의 극치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인류가 문명을 물질적 과학적으로 발전시킬 때마다, 자연에 대한 훼손과 무고한 수많은 생명의 희생이 뒤따라왔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산업혁명기를 맞이하고 있다.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로봇혁명으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편리함과 생명유지에 필요한 여러 편익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마음을 회복하고 닦기 위해서는 물질적 풍요도 매우 중요한 필수 요소이다.

맹자(孟子)는 이를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마음을 닦기 어렵다.(無恒産, 無恒心)”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경애와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철학의 뒷받침이 없는 물질적 잉여는 오히려 큰 후유증을 낳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는 기아와 빈부 격차의 문제, 인종차별의 문제, 킬러로봇과 인권의 문제, 잉여인력의 문제 등등 이미 대두되고 있는 산적한 문제들이 즐비하다.

한쪽에서는 많은 이들이 못 먹고 병들어서 죽어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한 음식을 먹지도 않고 버린다.

한쪽에서는 배고파서 죽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병에 걸린다.

만일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와 같은 모순은 바로 지금 즉시 해결할 수 있다.

인류 모두가 중지를 모은다면 이것이 왜 불가능하겠는가?

초음속 드론으로 아프리카의 아이에게 먹을 것과 식수를 공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동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명은 우리의 생명을 더 부유하게, 더 편리하게 발전시키고자 하는 탐욕적 욕구에 의해 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마음이라고 하는 문제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마음을 닦고 성찰을 이루는 방법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

필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불경’,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 알라의 가르침을 담은 ‘코란’, 공자가 집대성한 ‘주역’이야말로 감히 그 어느 누가 단 한 글자도 더하고 뺄 수 없는 주옥같은 인류의 경전이라고 본다.

이 같은 인류의 유산은 시대가 흐르고 문명이 발전할수록 이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수많은 근거들로 인해 오히려 더 확고하게 그 사상의 지평이 지지받게 될 것이다.

종교적 관점의 차이, 신앙체계의 차이는 좁혀지기 어려울지 몰라도, 지혜와 마음은 서로 통하여 상호작용하는 방향으로 경전의 가치는 새롭게 발견되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지혜로 은총을 받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마음이 맑아지며, 코란의 가르침으로 숭고해지고 주역의 이치대로 자연의 흐름을 읽고 이해하는 신통(神通)을 이루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만나기 어려웠고, 같은 맥락을 주장하고 있지만 찾아내기 어려웠던 각기 다른 경전과 문헌들의 문장을 이제는 쉽게 검색 할 수 있고,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의 인문학은 새롭게 발전하기에 앞서 기존의 성과들을 재발견하고 서로의 공통점들을 집대성해서 융합되는 방식으로 대통섭(大統攝)을 이루게 되는 날이 가까워졌다고 예상한다.

과학하는 태도의 유용함은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하는 자세의 위대함은 진리를 발견해서 자연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자연과 호흡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

만일, 우리가 발전시키게 될 과학과 문명, 그리고 지식체계들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성품(性稟), 즉 성(性)이라고 하는 자연의 마음이 담기게 된다면 앞으로의 인류의 마음은 더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적산출물에 마음과 우리의 성품이 배제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더 큰 고뇌에 빠지게 할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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