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90년(선조 23년) 3월, 천지에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서울을 떠나 머나 먼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이 산 넘고 물 건너 일본으로 가는 길이었다.

1479년(성종 10년)에 떠났던 조선통신사가 일본 내부의 사정 때문에 제대로 일을 보지 못하고 돌아온 이후 110년 만의 파견이었다.

1443년(세 종 25년) 정사 변효문, 부사 윤인보, 서장관 신숙주 등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것부터 따지면 147년 만의 일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조선 통신사 파견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임무는 막중했고 어깨는 무거웠다.

일본으로 떠나는 세 사람

조선 초기 외부로부터의 가장 큰 위협은 북쪽 국경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과 남서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는 왜구였다.

여진의 침입에 대비해서 세종은 김종서에게 6진을 개척하도록 했다. 왜구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 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했다.

아울러 왜구에 적극적으로 대 처하기 위해 외교활동도 활발하게 벌였다.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보내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한 것이었다.

성종 이후에는 일본 본토보다 대마도와 접촉이 잦았다. 대마도는 일본 본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까우면서 왜구의 중요한 기지였다.

조선과 일본의 틈바구니에 낀 대마도는 어떤 때는 조선에게 유리한 정보를 주고 어떤 때는 일본에게 유리한 정보를 주면서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은 패권을 장악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자살하고 그의 부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권력을 이어받은 상태였다.

1586년 도요토미는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뜻을 대마도주에게 전했다. 일본과 조선의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던 대마도주는 난감했다.

1587년 도요토미는 조선의 왕이 일본에 와서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하라 고 대마도주에게 요구했다. 

김성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임천서원과 입도문. 1618년(광해군 10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김성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임천서원과 입도문. 1618년(광해군 10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소한 일로 시간을 끌지 말고 얼른 본토로 갑시다.”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실리를 추구하자는 게 황윤길의 입장이었다. 하 지만 김성일은 원칙과 법도를 거스르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개인끼리의 관계에서도 예절을 지키는 게 중요한데 하물며 외교관계에 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고서는 한 걸음도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일본이 우리를 더욱 무시할 것입니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동안 대마도주가 조선통신사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대마도주가 탄 가마가 연회장 안에까지 들어오는 일이 벌어졌다. 연회장 밖에서 가마를 내려 걸어 들어오는 것이 예의인데 이를 무시한 것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김성일은 “무례하다.”고 말하면서 일행에게 퇴장할 것을 요구했다. 서장관 허성은 김성일을 따라 일어섰지만 황윤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겨우 일본 본토에 도착한 조선통신사는 도요토미를 만나서 선조의 국서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조선통신사를 만나는 걸 차일피일 미루었다. 속절없이 몇 개월의 시간이 흘러가자 조선통신사는 대책회의를 가졌다.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하루 속히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소. 도요토미의 측근에게 예물을 주고 면접 일자를 빨리 잡아달라고 부탁합시다.”

황윤길이 그렇게 말하자 김성일이 대뜸 나섰다.

“우리가 개인 자격으로 온 것도 아니고 조선을 대표해서 왔는데 어찌 그런 편법으로 체통을 잃는단 말입니까. 나라의 존엄성과도 관계된 일이므로 편법은 절대 불가합니다.”

김성일의 말이 옳았다. 도요토미는 조선통신사의 기를 꺾기 위해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일부러 접견을 미루고 있는 것이었다. 씨름으로 치면 샅 바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결국 측근에게 예물을 주자는 얘기는 없던 일이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도요토미를 접견하게 되었다. 접견하는 자리에서도 조선통신사는 서로 의견이 부딪혔다. 서장관 허성은 신하가 임금을 만나는 예절에 따라 “뜰 아래에서 예를 표하자”고 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도요토미는 일본의 왕이 아니라 관백이므로 “마루에 올라가서 예를 표하자”고했다. 결국 이것도 김성일의 말이 논리적으로 옳았으므로 마루에 올라가서 예를 표하는 것으로 했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한 도요토미는 시종일관 업신여기는 말투와 행동을 했다. 게다가 접견이 끝나자 국서에 대한 답신을 줄 테니 백 리나 떨어진 포구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도요토미의 무례한 모습에 조선통신사 일행은 화가 치밀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런데 포구에서 기다리다가 답신을 받아든 조선통신사 일행은 깜짝 놀랐다. 도요토미가 보내온 답신에는 조선의 임금을 일본의 신하로 취급하면서 “우리는 명나라를 칠 것인데 조선은 일본의 신하가 되어 앞장서라”는 내용이 있었다.

김성일은 크게 분노했다. 특히 “조선은 일본의 신하가 되어 앞장서라”는 대목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므로 고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절대로 고칠 수 없으므로 답신을 받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오랑캐이므로 이들과 예를 따지며 다투다 보면 끝이 없소. 시 간만 지체되고 서로 감정만 상하므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소이다.”

황윤길은 그렇게 말하면서 귀국을 재촉했다. 조선을 떠나온 지 어언 1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조선통신사의 귀국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굴욕적인 내용이 담긴 답서였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조선을 모독하는 행위를 거듭하는 일본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체통을 묵살하고 존엄성에 상처를 내는 일본이 너 무나 괘씸했다.

김성일은 일본에 있는 동안『조선국연혁고이(朝鮮國沿革考 異)』와『풍속고이(風俗考異)』라는 책을 지었다.

이 책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잘못 기록하고 있는『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바로잡은 것이었다. 명나라에서 나온『대명일통지』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는 모두 오랑캐로 취급하고 있었다.

마침 일본 학자가 이 책에서 조선과 관련된 부분을 질문하자, 김성일은 잘못된 대목을 하나하나 바로잡기 위해『조선국연혁고이』와『풍속고이』를 저술한 것이다. 김성일은 이런 일을 하면서 조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591년 2월, 우여곡절 끝에 1년여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조선통신사 일행은 각자 쓴 보고서를 선조에게 제출했다.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 (許筬)의 보고서는 “일본은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김성일의 보고서는 달랐다.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정황은 보지 못했습니다. 황윤길은 쓸데없는 말로 민심을 어지럽게 하므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상반된 내용의 보고서를 받아든 선조는 난감했다. 김성일의 보고를 믿고 안심을 하지니 왠지 불안했다. 그렇다고 황윤길의 보고를 믿고 전쟁을 준비하자니 막연했다.

사실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을 제대로 정탐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일본이 정해준 숙소에 머물면서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황윤길은 당시 떠돌던 소문을 토대로 전 쟁 경계론을 편 것이었다. 김성일은 전쟁을 준비한다고 성을 쌓는 일 따위를 벌여서 그렇잖아도 고단한 삶을 사는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할까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전쟁 낙관론을 주장한 것이었다.

뒷날 일부 학자들은 황윤일과 김성일이 서로 대립하는 정파여서 상대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주장을 잘 분석해보면 황윤길은 실리를 중요시하는 입장이었고 김성일은 원칙을 중요시하는 입장이었다.

평소 두 사람의 성품을 따져보았을 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입장이었다. 두 사람의 보고서도 상대 정파를 의식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에 입각해 서 작성한 보고서였던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치밀한 보고서를 작성했으면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란을 보다 슬기롭게 대비했을 거라는 아 쉬움은 있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조선통신사의 판단을 흐리게 하려고 온갖 술수를 부린 일본의 방해공작이 성공을 거둔 것 이었다.

마침내 임진왜란이 터지다

1592년 4월 11일, 조선통신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김성일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4월 13일, 임지로 가던 길에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왜구의 노략질 수준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대부대가 몰려왔다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게도 부정하고 싶었던 일이 마침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왜적의 침공 소식을 전해지 자 고을을 지키던 관리들과 병졸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데다 왜적의 기세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걸음을 재촉해서 경상우도 병영이 있는 창원으로 달려갔다. 마침 정찰하러 나온 왜군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처단했다. 그리고 서울의 선조에게 급히 상소를 올렸다.

“왜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이 한 목숨을 바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일입니다.”

짧지만 강력한 내용이었다. 비록 자신의 오판으로 적의 침입에 대비하지 못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선조는 김성일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통신사로서 잘못된 보고서를 올린 죄를 따지기 위해서였다.

그 소식을 들은 김성일은 자신을 잡으러 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서울을 향해 말을 달렸다. 가는 도중에 경상감사 김수를 만나서 기막힌 심정을 토로 했다.

“어리석은 이의 그릇된 판단으로 나라를 곤경에 빠트렸소이다. 당장 목숨을 끊어서 주상과 백성에게 속죄해야 마땅하지만, 나라가 위중한 때이니만큼 경거망동 할 수 없구려. 주상 앞에 나아가 죄값을 받는 게 순서일 것 같소이다. 감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오로지 왜적의 토벌에만 힘 써 주시오.”

말을 마친 김성일이 회환에 사무친 눈물을 흘리자 김수도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그 광경을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이 곧 떨어질 판국인데 나랏일을 걱정하다니 참으로 충신이로다.”라고 했다.

이황, 김성일,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안동 호계서원.
이황, 김성일,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안동 호계서원.

김성일이 충청도 직산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어명이 전달되었다. “김성일의 죄는 즉시 큰 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나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는지라 우선 적을 물리치는 일에 신명을 다할 것이며 죄는 나중에 다시 따지기로 하겠노라.”

선조가 노여움을 풀고 김성일의 임지 복귀를 명령한 것이었다. 이런 명령을 내린 것에는 당시의 상황이 워낙 다급했던 탓도 있지만, 김성일이 일 부러 오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조정의 판단도 있었다. 특히 세자였던 광해군과 우의정으로 있던 류성룡이 김성일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김성일의 태도가 불성실해서 잘못된 보고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이 처음부터 통신사 일행을 속이려고 술수를 꾸민 것입니다. 그런데 김성일을 처벌하면 일본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술수에 빠진 죄도 가볍지는 아니하나, 지금은 벌을 내리는 것보다 전쟁터에 나아가 싸 워서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간언이 받아들여져서 체포령은 해제되었고 김성일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초유사는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한편 의병을 모집해서 국란 극복에 앞장서는 지위였다.

김성일은 다시 말을 돌려서 5월 4일 경남 함양에 도착했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모두 피난 가서 함양도 텅 비어 있었다. 초유사 김성일 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수를 지냈던 조종도와 직장 벼슬을 했던 이로가 찾아왔다.

김성일은 이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작정하고 격문을 지어서 돌렸다. 이때 김성일이 작성한「초유일도사민문(招諭一道士 民文: 도내의 선비와 백성을 일으키는 글)」은 명문장으로 남아 있다.

(다음 회에 계속)

 

* 참고자료

『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한국민족문화대백과」,「국역 국조인물고」

·사진 제공_ 안동시청, 사단법인 학봉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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