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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⑦] 경북-불의를 거부하고 원칙을 중요시한 김성일(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⑦] 경북-불의를 거부하고 원칙을 중요시한 김성일(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19.10.26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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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열 살 무렵부터 김성일은『소학』,『사서』,『시경』등 유교의 기본경전을 공부하면서 학문의 토대를 쌓았다.

열일곱 살 무렵에는 맏형의 부임지에 따라가서 공부를 했으며, 열아홉 살 무렵에는 세 살 아래 동생 김복일과 함께 풍기의 소수서원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때 소수서원에는 퇴계의 제 자 황준량(黃俊良)이 있었다. 황준량은 학식이 높기로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퇴계의 명성을 전해들은 김성일은 퇴계를 흠모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정진하여 점점 공부가 깊어지던 어느 날, 김성일은 책을 덮으며 탄식을 했다.

퇴계의 3대 제자가 되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과거를 보기 위한 공부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천지만물의 이치와 자기 자신의 본질을 깨우치는 학문을 모르고 어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김성일은 집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스승이신 퇴계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흔쾌히 허락하자 김성일은 동생과 함께 안동 계상서당으로 퇴계를 찾아갔다.

당시 쉰여섯 살의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다 물러나서『천명도설(天命圖說)』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김성일을 맞이한 퇴계는 태도가 올바르고 총명한 그의 모습에 몹시 흡족해했다.

김성일은 틈만 나면 퇴계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스승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마음속 깊이 새겼다. 그리하여 훗날 류성룡, 조목과 함께 퇴계의 3대 제자로 불릴 만큼 훌륭한 학자로 성장했다.

보물 제450호 안동 의성 김씨 종택. 청계종택이라고도 한다.
보물 제450호 안동 의성 김씨 종택. 청계종택이라고도 한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김성일은 안동 권씨와 결혼을 했다. 스물한 살이 되던 1558년에는 첫 아들이 태어났다.

그 무렵 김성일은 동생 김복일과 함께 꾸준히 계상서당을 드나들면서『서경(書經)』을 공부했다.『서경』은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 중의 하나로 중국 상고시대의 정치를 기록한 책이다.

김성일은 이 책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마음에는 욕망과 도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승 퇴계는 김성일이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이 사람만큼 행실이 바르고 학문이 높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극찬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김성일은 무더운 날씨에도 산을 넘어 오가면서『서경』을 공부하다가 궁금한 대목이 있으면 묻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성격이 부지런하고 배우는 걸 좋아하니 그와 함께 학문을 하면 매우 즐겁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561년 스승 퇴계가 환갑을 맞이 했다. 마침 도산서당이 완공되어 퇴계는 그곳으로 옮겨갔다. 김성일은 더 깊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도산서당에 머물면서 학문 연마에 몰두했다. 이듬해에는『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배웠다.

『주자서절요』는 중국 송나라의 성리학자 주자가 일생 동안 연 구한 학설과 여러 학자들의 질의에 회답한 편지와 시(詩), 기(記), 명(銘), 비 문(碑文), 묘지(墓誌) 등 모든 저작을 수록한 100여 권짜리『주자대전(朱子 大全)』에서 핵심 내용만을 뽑아서 퇴계가 직접 정리한 책이었다.

1563년 스물여섯 살이 된 김성일은 진사시 향시에 합격했다. 이듬해에는 진사 회시에 합격했다. 이때 셋째 형 김명일과 동생 김복일이 함께 합격해서 집안에 큰 경사였다.

첫째 형 김극일은 이미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는 등 다섯 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김성일의 집안은 인근 고을에 ‘다섯 아들이 과거에 합격한 집’으로 유명해졌다.

1565년 김성일은 대과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 성균관으로 유학을 떠났다. 성균관에서 중앙정계의 분위기를 접한 김성일은 과거에 합격해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스승에게 편지를 썼다.

“어찌 벼슬길만이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위하는 길이겠습니까? 저는 과거 공부를 그만 두고 오로지 학문의 길로만 가고자 합니다.”

그러자 퇴계의 답장은 이랬다.

“육신을 주신 부모님이 계시는데 어찌 자네의 뜻대로만 하려고 하느냐. 학문의 길은 언제라도 갈 수 있으니 지금은 과거공부에만 집중하라.”

스승의 편지를 받고 마음을 고쳐 잡은 김성일은 다시 과거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나 갈수록 치열해지는 중앙 정계의 난맥상은 그로 하여금 차분하게 공부에 몰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이듬해 1월, 김성일은 고 향 내앞마을로 돌아오고 말았다. 서울로 유학을 떠난 지 8개월 만의 일이었다.

퇴계를 떠나보내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고향에서 과거공부에 몰두했던 김성일은 15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승문원 정자로 승진했다.

같은 해 3월, 임금의 간곡한 부름으로 조정에 나와 있던 퇴계가 여러 차례 간청한 끝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직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선조가 퇴계에게 말했다.

“이제 경이 가면 내가 누구를 믿고 이 나라를 이끌어간단 말이오. 혹시 라도 경을 대신할 인재가 있으면 추천해 주기 바라오.”

그러자 퇴계는 이렇게 답했다.

“황공하옵니다만 신은 이제 눈이 멀고 귀가 어두운 데다 머리도 흐려져서 전하에게 짐만 될 뿐입니다. 생각하건데 이준경, 기대승, 김성일, 이 런 사람들이 신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으로 전하를 보필할 수 있을 겁니다.”

1570년에는 김성일에게 슬픈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왔던 셋째 형 김명일이 병환이 생겨서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겨울에는 하늘같았던 스승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 서울에 올라와 있던 퇴계의 제자들은 김성일의 집에 모여서 슬퍼했다.

스승의 장례를 치르고 슬픔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김성일은 1571년 스승의 삶을 기록한『퇴계선생사전(退溪先生史傳)』을 지었다.

이 책에서 김성일은 퇴계의 가문을 언급하고 퇴계가 학문을 깨우치는 과정과 지냈던 벼슬을 꼼꼼하게 기록 했다.

또한 퇴계의 일상생활 모습과 교육자로서의 진지한 자세, 그리고 숱한 저술 등을 수록함으로써 퇴계의 드높은 학문과 고결한 인품을 추모했다.

김성일이 퇴계의 문하에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는 『퇴계선생 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책은 퇴계의 말씀과 행동을 제자들이 기록해놓은 것인데, 여기에 실린 663항목의 질문 중에서 김성일의 질문이 무려 198건에 달한다. 수백 명의 제자 중에서 김성일 한 사람의 질문이 30퍼센트를 차지한 것이다.

『퇴계선생언행록』에 수록된 김성일의 질문 중에서 ‘예’에 관한 것이 25 건이다. 그만큼 김성일은 예에 관심이 많았다. 예에 대한 김성일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예는 하늘과 땅의 질서, 사계절의 변화를 본받는 것이다. 음양의 움 직임을 법칙으로 삼고 사람의 정을 따르는 것이다. 예에는 은혜가 있고 사람의 도리가 있으며 드러내는 절차가 있다.”

김성일에게 예는 인간다운 삶을 실천하는 도구였다. 예를 존중하고 실천하는 것은 하늘의 질서에 맞추어 사람의 도리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하늘의 질서이자 사람의 도리인 예를 숭상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장 중요시했다.

김성일이 1590년 조선통신사 부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갔을 때 정사 황윤길, 서장관 허성 등과 뜻이 맞지 않아서 대립한 것도 모두 ‘예’ 때문이었다.

일본이 사사건건 예에 어긋난 행동을 할 때마다 김성일은 크게 분노했다. 이를 사신에 대한 결례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존엄성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성일은 황윤길과 허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듣기 싫겠지만, 내게는 체통이라는 두 글자보다 중요한 것은 없소이다. 1번도 체통이고 2번도 체통이고 100번도 체통입니다. 사신의 임무에 있어서도 내게는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소이다.”

김성일은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을 제자에게 돌려주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벼슬길에 오래 있다가 말년에는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기 때문에 김성일이 직접 가르친 제자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를 가르치는 자세에 있어서만은 스승 퇴계 못지않게 엄격한 태도로 지극 정성을 다해서 가르쳤다. 김성일은 평소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사람은 뜻이 옳지 못할까를 근심해야지 재주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면 안 된다. 재주가 있어도 소인이 될 수 있고 재주가 없어도 군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오로지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한 학문을 목표로 삼느냐, 아니면 출세를 위한 학문을 목표로 삼느냐에 달려 있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

김성일은 벼슬길에 나서서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을 두루 거쳤다. 이 세 부서는 임금과 다른 권력기관 견제하고 비판하는 곳으로 청렴하고 결백한 인재들만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김성일은 낭관으로도 일했다. 

의성 김씨 서지재사 원경과 내부 쪽마루 모습.
의성 김씨 서지재사 원경과 내부 쪽마루 모습.

낭관은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조의 5~6품 관직으로 직급은 별로 높지 않았다. 하지만 관리 후보자를 추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공명정대한 사람만이 임명되었다.

1572년 김성일은 소를 올려서 노산군(단종)의 묘를 능으로 격상할 것과 노산군에 충성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육신을 복권시킬 것을 청했다.

이 런 내용의 상소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자칫하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 이었다. 현 왕조는 세조로부터 이어져온 왕조이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지금의 임금도 부정하는 게 되는 것이었다.

의성 김씨 서지재사 원경과 내부 쪽마루 모습.
의성 김씨 서지재사 원경과 내부 쪽마루 모습.

그러나 김성일은 세조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전제한 다음, 단종에 대한 안타까움을 기리고 사 육신의 충성과 절개를 높이 평가하자고 과감하게 아뢰었다.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발단으로 논의가 시작되어 훗날 단종에게 임금의 지위를 복원 하고 사육신의 관직을 복권시키게 되었다.

김성일이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김규라는 인물이 사간으로 있었다. 사간은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자리로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청렴해야 했다.

그런데 김규는 임금의 인척이었다.

김성일은 김규의 공정성을 문제 삼 아서 사퇴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국 김규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김성일도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강직함과 공평함에 대해 다들 인정했다. 정승 김응남(金應南)은 편지를 보내 김성일을 격려하기도 했다.

“높고 곧은 절개가 천길 절벽처럼 우뚝 섰구나. 이것은 30년 만에 처음 보는 일이다. 이처럼 강직하고 사심이 없는 관리가 있으니 얼마 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구나.”

1579년 김성일은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의 강직함은 변함이 없고 오히려 더욱 과감해졌다. 임금 앞에서 바른 소리를 하는 것도 여전했고 조 정의 관리 중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여지없이 탄핵을 했다.

선조의 친형 하원 군이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아서 물의를 일으키자 그 집의 종을 잡아다가 큰 벌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 조정에는 뇌물이 성행했다. 설이나 추석 등 명절 무렵에는 지방 관리들이 특산품을 잔뜩 싣고 와서 조정의 관리들에게 바치곤 했다.

그 때 관리들이 가장 두려워한 이가 김성일이었다. 지방 관리들의 선물 장부 에는 조정 관리들의 이름이 잔뜩 적혀 있었는데 류성룡과 김성일의 이름 만 없었다. 이처럼 강직하고 청렴한 김성일을 사람들은 ‘궁궐의 호랑이(殿上虎)’라고 불렀다.

1586년, 나주목사를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김성일은 후학을 양성 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듬해에는 스스로 공부하는 한편 후학을 교육할 목적으로 청성산 아래 석문정사를 지었다.

조선통신사가 되어 일본으로 떠날 때 김성일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석문정사에서 여생을 보내리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해 겨울 내앞마을 종택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문중의 뜻을 모아서 쌀과 포목을 거둔 김성일은 공사를 직접 감독했다. 그렇게 완성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의성 김씨 안동 내앞 파 종택은 국가문화재 보물 450호로 지정되어 있다.

1588년, 스승 퇴계의 문집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던 김성일은 다시 조 정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다. 당시 조정은 여러 파로 나뉘어서 여전히 당 파 싸움을 일삼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성일은 자신의 복귀를 알리는 소감을 남겼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또 자신과 의견이 같다고 해서 상대방을 좋다고만 할 수도 없다. 의견이 다르거나 동조하는 것을 떠나서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 말을 들은 한강 정구는 “김성일은 원래부터 성질이 곧고 깨끗했다. 생각이나 말도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공평하구나.”라고 평했다.

이처럼 김성일은 곧은 성품을 바탕으로 불의와 부정은 참지 못하고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인물이었다.

임금이든, 왕실이든, 정승이든, 지위 고 하를 가리지 않았다. 같은 당파이거나 정적이거나, 가까운 사이냐 먼 사 이냐를 따지지 않았다. 오로지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만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했다. 이렇게 원칙을 중요시하는 성격 탓에 생전에는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상황도 가끔 벌어졌다. 하지만 이는 김성일의 탓이라기보다는 문제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려고 했던 일부의 분위기 때문에 빚어 졌던 일이었다.

김성일은 어사가 되어 지방을 둘러볼 기회도 세 차례나 있었다. 1579년 에는 함경도 순무어사가 되어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고 변방의 상태를 점검했다.

가는 곳마다 탐관오리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보살피자 “어사님은 우리 부모님 같으시다.”는 칭송이 높았다. 1583년에는 황해도 순무어사가 되어 해주 등 여러 고을을 돌면서 관리들의 상태와 백성들의 살림을 점검했다.

1588년에는 경기도 추쇄경차관이 되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지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폈다. 이렇게 세 차례에 걸친 민정 시찰을 하면서 느낀 생각을 장계와 상소로 올리고 시를 써서 남겼다.

조선통신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성균관 대사성을 맡았다. 성균 관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대사성은 성균관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따라서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두루 인정을 받지 않으면 맡을 수 없는 자리였다. 김성일이 대사성을 맡을 무렵 성균관에는 각 정파를 좇아서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성일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학생들의 임무는 오로지 진리를 찾기 위해 글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은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을 쓰 거나 나설 일이 아니다.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떠 들기만 일삼으면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바가 없고 결국 군자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나라에서 인재를 기르고자 하는 뜻이 과연 그러하겠느냐?”

김성일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조선통신사 행적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을 때 이조참판 김우옹이 나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김성일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절개와 의리를 드높였습니다. 상대가 교활하였으므로 더욱 절개와 의리를 부르짖었습니다. 영남 방어의 임무를 맡아 의병을 이끌고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남 사람들은 그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물리치고 큰 공을 세운 것은 모두 김성일이 이룬 것입니다. 김성일이 사신으로 가서 왜적의 형편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은 잘못이지만, 적이 온갖 계략으로 속이는 바람에 벌어진 일인데 그것을 어찌 큰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 록 김성일에게 죄가 있다고 해도 어찌 작은 잘못으로 큰 절개를 덮으려고 하십니까.”

1605년 김성일은 선무원종공신 1등에 선정되었으며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으로 추증되었다. 1676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으로 증직되었다. 1679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쟁이 심했던 시절에 태어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부정과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예를 중시했던 김성일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고 있다.

* 참고자료

『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한국민족문화대백과」,「국역 국조인물고」

·사진 제공_ 안동시청, 사단법인 학봉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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