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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⑧] 경북-나라를 구한 명재상 류성룡(1)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⑧] 경북-나라를 구한 명재상 류성룡(1)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19.11.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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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사회가 겪었던 가장 커다란 국란은 임진왜란이다.

조선은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선조 3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 싸움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으며 국가경제가 파탄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화재 손실도 막심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과 미술품이 소실되고 약탈당했다.

역대 왕조의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 (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임진왜란은 왜 일어났나?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란을 맞이한 조선은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었다.

온 국토가 일본의 손아귀에 거의 넘어갈 무렵, 전열을 가다듬은 민관군의 총반격으로 겨우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맹활약과,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과, 행주산성의 대승으로 전세를 뒤집는 계기를 마련한 권율 등 몇몇 뛰어난 장수들의 공로 때문이었다.

온 나라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을 때, 전반적인 정세를 살피면서 승리를 위한 전략을 마련하고 그에 필요한 계책을 세우고 이를 수행할 인재를 등용하는 일을 총괄한 인물이 있었다.

조선시대 3대 명재상으로 꼽히는 류성룡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퇴계 이황의 적통을 이어받은 뛰어난 성리학자였던 류성룡은 예학, 군사학, 의학, 지리학, 국학, 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에 두루 통달했다. 이러한 박식함을 바탕으로 나라가 위기상황에 처하자 정세를 한 눈에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대책을 강구하여 마침내 국란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14세기 말, 고려가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자 이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새 왕조가 태어났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는 개혁을 추진하는 등 사회 전 반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나라가 안정되자 지배층은 각자의 사상에 따라 계파를 형성했다.

계파 간의 사상과 이익이 충돌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일부 의식 있는 선비들은 이런 상황을 걱정한 나머지 중간자적 입장에 서서 계파 간의 조정을 시도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무렵 중국 명나라는 환관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중앙 정치가 어지러 운 상황이었다. 변방에서는 몽고와 여진족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서 안과 밖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은 15세기 후반부터 아시아로 진출한 유럽 상인들의 영향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서 전통적인 봉건사회가 흔들리고 있었다.

100년 가까이 지속되던 전국시대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통일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가 등장했다.

1585년,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는 한편, 과감한 정치개혁을 시행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도요토미는 중국 대륙으로까지 야망을 펼치려는 생각을하게 되었다.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을 침략해 야 했으므로 염탐을 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맺자고 요구했다.

일본의 요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논의한 조선은 일단 사신을 맞이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신이 지니고 온 수교 요청 문서에 오만하고 무례 한 구절이 많아서 조정의 분노를 샀다.

충북 옥천에 사는 조헌은 서울 대 궐 문 앞에까지 와서 일본 사신을 처단하고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여러 차례 논의를 거친 끝에 조선은 일본 사신을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거듭 수교를 요청해오자 그들의 실태도 살필 겸 통신사를 보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1590년 3월, 정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이 조선통신사 자격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이듬해 3월, 꼬박 1년 만에 조선통신사 일행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 데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내용이 달라서 조정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서인(西人)이었던 황윤길은 “일본은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므로 대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동인(東人)이었던 김성일은 “도요토미는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군사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엇갈린 주장을 했다.

결국 정국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의 기세에 눌려서 서 인이었던 황윤길의 의견은 묵살되고 말았다.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1월 평안도 정주(定州)에 있으면서, 국가의 시무(時務)에 대하여 올린 차자(箚 子)의 초안인 진시무차 초고.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1월 평안도 정주(定州)에 있으면서, 국가의 시무(時務)에 대하여 올린 차자(箚 子)의 초안인 진시무차 초고.

그렇지만 동인의 대표 격이었던 류성룡은 황윤길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전라도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하고, 형조 정랑으로 있던 권율을 국경지대 요충지인 의주목사로 파견하는 등 파격 적인 인사를 단행해서 전쟁을 대비했다.

한편, 통신사의 왕래에도 불구하고 조선과의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자 도요토미는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육군 15만 명과 수군 2만 명에 지원군까지 합하여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아홉 개의 부대로 나뉘어서 조선을 침입한 왜군의 선봉대였던 고니시의 부대는 그날 오후 5시 부산진에 제일 먼저 상륙했다.

부산진 첨 사 정발은 병사를 이끌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사하고 말았다. 동래부사 송상현도 끝까지 싸웠으나 역시 전사하고 말았다.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적을 맞이한 데다 조총이라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왜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란 초기에 조선군은 연전연패했다. 왜군은 별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 서울로 빠르게 진격했다. 조정에서는 북방을 지키고 있던 신립으로 하여금 왜군을 막도록 했다.

신립은 함경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두만강 건 너 적의 소굴까지 쫓아가서 소탕한 용맹한 장군이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신립이 왜군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신립은 8천 명의 군사를 이끌 고 충주 탄금대에서 고니시의 부대와 맞닥뜨렸다.

그러나 아군의 몇 배가 넘는 왜군의 숫자와 신식 무기인 조총의 화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크게 패한 신립은 탄금대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임진왜란 극복에 앞장 선 사람들

왜군의 침입으로 조선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류성룡은 내각을 이끌며 국란 극복에 필요한 여러 대책을 내놓았다. 제일 먼저 류성룡은 전투력 강화에 매진했다.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소중한 병력 자 원인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적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누가 전쟁터에 나아가 싸우려고 하겠는가.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단숨에 평양까지 진격하고 계속 북 상해왔다. 그러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를 중국 땅으로 모셔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민심 안정이 중요한 시국에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류성룡은 이를 적극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의 행렬이 한 걸음이라도 이 땅을 벗어난다면 조선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 동북지방이 남아 있고 호남지방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들이 곧 벌 떼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처럼 경박한 논의를 할 수 있는지 참으로 답답하고 통탄할 지경입니다.”

류성룡의 상소로 선조가 중국으로 피신 가는 문제는 없던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민심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류성룡은 군량 확보에 주력했다.

배가 불러야 사기가 높아지고 싸움도 잘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식량이 없으면 사람을 모을 수가 없고, 사람을 모을 수가 없으면 군대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었다.

국보 제132호, 류성룡의 징비록 초본 표지.
국보 제132호, 류성룡의 징비록 초본 표지.
국보 제132호, 류성룡의 징비록 초본 본문.
국보 제132호, 류성룡의 징비록 초본 본문.

민심 안정과 식량 확보 다음으로 류성룡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기강 확 립과 군사훈련이었다. 기강이 확립되어야 군대가 계통을 갖추게 되고, 훈련을 해서 전투력을 높여야 적과 맞서 싸울 힘이 생기는 것이었다.

“지금 제일 중요하고 급한 일은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병사들이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그 숫자가 백만 명이라고 해도 양으로 호랑이를 공격하는 꼴입니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쇠붙이를 단련시키는 일과 같습니다. 쇠붙이는 백 번 정도 단련하지 않으면 사용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야 화살과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투입해도 혼란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류성룡이 전투력 강화를 강조하고 이에 주력했던 이유는 당시 조선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일본은 오랜 준비 끝에 쳐들어왔지만 조선은 아무런 방비도 없이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일본은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로 무장했지만 조선은 구식 무기인 활과 화살이 주 무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면 오로지 군사들의 전투력을 높여서 일당백의 역 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력이 어느 정도 강화되어서 왜적과 한판 붙어볼 만해졌다고 판단 한 류성룡은 두 가지 전략을 들고 나왔다. 그중 하나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바다를 잘 지켜서 적의 군수품이 서해를 통해 육지로 전달되는 것을 막으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든든하게 지키면 왜군은 식량이 부족해서 큰 곤란을 겪을 거라고 판단했다.

조선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 류성룡을 일찌감치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자좌수사에 임명했다.

이순신은 류성룡의 기대에 보답하듯 뛰어난 작 전 능력을 발휘해서 제해권을 장악했다. 적장 고니시가 단숨에 평양까지 직격했으나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이유는 이순신이 바다를 장악하는 바람에 군수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장악해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곡창지대인 호남지방과 호서지방을 잘 지켜 서 아군의 군량을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1591년(선조 24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일 년 전만 해도 이순신은 전라도 정읍의 현감으로 있었다. 현감은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종6품직이었다. 평소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을 염두에 두고 있던 류성룡은 일본의 동 태가 심상치 않자 그를 전라좌수사로 발탁했다.

좌수사는 정3품직이므로 이순신은 단번에 7단계나 승진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여 서 반대파의 반발이 심했지만 류성룡은 밀어붙였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러한 결과를 낳은 데는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이 가장 크지만, 이순신을 그 자리에 발탁 한 류성룡의 안목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있는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 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편, 바다에서는 제해권 장악에 주력했던 류성룡은 육지에서는 청야 전법(淸野戰法)을 장려 했다. 청야전법은 평지에서 전투를 하지 않고 지형을 잘 이용한 요새를 쌓아서 저항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산과 구릉지가 많아서 산성 쌓기가 용이 했다.

산성은 높은 곳에 있어서 적의 동태를 관찰하기 수월했다. 반면에 적의 공격은 용이하지 않았다. 외부에서 산성을 공격하려면 사다리를 사용하거나 흙을 높이 쌓고 구름다리를 이용해야 했다.

무기를 사용할 때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공격하는 건 편리하지만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공격하는 것은 매우 불편하고 효과도 떨어졌다.

청야전법을 잘 이용해서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행주대첩이다. 역시 류성룡이 발탁한 장수인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육지에서의 전세를 뒤집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권율은 2800 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0배가 넘는 3만여 명의 왜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 인 끝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행주대첩에서 왜군은 2만4천여 명이나 죽거나 다치는 등 거의 전멸을 했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뚜렷한 전공을 남긴 이순신과 권율을 류성룡이 발탁한 업적에 대해『선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조 24년 2월, 우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고 있던 류성룡은 인재 등용에 있어서 적격자를 가려 조정의 기풍을 맑게 하려고 애썼다. 왜 구의 행동이 심상치 않자 이에 대비하고자 장수를 적재적소에 앉혔다. 형조정랑 권율을 천거하여 의주목사로 삼고 정읍현감 이순신을 천거 하여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그런데 나이가 많은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교체하려고 했으나 임금의 반대로 실패했으니, 이는 왜란 초기 경상도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서애 유성룡의 생각과 삶』,「한국민족문화대백과」,「네이버캐스트」

·사진 제공_ 안동시청,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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