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함양 휴천면 문상마을은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킨다.

큰길에서 조금 더 오르니 아래로 탁 트여 눈앞을 가린 것 없고 산 중턱에 터를 잡아 살만한 곳이다.

집집마다 아기자기한 마당이 좋다. 두부를 만드는 노부부에게 길을 물었더니,

“조금 더 올라가. 건강에는 등산이 최고야.”

“나도 산을 좋아했는데 관절염 수술을 했어.”

허리를 겨우 펴며 조심해 다니라고 일러준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되살아난 숲

11시경 등산로 입구다. 열병식 하듯 소나무는 줄을 섰고 2월 중순인데도 감태나무는 잎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봄을 기다린다.

소나무 껍데기에 붙은 이끼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솔잎 쌓인 나무 밑으로 겨우내 푸른 잎을 달고 추위와 싸운 알록제비꽃이 대견스럽다.

20분가량 오르니 시멘트 포장 임도 길이 가로 지르고 색깔 좋은 소나무 아래엔 씨를 뿌린 듯 어린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란다.

마치 묘포장(苗圃場)을 방불케 하는데 그야말로 천연 갱신지(天然更新地)다. 자연 갱신과 같은 뜻.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고 저절로 다시 새롭게 이루어진 산림이다.

솔 향내를 맡으며 삼림욕하기 최적의 솔숲이라 기분 좋게 올라간다. 산림은 단순히 산과 나무를 일컫지만 삼림(森林)은 나무가 위아래로 세 개나 있어 울창하니 빽빽할 삼(森), 이는 나무·산뿐만 아니라 온갖 동식물들과 생태계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바위에서 물 한 잔하기 위해 잠시 배낭을 내린다. 지금부터는 경사가 다소 급하고 햇살이 잘 들어오는 바위 구간인데 신갈나무들이 자란다.

산마을.
산마을.
마을 지키는 느티나무.
마을 지키는 느티나무.

눈 밝은 일행은 산꼭대기 보라고 눈짓하는데 새둥지 모양을 한 겨우살이가 푸른 기세를 자랑하며 달려 있다.

군데군데 떨어진 가지는 손수건에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겨우살이는 전국적으로 드물게 자라고 겨울에 노란빛이 도는 녹색으로 참나무, 팽나무, 오리나무, 밤나무, 자작나무, 배나무 등에 기생한다.

여름에는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가만있다가 나뭇잎 다 떨어진 가을부터 자라 3월에 암수 딴 그루로 꽃 피고 노란 구슬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

열매는 새들의 좋은 먹이가 된다. 씨를 싸고 있는 과육이 끈적끈적 점액질이라 나무껍질에 부리를 비벼 닦으면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새들이 씨앗을 퍼뜨리는 셈이다. 혈압안정과 항암제로 쓰는데 렉틴(lectin) 성분은 종양세포를 소멸시켜 면역체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크리스마스 무렵 겨우살이 아래서 허락 없이 키스할 수 있다. 거부하면 불운을 겪는다고 한다.

어느 옛날 겨우살이 화살를 맞고 숨진 아들의 주검 위에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이 하얀 열매가 되어 상처에 놓으니 다시 살아났다. 감격한 어머니는 겨우살이 밑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키스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겨우살이는 사랑의 상징.

겨우살이.
겨우살이.
겨우살이.
겨우살이.

정오 무렵 능선길 올라서니 걷기는 쉬운데 잔설이 남아있어 군데군데 미끄럽다. 여기서 정상1.6·문정마을1킬로미터 남짓.

오늘 산은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운지버섯, 노각나무, 겨우살이, 길 가장자리로 고사리 마른줄기 가득하고 능선길 소나무 가지는 여인의 몸매와 살결을 닮았다.

그래서 미인송으로 불렀구나.

볼거리 많으니 오늘은 운 좋은 날인가 보다. 부처의 보살핌인가?

진리(法)를 활짝 꽃 피우는(華) 것이 법화(法華).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 연꽃은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결코 더러워지지 않으니 이산 기슭에서 숨 쉬다 간 선현들을 닮아 보기로 했다.

산벚·노각·굴참·물박달·물푸레·박달나무들이 저마다 눈바람에 서 있는데 잔설 얼어붙은 곳에서 그만 미끄러졌다. 낙엽 밑에 얼음이 있었으니 박달나무 찬바람에 껍질 벗겨지듯 허벅지가 아려온다. 오후 1시경 정상 가까이 왔는가 보다. 멀리 엄천(嚴川)강1)이 구불구불 흘러가는데,

“도대체 정상이 어디야?”

말 떨어지기 무섭게 헬기장에 닿고 곧바로 991미터 법화산(法華山) 정상. 함양 휴천면 금반·문정리 일대로 강줄기를 가늠하면 마천과 생초의 중간 지점이다.

산길 그대로 따라갔으면 지나칠 뻔 했지만 다행히 정상을 찾아 점심자리를 폈다.

엄천강 너머 멀리 지리산 줄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이 산 꼭대기 둘밖에 없다. 오늘 하루 산을 몽땅 전세 낸 셈이다. 옛날 산 아래 법화암(法華庵)이 있었대서 법화산이라 했다.

(다음 회에 계속)

글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주석>

1) 엄천사 절집이 있어서 엄천강이라 부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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