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12시 20분경 청주한씨 봉분 근처에서 눈을 한번 들어보니 멀리 산들마다 거칠 것 없는 일망무제(一望無際).

산 위로 정상이 보이고 굽어보는 산길(林道)이 뱀처럼 산허리를 감고 구불구불 기어간다. 명산대찰이건만 어이해서 표지판은 이렇게 인색할까?

지금부턴 아이젠도 없는 눈길이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지팡이를 겨우겨우 짚어가며 앞으로 가는데 차가운 눈바람까지 불어오니 악전고투 30여 분 왔다.

성주산 장군봉을 지키는 1톤 오석

눈길 구간을 지나 12시 50분, 김치만 넣고 굵게 둘둘 말아온 김밥으로 점심을 먹는다. 갈림길에 드물던 팻말이 반갑다(심연동1.3·장군봉0.5·문봉산2.3km, 백운사는 거리 표시가 없다).

산 정상으로 조금 더 오르니 소나무림이 아주 뛰어난데 몇몇 나무에 오래된 칼자국이 선명하다. 여기서도 송진을 탈취했는지 온통 브이(V)자로 훼손된 나무들마다 안쓰럽기 그지없다.

장군봉 오석.
장군봉 오석.
장군봉 신갈·물푸레·노간주나무.
장군봉 신갈·물푸레·노간주나무.

드디어 오후 1시 15분, 무염선사와 같은 여러 성인들이 살고 있다는 성주산 정상 장군봉(677미터). 앞에는 서해바다, 뒤로 멀리 부여 쪽이다. 여기서 심연동1.8·왕자봉5.9·문봉산이 1.8km 거리다.

표지판 없다고 투덜대던 것을 눈치챘는지 거대한 표석이 늠름하게 서 있다. 오석(烏石)이다.

아마도 높이 2.5m에 1톤 이상은 될 것 같은데 참 크게도 만들었고 뒷면에는 신라말 도선비기를 쓴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성주산(聖住山) 시가 새겨져 있다.

“가며 가며 길 트인 깊은 성주산(行行 聖住山 前路),

구름 안개 겹겹이 쌓여 있는 곳(雲雲 重重 不暫開),

모란 줄기 어디메 꺾여진 건가(看取 牧丹 何處折),

푸른 산 첩첩이 물 천 번 도네(靑山 萬疊 水千廻).”

부귀의 상징, 목단 형국 명당들

길지를 암시하는 예언 시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목단은 부귀를 상징하니 남포일대는 예로부터 성주산 남향으로 만세영화지지(萬世榮華之地)1)가 있다고 했다. 성주산 정상을 뿌리 부분으로 본다면 산기슭에서부터 목단이 피는 지점에 목단형국 명당 여덟 개가 있다고 전한다.

목단은 모란이라 하며 2m 정도 자란다. 5월에 빨갛게 꽃이 피고 이어서 작약이 핀다. 여러해살이 풀로 향이 진한 작약에 비해 목단은 향이 없거나 약하나 꽃이 화려농염(華麗濃艶)2)하여 위엄과 품위를 갖추고 있다. 화중왕, 꽃 중의 왕이다.

호화현란한 아름다움이 장미와 비슷하지만 살아 있는 예술품으로 친다. 부귀의 상징으로 도자기에 덩굴로 그린 문양을 많이 볼 수 있다.

부귀화(富貴花), 목작약(木芍藥), 화왕(花王), 낙양화(洛陽花), 화신(花神) 등으로 부르고 한방에서 뿌리껍질은 항균제로 썼다.

목단은 나무, 작약은 풀이다. 신라 진평왕 때 중국에서 들어왔다. 진평왕은 딸만 셋을 두었는데 천명, 덕만, 선화공주다.

당나라 태종이 덕만공주 선덕여왕에게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목단그림을 보냈다. 벌과 나비가 없으므로 향기도 없음을 알았다 해서 지혜 있는 왕으로 알려졌다.

북쪽으로 오서산(烏栖山)이 한눈에 들어오고, 금북정맥(차령산맥) 끝자락인 성주산 장군봉에서 남으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겹겹이 이어진 긴 산줄기가 서해로 달린다.

우리는 왔던 길과 겹치는 심연동으로 가려다 먹방, 왕자봉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방향을 알았으니 오늘은 문명의 편리함을 확실히 느낀 셈이다. 능선길 20분 남짓 걸어 신갈·물푸레·노간주·서어·산벚나무들이 드세다.

까마귀 소리는 먹을 것을 달라는지 시끄럽다. 다시 10분 후에 갈림길인데 바로 가면 왕자봉5.4·옥마정6.9·청라면사무소3.1, 오른쪽은 은선동 냉풍욕장1.4, 뒤쪽으로는 장군봉0.5km. 내려가는 길이 헷갈려 걱정하던 때 마침 얼굴이 닮은 부부 산동무를 만났다. 오늘 산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반갑게 인사했다.

(다음 회에 계속)

글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주석>

1) 도선국사가 보령(保寧)을 둘러보고 만세영화지지가 있다고 한 데서 유래, 만세보령으로 부름.

2) 화려하여 한껏 무르익은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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