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作,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cm2×35.6c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作, '야금모행(夜禁冒行)',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cm2×35.6c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간송미술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야금모행>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의 풍속화로 풍속화첩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에 들어 있는 30점 중 하나이다.

그믐달이 뜬 겨울 밤 여러 명의 인물들이 초롱을 든 시종을 앞세워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차가운 밤기운 때문인지 등장인물 들은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용 복장을 갖추었는데 그림 왼쪽에 그려진 붉은 철릭을 입은 별감은 머리에 쓴 초립 안에 방한모를 이중으로 착용하였다.

그가 쓰고 있는 방한모가 ‘풍뎅이’인지 ‘남바위’인지는 그림 상에서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풍뎅이’와 ‘남바위’는 조선 시대에 남녀가 모두 착용했던 방한모로 서로 모양이 비슷하지만, ‘남바위’는 모자가 귀만 가리는데 반해, ‘풍뎅이’는 모자 양옆에 달린 볼끼를 사용하여 귀와 뺨, 턱까지 가릴 수 있으며,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뒤로 젖혀서 뒤통수에 매어 착용했다.

길을 앞서 가고 있는 시종이 들고 있는 것도 털이 달린 방한모로 보이지만, 어떤 종류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별감 옆에 서있는 양반은 소매통이 넓고, 옆선이 트인 겉옷인 중치막을 입고 속에 방한용으로 옅은 보라색의 누비 배자를 걸치고 있으며, 팔에는 털토시를 끼고 있다.

양반 옆에 서 있는 기생으로 보이는 여인은 장옷이나 쓰개치마는 쓰지 않고, 누비 속바지와 털토시를 착용하여 추위를 대비하고 있다.

다른 풍속 화가들과 비교해 볼 때 신윤복 풍속화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강한 색채의 대비이다. 그는 서로 대비되는 색을 함께 사용하여 화면에 긴장감과 생동감을 부여하였는데, 이 그림 역시 그러한 특징이 잔 나타난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처음에는 노란색 초립을 쓰고 푸른색 방한모와 붉은색 철릭을 입은 별감의 옷차림에 고정되었다가, 다음으로 연두색 저고리에 자주색 깃, 토시, 허리띠를 맞춰 입은 기생의 복식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감각적이고 강한 대비 색상의 옷을 입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흰옷을 입은 양반을 배치하여 화면의 균형감과 긴장감을 절묘하게 유지하고 있다.

또 그림의 전체 구도를 보면, 오른 쪽 앞 공간에 키가 작은 시종 아이를 배치하여, 어른 세 명이 공간을 꽉 채운 왼쪽과 균형을 절묘하게 맞추었다.

각각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어른들의 시선이 뒤를 돌아보며 길을 인도하는 아이의 시선 쪽으로 향하게 만들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붉은 색 옷을 입은 별감에서부터 여인의 담뱃대를 따라 시종 아이 쪽으로 자연스럽게 유도된다.

그런데 이 그림은 어떤 장면을 그린 것일까?

<야금모행(夜禁冒行)>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통행금지를 무릅쓰고 밤길을 간다’라는 뜻을 의미한다.

제목의 의미 하는 것처럼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야간에 통행을 금지했던 조선 시대에 세도가의 양반이 통행금지를 위반하면서 야밤에 기생을 데리고 어딘가를 가다가, 순라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여 겸연쩍은 표정으로 한번 봐달라고, 머리를 숙이며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혜원전신첩》이란 화첩의 이름과 여기에 실린 풍속화 30점의 제목은 모두 신윤복이 직접 붙인 것이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서 붙여진 그림 제목이고, 따라서 <야금모행(夜禁冒行)>이란 그림 제목도 원래 신윤복이 그린 그림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강명관 교수는 그동안의 해석에서 그림 왼쪽의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을 순라군으로 잘못 보았다고 주장하며, 조선 후기에 초립과 홍의는 별감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으므로 이 사람은 순라군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 양반은 갓에 손을 대고 가벼운 목례를 하고 있고, 별감은 손을 뻗어 앞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이 별감은 기생을 관리하는 기부라고 설명한다.

즉 이 그림을 별감이 기생과 동침을 원하는 손님에게 기생을 딸려 보내는 장면이라고 해석하였다. (강명관,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 푸른역사, 2001, 155~156쪽)

기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기생서방’이라는 의미이지만, 기생의 법적인 남편은 아니고, 기생에게 기방을 내주고 영업권을 갖고 있던 기방의 실제 운영자이다.

조선 시대에 기생은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노비 신분이었다.

나라의 큰 행사가 있으면 지방에서도 기생들이 차출되어 왔는데, 이 때 기생들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경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이 때 기생에게 필요한 제반 경비를 지불해주고, 이를 빌미로 기생의 뒷배가 되어 기생을 관리하며 영업을 했던 기부들이 존재했다.

경제적 능력이 있다고 누구나 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별감·포교(포도군관)·정원사령·금부나장·궁가나 척리의 청지기·무사 등이 기부가 될 수 있었다.

혜원의 풍속화에는 기생이나 술집과 관련된 장면에 별감이나 포교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 별감이나 포교들은 기부로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윤복作 '기방난투',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2cm×35.2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作 '기방난투',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2cm×35.2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은 고령 신씨로 호는 혜원이다.

아버지 신한평(申漢枰, 1726~?)은 도화서의 화원으로 특히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윤복 또한 화원이 된 것으로 보이나, 그의 생애나 행적을 문헌 기록에서 찾기는 어렵다.

또한 제작 연대가 밝혀진 작품이 드물어 정확한 활동 시기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주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간송미술관 소장 <蕙園風俗畵帖>을 통해 본 19세기(순종~고종년간) 민간의 복식과 생활상(이태호·양숙향, 강좌미술사 15권, 한국미술사연구소, 2000)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강명관, 푸른역사, 2001)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푸른역사, 2004)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편(국립민속박물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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