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고종 어진', 1918년, 비단에 채색, 162.5cm×100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작자 미상, '고종 어진', 1918년, 비단에 채색, 162.5cm×100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고종의 어진으로 붉은색 강사포(降紗袍)를 입고, 통천관(通天冠)을 쓴 고종이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고종이 머리에 쓰고 있는 통천관은 고종이 황제가 된 이후 착용한 관으로 12량(梁)에 12마리의 매미가 붙어 있고, 각 량 마다 5색 구슬을 12주씩 꿰어 장식하였다.

강사포는 왕과 황제가 입는 붉은색 조복(朝服)으로, 주로 조정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을 때 입었다.

강사포를 입을 때 함께 착용하는 관으로는 원유관(遠遊冠)과 통천관이 있는데, 원유관은 왕이 쓰는 것이고 통천관은 황제가 쓰는 관이다.

따라서 통천관을 쓴 고종의 어진은 1897년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이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종은 두 손을 옷소매 속에서 꺼내지 않은 채 규(圭: 옥으로 만든 홀)를 잡고, 두 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붉은색의 강사포는 광택이 많이 나고 두께도 있어 보여 공단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어진은 다른 어진들과 그리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얼굴을 그릴 때는 선묘를 사용하지 않았고, 농담의 차이만으로 붉은색 강사포의 질감과 옷 주름의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두꺼워 보이는 재질의 휘장을 용상 뒷면에 배경으로 그리고, 바닥에도 휘장과 유사한 재질의 양탄자를 그렸다. 배경으로 휘장을 그리는 것은 일본에서 천황이나 쇼군 등의 초상화를 그릴 때 많이 사용하던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는 유물대장에는 ‘남계’라는 사람이 그렸다는 “嵐溪 畵”라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남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일본인 화가가 그렸다는 의견도 있어 작가와 제작 기법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신문물을 받아들이는데 호의적이었던 고종은 사진을 많이 남겼는데,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실황족성감(皇室皇族聖鑑)』에는 고종이 강사포를 입고 찍은 사진이 남아있어 학계에서는 이 사진을 본보기로 삼아 어진을 그렸을 것으로 본다.

통천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은 고종 황제 사진, 『皇室皇族聖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통천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은 고종 황제 사진, 『皇室皇族聖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또한 이 어진은 고종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는 영친왕에게 선물로 주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일본 황실의 가산을 정리할 때 분실된 초상화를, 1966년 한일우호협회에서 구입하여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가 오래 전 집에 걸려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 이 어진이 진본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66. 12. 17 참조)

【참고문헌】

어진에 옷을 입히다(박성실, 민속원, 2016)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국립고궁박물관, 2015)

한국 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편(국립민속박물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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