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대신 차를 마시다

김홍도作 '동리채국도', 18세기후반, 지본담채, 113.8X48.0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作 '동리채국도', 18세기후반, 지본담채, 113.8X48.0cm, 국립중앙박물관.

【뉴스퀘스트=함은혜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한 선비가 큰 나무 아래에 현이 없는 거문고를 안다리 위에 올려놓은 채 앉아있다.

그는 바로 옆에 앉아있는 다동을 쳐다보고 있고, 다동 역시 이 선비를 바라보며 찻물을 끓이고 있다. 선비와 다동의 매우 가까운 거리가 그들의 친밀함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김홍도의 <동리채국도(東籬採菊圖)>이다.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 중 5수인 ‘채국동리하(采菊東籬下)’의 시구를 주제로 삼아 그린 그림으로, 김홍도의 차 그림들 중 하나이다. 화면 좌측 상단에 “동리채국(東籬採菊)”이라는 제시가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초가집 짓고 마을 근처에 살아도

수레나 말 시끄럽지 않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세속에서) 멀어지면 사는 곳도 자연 외진 곳이 된다네.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노라니,

유연히 남산(南山)을 바라본다.

산 기운은 저녁에 아름답고

날아다니던 새들도 무리지어 돌아오는구나.

이 가운데 참뜻 있으니

말하고자 해도 (이미) 말을 잊었노라.

“結盧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지금 살펴본 도연명의 「음주」 시의 내용 중에서, 당시에 주목받았던 구문은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노라니,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다. 회화에서도 이 구문을 작품의 핵심 주제로 삼았다.

그 예시로 정선의 선면화인 <동리채국도>가 있다.

정선의 작품에서는 시의 전문(全文)에 충실한 요소들을 소재로 선택했는데, 은거지를 둘러싼 울타리와 그 주변에 핀 국화꽃, 그리고 인물 앞에 놓인 술잔 등이 있다. 정선의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연명의 이 시에서 술이 지닌 의미는 크다.

그러나 동일한 주제의 김홍도의 작품에서는 정선의 작품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중심인물인 고사(高士) 앞에는 거문고가 있고 그 옆에 차를 달이는 다동이 등장한다는 점은 시의 내용과 다른 부분이다. 이는 도연명의 은일생활에 중점을 둔 김홍도만의 해석이 녹아든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가 ‘동리채국’을 주제로 선택하면서, 시 전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하기 보다는 시 속의 몇 가지 요소들만 부각시켜서 도연명의 ‘은자(隱者)로서의 모습’을 강조한 것 같다.

즉 이 작품은 시의 내용을 근거로 하면서도 은자의 모습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작가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찻물 끓이는 다동의 모습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선과 김홍도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보자. 정선의 <동리채국도>에는 시의 내용대로 남산을 바라보는 고사와 그 앞에 술잔이 놓여있다면, 김홍도의 <동리채국도>에는 거문고를 타는 고사와 그 옆에 찻물 끓이는 다동의 모습을 표현하여 본래의 시 내용을 재해석하였다.

김홍도의 구성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여기서 작품에 묘사된 풍로와 탕관, 다동의 모습은 김홍도의 차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양식으로 그려졌다.

그럼 차와 술의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자. 1907년에 발견된 “돈황문서(敦煌文書)” 중에 당나라 현종대 항공진사 왕부(王敷)의 「다주론(茶酒論)」이 있을 만큼 차와 술은 예부터 함께 지칭되어온 음료들이다.

문인들의 문예 활동에 함께 자주 등장하며, 차와 술은 세속을 떠나 이상적인 상태로 이끌어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명나라 말 원굉도(袁宏道, 1568~1610)가 “차와 술은 한 가지다”라고 한 의미는 아마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술과 차의 미묘한 차이도 있다.

김홍도의 동리채국도 부분 확대.
김홍도의 동리채국도 부분 확대.

그 차이는 술은 근심을 잊게 해주는 매개체로써 이성을 초월하여 ‘의식을 잃게’ 하는 역할이라면, 차는 마음을 다스려 사색할 수 있게 도와주며 ‘정신을 맑게 하여 각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당나라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육지음(六之飮)」 중에 “만약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우울함과 울분을 삼키려면 술을 마시며, 정신의 혼미함을 깨우치려면 차를 마신다.”라며 술과 차의 마시는 때를 나누어 기술하였다.

아마도 김홍도는 도연명의 술잔 대신 차를 소재로 삼음으로써, 차가 술과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상태로 이끌어줌과 동시에 더 맑은 정신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는 또 다른 특징도 보인다. 바로 그림 속 선비의 다리 위에 올려놓은 ‘줄이 없는 거문고[무현금(無絃琴)]’이다.

이것은 조선 중기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에서 살펴봤듯이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무금(撫琴, 거문고를 어루만지다)의 고사와 연관이 있다. 거문고가 모양새를 갖추지 않아 물리적인 소리는 내지 못하지만, 마음의 움직임이 소리가 된 점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경윤의 <월하탄금도>에서 도연명의 술자리 대신 차를 마시는 모습을 도상화한 것처럼 김홍도의 <동리채국도>도 술 대신 차를 마시는 자리로 표현했다.

도연명의 작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은 이경윤, 김홍도 둘 다 마음의 소리가 완성된 상태를 찻물 끓이는 소리와 차를 마시는 형상과 결합시켜,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맑고 이상적인 정신세계를 향해 여유와 안정을 찾으려는 그들의 뜻을 잘 드러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트레스가 심하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 주로 술을 찾는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술의 수요가 증가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 요즘엔 삼삼오오 모여서 점차 차를 접하고 또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아마도 술이 주는 이상적인 상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마음을 맑고 청아하게 함으로써 위로를 받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차가 주는 따뜻한 위로와 평안을 지금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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