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에 빠지다

이명기作 '송하독서도', 18세기말 19세기초, 지본담채, 103.8x48.5cm, 삼성미술관 리움.
이명기作 '송하독서도', 18세기말 19세기초, 지본담채, 103.8x48.5cm, 삼성미술관 리움.

【뉴스퀘스트=함은혜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암석을 꽉 움켜쥔 듯이 뿌리를 내린 거대한 소나무 두 그루 아래에 소박한 초당이 있다.

이 초당 안에는 한 선비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고, 초당의 처마 밑에는 다동이 찻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졸고 있다.

책에 푹 빠진 선비와 졸고 있는 다동의 모습에서 고요함과 한가로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찻물이 천천히 끓어오르는 소리와 푸른 솔잎의 향이 초당을 휘감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이 바로 조선 후기 이명기(李命基, 생몰년 미상, 18세기 활동)의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이다.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소나무 가지 위에는,

“여러 해 동안 책을 읽었더니, 어린 소나무가 모두 늙은 용의 비늘이 되었네. 화산관.”

讀書多年 種松皆作老龍鱗. 華山館.

이명기의 호인 “화산관(華山館)”과 함께 위 제시가 적혀있다.

이 제시는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의 「춘일여배적과신창리방여일인불우(春日與裴迪過新昌里訪呂逸人不遇)」 중 마지막 두 구절인 ‘閉戶著書多歲月, 種松皆老作龍鱗’을 ‘讀書多年, 穜松皆作老龍鱗’으로 글자의 임의적인 순서 변환과 구절의 변용을 통해서, 이명기의 자의적인 해석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그는 세속의 명예와 부를 뒤로 하고 은거하는 문인의 삶과 정서를 읊은 왕유의 시를 화제(畵題)로 삼고 있다. 이러한 왕유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곧장 가면 무릉도원 바람과 먼지 끊기고 버드나무 서 있는 남쪽 어귀에는 잔잔한 물, 문에 닿았으나 감히 새떼에게 말 붙이지 못하고 대나무 바라보며 주인에게 묻는다. 성위의 푸른 산은 지붕과 같고 동쪽 집의 물은 서쪽으로 흘러든다. 문 닫고 독서로 오랜 시간 보내니 소나무가 모두 늙은 용비늘이 되었다.”

桃源一向絶風塵 柳市南頭訪隱淪 到門不敢題凡鳥 看竹何須問主人 城上靑山如屋裏 東家流水入西鄰 閉門著書多歲月 種松皆老作龍鱗

실제로 왕유는 그의 삶이 평탄치 못해 은거를 하였으며, ‘망천(輞川)’이라는 별장에서 만년에 본격적으로 은거하며 자신을 수양하였다.

왕유의 망천은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자연 속 은자적(隱者的) 삶의 이상향으로 삼아 다수의 시와 그림이 남아 있다.

이 시에도 역시 이러한 은자적 삶과 정서가 잘 녹아 있다. 특히 “문 닫고 독서로 오랜 세월 보내니”라는 구절은 어지럽고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한적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부분이다.

이명기가 바로 이 구절을 <송하독서도> 작품의 주제로 삼아, 은자의 삶을 독서에 깊이 빠져있는 선비의 모습에서 차를 마시는 장면으로까지 연상시킴으로써 깊이 있게 표현하였다.

그 의도는 화면의 전체적인 구도와 구성 요소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령이 오래된 두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와 초당에서 한가로이 글을 읽는 선비를 확대하여 그린 것은 화제의 시적 정취를 충실히 담아내려 한 듯 보인다.

이때 중심인물인 선비 앞에 찻물을 끓이며 졸고 있는 다동의 모습을 등장시켜 은거 생활의 한적한 분위기가 더욱 심화되었다.

풍로는 전체 표면에 문양은 없으며 동그란 손잡이가 달려있고, 탕관은 제량호이다.

이명기의 또 다른 다화인 <죽림칠현도>와 유사하다.

이 작품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하여 볼 점은 바로 소나무이다. 이 소나무는 초당과 비슷한 크기의 큰 암석 위에 하얀 뿌리를 드러내어 마치 초당을 지붕처럼 덮고 있는 형태이다. 특히 이명기는 제시의 내용 중 하나인 ‘용의 비늘’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인다.

실제로 소나무가 오래되면 줄기 부분이 비늘처럼 갈라지며 벗겨지게 되는데, 이 부분을 그림에도 반영하였다. 노송(老松)임을 나타내는 비늘모양의 소나무 줄기를 구형과 곡선의 필선을 이용하여 충실히 드러냈다.

또한 두 그루의 소나무 중 곧은 몸통의 소나무는 암벽과 암석 사이를 균형 있게 잡아주고, 그 옆에 곡선으로 표현한 소나무는 화면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전체적으로 율동감을 준다. 이명기의 치밀한 구도 감각이 돋보인다.

왕유는 자신의 화론(畫論)책인 『산수론(山水論)』에서 송피(松皮), 즉 소나무 줄기의 표현에 대해서 “소나무의 껍질은 비늘과 같고, 측백나무의 껍질은 수신을 감고 있는 것과 같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오랜 관찰을 통해서 소나무에 대한 이해를 이론으로 표현한 것이다. 왕유가 자신의 시에서 소나무 줄기의 표면을 용의 비늘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그의 관찰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위의 시 뿐 아니라 왕유의 시들 중에서 소나무와 관련된 작품들이 많다. 대부분 은일(隱逸)과 관련된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소나무 아래[송하, 松下]라는 공간이 은일을 위한 장소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함은혜 연구원.
함은혜 연구원.

이명기의 <송하독서도>에서는 소나무와 선비의 독서, 그리고 찻물을 끓이는 다동, 이 세 가지 요소들이 결합되어 이상적인 은자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솥에서 찻물 끓이는 소리를 소나무 바람소리에 빗대어 표현했듯이, 소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시려 준비하는 모습은 이명기가 차를 통한 풍류와 아취를 더욱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나무가 멋있게 드리워진 그늘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는 상상을 해보자.

빌딩들에 둘러싸인 현대 도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 문인들이 그림으로 와유(臥遊)했던 것처럼, 우리도 <송하독서도>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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