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국립한글박물관]
1728년(영조 4) 김천택이 편찬한 시조집 '청구영언' [사진=국립한글박물관]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국어시간에 『청구영언(靑丘永言)』이라는 조선시대 가집(歌集)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난다. 조선시대 3대 가집 중의 하나이며, 김천택이라는 사람이 편찬을 했다, 정도가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하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이런 단순한 사실에도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은 가집(歌集)이란 말은 여러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청구영언이란 무슨 뜻인가? ‘청구’가 해동(海東)이나 근역(槿域)이라는 말과 같이 조선, 즉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이다. ‘영언’은 『시경(詩經)』에서 비롯한 말로 “詩言志, 歌永言”에서 유래한 것이다.

시는 뜻이 있는 말이고, 노래는 긴 말이다, 라고 해석이 된다. 시와 노래를 간략하게 정의한 것으로, 특히 노래는 긴 말이라는 정의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우리의 전통 가곡을 들어보면 ‘긴 말(永言)’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청구영언’이란 ‘우리나라의 노래’라는 아주 단순명료한 제목인 것이다.

『청구영언』을 편찬한 김천택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숙종이 임금인 시절인 1680년대 말에 태어났고, 사망한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50세 무렵인 1728년(영조 4년) 『청구영언』을 편찬했다. 젊었을 때는 포도청의 포교를 지냈고, 이후 노래의 가사를 짓고 노래를 부른 가객(歌客)으로 살았다. 『청구영언』의 서문은 쓴 정래교는 김천택의 인물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남파 김백함(-김천택)은 선가(善歌)로 온 나라에 이름이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성률(聲律)에도 익숙하며 아울러 문예(文藝)도 닦았다.

스스로 새로운 작품을 지어서, 이항인(里巷人)에게 주어 그것을 익히도록 했다. … 백함은 이미 노래를 잘하여 스스로 신성(新聲)을 지었다.

또 선금자(善琴者)인 전악사(全樂師)와 함께 아양지계(峨洋之契)를 맺어 전악사가 거문고를 연주하면, 백함은 그것에 화답하여 노래를 불렀는데 그 소리가 맑아서 귀신을 감동시키고 화창한 기운을 일으킬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기예는 일세에 뛰어난 재주라 할만 했다. 내가 일찍이 남모르게 깊이 간직한 병이 어 가슴에 맺힌 것을 풀 수 없었는데, 백함이 반드시 전악사와 함께 와서 이 작품들을 가지고 노래를 연주하여 나로 하여금 한 번 듣게 하니, 마음 속에 맺힌 것을 씻을 수 있었다. 무신년(1728) 늦은 봄에 흑와(黑窩-정래교)는 쓰다.(김용찬, 「김천택의 삶과 작품세계」에서 인용)

정래교의 서문에서도 스스로 작품을 지어서 이항인들에게 주어 익히도록 했고, 스스로 노래도 잘 불렀다는 것을 감격스럽게 밝히고 있다. 특히 전악사라는 거문고 명인과 함께 연주를 하면 ‘귀신을 감동’시킬 만큼 뛰어나다고 했다.

대단한 가수였다는 이야기다. 김천택은 직접 지은 시조가 약 80여수가 되기에 활발하게 가사를 짓고 노래를 부른 인기 싱어송라이터, 혹은 뮤지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천택은 『청구영언』을 지은 것으로 보아 노래 교사 역할도 상당히 한 것으로 보인다.

더 확대하면 김천택은 노래를 가르치고, 작사 작곡을 했으며, 공연 기획도 한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대표라 볼 수 있다. 『청구영언』의 쓰임새가 노래 교본이었으니, 자신의 소속 가수들에게 일종의 가사집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김천택은 『청구영언』을 편찬하면서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첫째 가사(시조)의 사라짐을 막고 길이 전하는 데 있다.

둘째 정확한 곡조와 가사를 전해 세속에서 잘못 부르는 것을 막고자 한다. 셋째 노래를 통해 민풍(民風)을 교화한다.

이러한 목적 중에서 세 번째 민풍교화는 당시의 시대상에 입각한 명분이었을 것이고, 실제의 목적은 위에서 언급한 당시의 가수(주로 기생과 가객)들의 교육용 책이었을 것이다.

『청구영언』에는 580수의 시조가 실려 있다. 이 시조는 독서용 시조, 읽기 위한 시조가 아니라 노래 가사로서의 시조다.

즉 가곡의 가사로서 기능하기 위한 시조였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김천택은 시조의 배열을 초수대엽, 이수대엽, 삼수대엽 등 가곡의 곡속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A라는 곡에는 이런 가사로 불러라, B곳에는 이런 가사로 불러라, 라고 친절하게 편집했던 것이다.

김천택은 가곡의 진흥을 위해 『청구영언』을 편찬한 것인데, 이 김천택의 작업 덕분에 후대의 가집 편찬도 뒤따랐고, 결과적으로 현대의 우리는 우리 조상이 구전한 노래(가곡) 가사(시조)의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향가가 실려 있음으로 해서 신라시대 노래의 개략을 파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천택의 『청구영언』은 고려말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노래인 시조가 현존할 수 있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또한 『청구영언』은 조선 후기 『해동가요』, 『가곡원류』 등의 여러 가곡집 출현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김천택은 가곡의 보급을 위해 『청구영언』을 편찬했지만, 그 덕에 우리 조상의 시조문학이 오롯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