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증 불가능의 명제

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뉴스퀘스트=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미래가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운명이 결정돼 있다는 생각은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과거 사건들의 상호작용을 크게 업식(業識)과 연기(緣機)로 설명한다.

업식(業識)은 무명의 훈습으로부터 움직이는 본체적인 마음을 말하는데 이 무명의 훈습은 마음과 의식, 생각과 정념 등의 양상에 포괄적으로 작용한다.

연기(緣機)는 여러 원인으로 인하여 생기는 인연의 상호 관계를 말한다.

단, 업식과 연기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왔고 장래에도 이어져 가는 개념이어서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차이’는 과거의 자아와 지금의 자아 사이의 인연적 상호작용과 성장 또는 노화로 인해 발생한다.

차이는 일종의 이중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식 주체와 객체, 나와 주변 등의 상대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포

스트모더니즘 철학에서는 이를 차연(差延, Unter-Schied)이라고 한다.

이를 직역하면 <사이-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차연’의 이중성은 분리돼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서로 연장되어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므로 일심(一心)으로 귀결된다.

불교에서는 이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라고 한다.

바꿔 말한다면 둘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일 수 있는 연결성이라 할 수 있는데, ‘화엄학’에서의 “자타상용불용동문(自他相容不同門)” 개념과도 서로 통한다.

정리해 보자면 업식과 연기에 의해서 형성되는 자아와 현상세계는 마치 서로 엉켜서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전부터 훈습된 업식과 연기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도 하고 미래를 향해 형성되어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분리돼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 세계는 사실상 서로 간섭하며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상대에게 밀접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영향력은 결국, 우주 에너지를 계속해서 전개(Development) 시켜 나아가게 한다.

한편, 미래가 결정돼 있고, 운명이 결정돼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입증이나 증명의 명제가 아니고 신앙이나 믿음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업식과 연기 등 무한의 변수가 디벨롭먼트(Development) 되고 있는 ‘미래’와 ‘운명’의 속성은 전술한 바와 같이 가변적 토대에 의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천해 가고 있는 불완전한 자아와 우리의 인지, 그리고 과학적 증거 등을 통해서 ‘천당’과 ‘지옥’이라고 하는 사후세계나 ‘전생’과 ‘환생’이라는 윤회를 입증할 수 없다.

따라서 결정론적 관점은 물리 세계에서의 입자와 중력, 그리고 물리법칙에 한해서는 유효한 개념이라고 판단된다.

이 범주를 벗어난 결정론은 입증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결국, 믿음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거나 부처님의 자비를 믿는다는 문제와 사주팔자를 믿는다던가 운명을 믿는다는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신앙’의 영역이고, 후자는 일반적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믿음의 대상인 절대자나 절대 행복의 세계를 설한 이의 설법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를 구원의 지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사주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과는 당연히 구별된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계율을 따르며 예수님의 인류를 위한 자기희생과 사랑을 믿으며 실천한다면 분명 구원을 얻게 된다.

부처님의 법성과 성문들의 보살도를 믿고 따르기 위해 수행하며 신심을 낸다면 분명 행복을 얻게 된다.

하지만 ‘신앙’을 잃거나 그릇된 믿음을 내는 이들은 자기가 편의적으로 생각한 ‘신앙’을 원망하며 부정하는 삶을 살게 된다.

‘운명’을 믿거나 ‘결정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가 믿는 운이 좋을 때는 바라는 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어디 인생이 항상 마음먹은 대로 되겠는가?

결국, 자신의 욕심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 이를 탓하면서 스스로 무너져 가게 된다.

이를 ‘탐진치(貪瞋痴)’라고 한다.

16세기 명나라의 원요범은 자신의 체험담을 ‘요범사훈’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이 책은 요범 선생이 아들 원천계에게 운명의 속성에 대하여 알려 주게 위해서 썼다고 한다. ‘요범사훈’의 내용을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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