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이 시조는 성행위 장면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대어 역을 보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늙은 소나무 가지 위의 옹이가 남근(男根)을 닮았나보다.

그 남근 형상을 보며 자신(여성)의 욕망의 갈증을 표현하고 있다. 한 겹 더 들어가면 이러한 시조는 여성의 욕망을 표현한다기 보다는 남성들의 호색적인 음담패설일 가능성이 더 많다.

만횡청류의 여러 음사(淫辭)들 중 여성의 성욕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시조는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한 음담패설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천생연분의 조건은 부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궁합에 있다는 것을 여성 입장에서 표현한 시조다.

이 시조에서 화자는 여인이다. 그런데 그녀의 애인이 바로 스님이다.

스님의 모자를 베고, 나의 족두리를 베고, 스님의 장삼을 덮고 나의 치마를 덥고 사랑을 나누니, 무엇을 덮은들 상관이 있을까.

둘의 행위 자체가 황홀한 것이어서 외부적인 것은 상관이 없다. 다음날 그전 날 둘의 행위를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온다.

이 시조에서 ‘흥글항글’은 사라진 말인데, 현대어로는 ‘흥뚱항뚱’에 해당한다. ‘흥뚱항뚱’은 어떤 일에 마음이 가 있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간밤의 정사(情事)를 생각하니 일이 손에 잡히겠는가.

상당히 외설의 수위가 높은 시조다. 큰 연장을 가진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간밤의 일이 엄청났고 여인이 성적으로 감당하기 어렵기에, 누구든지 이 남 자를 데려간들 시샘을 하겠는가, 하는 뜻이다.

시조는 역설적으로 남자의 염원을 담고 있다.

여자의 육체를 탓하지 말고, 물고기를 잡아먹는 한강의 되강오리의 목처럼 자신의 물건이 길게 늠름하게 되면, 기생이나 술도 팔고 몸도 파는 여자들(주탕패)이 자신을 좋아하게 되어, 사랑받는 남자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시조다.

하급의 남근중심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인데, 남자들의 거근(巨根)에 대한 염원이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시조는 극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먼저 한 마을 아낙A가 하는 말이 등장한다. 아낙A는 일러바치겠다고 말한다. 무엇을? 아낙B와 김서방의 간통 사실을 아낙B에게 일러바치겠다는 것이다.

아낙B는 남편에게는 물 길러 간다고 해놓고 우물에 와서는 물통은 내팽개치고 김서방과 교신하여 삼밭으로 들어간다.

우물가에 있는 삼밭의 삼은 키가 커서 남녀가 성행위를 해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간접 정황이 드러난다. 잔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은 흔들려 삼대 끝만 남는다(그들의 행위가 격렬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

그런 증거도 있으니 아낙B의 남편에게 일러바치겠다는 말이다. 아낙B는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자기 남편에게 아낙A가 입이 부드러워 거짓말을 하는 여자니 믿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살림을 하는 마을의 여인이니, 삼밭에 들어가 실삼을 조금 캤다고 할 것이니, 이를테면 일러라 이렇게 맞받아치는 것이다. 사실 아낙A가 이렇게 일러바치겠다고 하는 이유는 자신도 김서방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조는 이런 상황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김천택이 『청구영언』 만횡청류에 이런 외설시조를 배치한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1728년(영조 4) 김천택이 편찬한 시조집 '청구영언'. [사진=국립한글박물관]

그것은 가곡을 주로 불렀던 곳이 각종 연회라는 점에 주목하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궁중의 연회를 제외한다면 조선시대의 연회는 술이 곁들여진 일종의 놀이판이다. 일반적인 연회에서의 시작은 대개 충(忠)과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가곡을 먼저 나왔을 것이다.

이런 노래는 일종의 의례였다. 이런 의례적 성격의 노래만으로는 연회의 주흥을 돋울 수가 없다.

의례가 끝나면 요즘도 그렇듯이 조선시대에도 놀이판이 무르익는다. 특히 기생이 함께 하는 질펀한 연회였다면,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위의 시조와 같은 음사(淫辭)가 당연히 따랐을 가능성이 많다.

위의 시조 중에는 현대에까지 실제 가곡으로 불리는 가사가 있기에 이런 노래 가사들의 생명력도 길다.

즉 연회의 주흥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기에 김천택은 약간의 낯간지러움 혹은 낯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음사 가사를 채택하여 수록했던 것이다. 이런 음사 시조가 기생에 의해 불려지고, 그 다음 주흥이 이어지면서 연회는 절정으로 무르익어갔을 것이다.

김천택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음사 시조를 도저히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조선시대의 외설시조가 지금까지 버젓이 전해진다. 이런 시조는 주제적으로 보면 시조의 의미적 경직성에서 벗어나 시조의 육체성을 풍만하게 드러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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