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 문화에디터.
하응백 문화에디터.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 ‘라떼매니아’라는 신종 용어가 있다.

원래 라떼는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탄 카페라떼의 준말이고 ‘라떼매니아’는 라테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 때는 말이야’를 남발하는 신종 ‘꼰대’들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한 광고에서 시작하여 더욱 유행한 말로 ‘나 때는 말이야’는 영어로 직역하여 ‘latte is horse’라고 하기도 한다.

‘라떼매니아’에 대응하는 젊은 세대의 반응은 말로는 바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머리를 감싸 매고 ‘아, 꼰대’, 혹은 ‘그래서 어쩌라고’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이어지는 말의 유형은 여러 가지겠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대단히 단순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고생고생하면서 열심히 살아서 성공했다가 대부분이다.

일종의 영웅담이다. 영웅담은 대개 주인공이 고생을 하면 도움을 주는 누군가가 나타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꼰대’들의 영웅담 속에도 그런 조력자가 나타난다.

열심히 일했더니, 그걸 알아준 ‘전무님’이 부장으로 승진시켜 주었다든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는데,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서 국회의원이 되고... 겨우 얼마를 모아 집 한 채를 샀더니, 부동산 붐을 타고 그 집이 수 십 배 올라, 다시 어디에 투자를 하고, 상가 건물을 사고... 여기서 꼰대의 조력자는 직장의 상사, 정치적 동지 혹은 후원자, 부동산 신화다.

이런 영웅담은 내면적으로 보면 기득권을 지켜내고자 하는 강력한 염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나의 자리를 탐내지 말라, 나의 부동산에 월세 내는 걸 아까워하지 말라, 다 나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거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과 이 사회는 ‘나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꼰대’로 상징되는 기득권층이 득실대는 나라의 주인은 ‘꼰대’다. 젊은 세대는 주인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살았던 ‘노예’에 해당한다.

이제 주인인 ‘꼰대’가 노예인 젊은 세대에게 불만을 터트린다.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왜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고, 왜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고, 왜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으려 하고, 왜 국가에 충성하지 않고, 왜 공동체에 책임감이 없고, 왜 민족의 미래에 무관심하고, 왜 통일에 관심이 없는가?”

노예가 왜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노예는 잘 먹고 잘 놀면 된다. 미래보다는 현재가 훨씬 중요하다. 노예에게 미래는 사치일 뿐이다.

세대 간의 간극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젊은 세대의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은 역사 발전의 큰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고려말에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구세대에 대한 반동을 체계화하여 새로운 나라 조선을 등장시키기도 했고,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 역시 젊은 세대들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좀 더 크게 보면 세대 갈등이 새로운 역사를 쓰는 원천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신진세력이 이론적 정합성으로 무장하여 기성세대의 기득권을 깨부술 때 역사는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이다.

다른 ‘꼰대’도 아닌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현재 한국 사회에서 ‘꼰대’라 부를 수 있는 기득권세력은 주인 자리를 젊은 세대에게 물려줄 정신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젊은 세대가 주인 의식을 갖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김용균씨의 죽음으로 촉발된 비정규직 문제, 젊은이들의 주택과 주거비 문제 등에 보다 과감한 양보를 해야 한다. 비상식적인 부동산 상승에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취업의 공정성에도 보다 넓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계층 상승을 위한 사다리 역할을 했던 직업군에 대한 공정성도 확보해야 한다. 의학전문대학원이나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과 같은 가진 자에게 유리한 제도의 철폐를 논의해야 한다.

주인 ‘꼰대’의 시간은 이제 지나가고 있다. 젊은 세대가 주인의식을 갖고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꼰대’들의 마지막 역할이다.

그런 것을 거부하고 끝까지 ‘꼰대짓’을 하면, 그는 열심히 산 ‘꼰대’도 아닌, 역사의식이 있었던 ‘꼰대’도 아닌, 그저 운이 좋았던 ‘양아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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