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참모로 임명된 심성지는 모집된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2월 2일에는 참모와 서기 등 간부를 선출하였으며, 3일부터 청송 일대 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면 서 주변의 사태를 살피는 한편, 기습의 기회를 노렸다.

그 후 사병도총(司 兵都摠)까지 선임되어 의병에 합류하면서 심성지가 이끄는 청송의진은 완벽한 태세를 갖추어갔다.

청송의병 연합부대를 이끌고

그러나 같은 시기 청송지역에서 의병을 사칭하며 백성들을 현혹해 군량미를 공출하는 등 금전적 해를 가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국가와 의병을 위하는 민심을 악용한 사건에 대노한 심성지는 청송 인근에 방을 붙이고 의병들을 시켜 민심을 살피는데 주력하였다.

이 와중에도 선봉장 홍병태(洪秉泰)와 함께 흥해(興海)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고 모량도감 (募粮都監)을 설치하고 각 문중에 할당하여 군량미를 모으는 등 의병장으로서 눈부신 활약을 이어갔다.

그렇게 청송의병은 일본과 맞붙을 만발의 준비를 해나갔다. 그러나 지휘부나 포병 중에서 정식 군사훈련을 받은 자가 없었기에 전문 군사와 싸우는 과정에서 부상이 속출했다. 이에 결국 김하락이 이끄는 이천의병, 김상종(金象鍾)의 의성의병과 힘을 합쳐, 심성지는 의병연합군을 이끌었다.

이천 의병장 김하락은 5월 9일 의흥을 공략하여 무기와 화약 대여섯 짐을 확보하는 등 선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같은 시기 상종을 필두로 한 의성 의병은 황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군위에 주둔하던 30여 명의 관군이 5월 10일 황산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군사력 차이로 인해 관군에 크게 패하게 되었다. 이에 의성 의병장 김상종은 황산전투 패배의 설욕을 잊기 위해 대곡에 진을 치고 있던 김하락의 의성의 병단에 지원 요청을 함과 동시에, 남은 군사를 이끌고 청송으로 들어와 현서면 안덕면 신시장 등지를 떠돌았다.

당시 관내방비에 힘쓰고 있었던 청송의진은 황산전투 참패 뒤 의성의 진 군사 80명과 이천의진 군사 100명이 청송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 고 교련관을 보내 그들을 맞이하였다.

예순여섯 살 노구를 이끌고 의병운동을 진두지휘한 심성지의 최종 결정으로 인해, 의성·청송·이천 연합군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연합군 결성으로 다시 힘을 얻은 심성지는 “나라의 형편이 지극히 어려움을 당하여 밀지를 내리셨음에, 우리는 다 같이 북으로 머리를 돌려 죽기를 맹세하고 분발할지어다.”라며 의병들의 사기를 북 돋는 한편, 의병연합군의 승리를 가늠하였다.

연합군의 역공, 감은리 전투

1896년(건양 1년) 5월 14일 안덕면 감은리.

의병 수십 명이 몸을 숨긴 나무 위로 총탄이 마구 날아들었다. 오랜가 뭄으로 마른 나무에 화약이 닿자 삽시간에 산이 불에 휩싸였다. 희뿌연 연기가 여기저기서 솟아올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자, 의병들은 그림자 형상을 바탕으로 서로를 짐작하였다.

산 위쪽에서 관병 무리가 쏘아대는 총탄 소리가 땅을 뒤흔들고, 총알 이 허공을 갈랐다. 매캐한 연기와 눈발처럼 날아드는 총알 때문에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나가자! 나라를 구하자!”

선방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뒤를 따르던 포병들이 농기구에 가까운 무기를 허공에 들고 힘차게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의병들이 무서운 기세로 적진을 향해 내달렸다. 일찍이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심성지는 중군장 김대락(金大洛)에게 포 정(砲丁) 60명을 이끌고 감은리 뒷산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적군들 이 한발 앞서 산세의 우위를 점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심성지는 지략을 발휘해 전투계획을 전면 수정하였다. 청송·의성·영천의 3의병진을 연합한 심성지는 우선 김대락이 이끄는 의병단을 산 중턱에 위치시켰다. 청 송의진이 선발대에서 일본군을 향해 내달리고, 배후에는 이천의진이 자리하였다. 청송·이천·의성 의병단 연합을 합치니 그 수가 240명을 넘었다. 세 연합군은 마을 앞에 진을 치고 산을 에워싸 적들의 공격을 막았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관에 보존된 의병대장 심성지의 시첩. [사진=청송군청]
청송 항일의병기념관에 보존된 의병대장 심성지의 시첩. [사진=청송군청]

240명이 넘는 연합군은 수적으로는 관군보다 우세했으나, 무기나 군사력에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격차를 보였다. 적군은 일개 사졸까지 화승총을 들고 있었다.

의병단 손에는 천보총과 농기구를 개조한 조악한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화승총은 분당 4발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마구잡이로 날아드는 총알에 의병들은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이 앞만 보고 전 진하였다.

관군은 경험에서 나온 지력을 바탕으로 산의 높은 지대를 점거 하고 의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선두에 선 청송 의병단이 적 진에 가까워오자, 총탄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고막을 파고드는 총성과 화승포에서 튄 불꽃이 감군리 뒷산을 뒤덮어, 지옥을 연상케 하였다.

파죽지세로 달려드는 관군의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의병단은 엄청난 기세로 적지를 향해 직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하나둘씩 총에 맞아 쓰러지는 부상자가 나왔다.

의병들은 쓰러진 동료의 처참한 모습에 야수처럼 포효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에서 쓰러지면 동료들의 사체조차 거둘 수 없다는 생각이 의병들을 의기투합하게 하였다.

이에 사방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관군 대열이 흩어진 틈을 타 의병이 사격을 이어갔다. 일본 관군들은 살기 위해 앞산을 향해 전력 질주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 의병들의 맹공에 총상을 입은 관군이 속출하였고, 목숨을 건진 관군들은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관군들이 하나둘씩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자,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관군 무리가 재빠르게 후퇴했다. 그 뒤를 청송의병이 바짝 추적하였다.

이를 산 정상부에서 지켜보고 있던 관군 대열 역시 개미 떼처럼 흩어져 어둠이 깔린 산속에 몸을 숨겼다.

3진 연합의병의 위력을 대단하였다. 의병들은 도주하는 관군들의 뒤를 끝까지 추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의병에 총에 맞아 죽은 관군이 10명이 넘었으며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산등성이로 숨어드는 관군의 뒤를 쫓으며 의병은 승리를 확신하였다. 그러나 이미 산을 뒤덮은 어둠이 관군을 숨겨 주었고, 연합군 의병단은 그들을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일단 마을로 돌아간다.”

이미 주변은 어두워졌고, 적군은 종적을 감추었다. 시간만 허락됐다면 적군을 완전히 함락시킬 수 있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들을 놓치고 말 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운명 밖의 일이었다. 이대로 싸우다가는 의병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했다.

이에 의병연합군 지도부는 무기를 재정비하고, 의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부족한 병력, 적군과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한 무기로 싸워 승리한 감군리 전투는 의병연합군의 사기를 증진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의병연합군은 부상당한 동료를 부축하면서 산에서 내려왔다. 산 초입에 다다르자, 마을 전체가 화염에 둘러싸인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란 의병 들이 사력을 다해 내달렸다.

가까이서 본 마을의 형상은 더욱 참담하였다.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검게 그을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물건과 어지럽게 널브러진 세간을 본 의병 몇몇이 눈물을 흘렸다.

감군리 전투에 대패한 관군의 전세가 불리하 자, 의성·신녕 등지로 떠나면서 분풀이로 마을 전체에 불을 지핀 것이었다. 불길이 잦아들지 않자, 연합군은 옥현에 전장을 풀고 날이 새기를 기 다렸다.

이튿날 청송의진은 이천의진과 의성의진에 네 동이의 술을 전달하고 방향을 달리하였다. 이천·의성의진은 다치거나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며 전시 태세를 갖추고, 의성으로 돌아갔다. 그 후 청송의진은 방어책을 갖추고 관군의 공격에 준비하였다.

이어 심성지가 몇몇 병사를 보내 확인 하니, 감은리가 모두 불타고 7가구밖에 남지 않았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청송의진은 파렴치한 관군에 복수를 다짐하며 전장을 꾸렸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청송의병 사이버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유교넷 유 교역사관 (인물정보서비스), 청송문화원, 청송심씨대종회, 한국학자료센터,『우사 조도걸 전 집』, 조동걸, 역사공간, 2011.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